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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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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임이 종료됩니다]

[앞으로도 이어질 당신의 여정을 응원합니다.]

여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울렸다.

나는 어리둥절하며 눈을 떴다.

“…?”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뭔가가 잔뜩 내 몸에 얽혀 있다는 걸 느꼈다.

고개를 숙이니, 나란히 바닥에 바짝 붙어 있는 나와 천여울이 있었다.

심지어,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얼굴이며 팔다리가 착 달라붙어 있다.

마치 민달팽이 두 마리가 바닥에 겹친 것처럼.

나는 놀라서 몸을 떼려고 몸부림쳤다.

“야… 야….”

조심스레 그녀를 떼어내려 하는데, 천여울은 눈만 껌뻑이며 더 바짝 파고든다.

“여보… 왜 그래요?”

뭔 놈의 여보.

달달한 목소리로, 현실과 게임의 구분이 전혀 안 되는지.

자꾸만 파고든다.

꾸물꾸물, 비비적비비적, 오히려 더 안기는 기세였다.

“한 번 더… 할까요?”

“뭘, 대체 뭘.”

나는 식겁하며 답했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옅은 잠꼬대까지 흘린다.

그때.

  • 퍽!

“악.”

누군가 천여울의 등을 세게 걷어찼다.

씩씩거리는 윤채하였다.

강아린, 하시온, 유하나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달팽이 한 마리만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못 찾을 뿐.

씩씩거리던 윤채하는 이를 악물더니 테이블 위의 큐브를 향해 달려갔다.

“악마의 게임!!!”

소리를 지르며.

  • 쨍그랑!

큐브를 힘껏 내리쳐 산산이 부숴버렸다.

“…아?”

“…어?”

순간, 모두의 시선이 허공에 멈췄다.

그리고 그제야, 마치 파도처럼, 각자의 머릿속에 게임 속에서 살아온 삶이 쓰나미처럼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강아린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자기 통제력과 정신력이 강했다.

사실 몰입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몰입이 된 거지, 거부하려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몰입을 유지한 건, 애초에 이 게임의 의도 자체가 남달랐기 때문.

눈을 뜬 그녀는 생각했다.

‘아….

남 좋은 일만 했구나.

원래 계획은 정해인만 불러, 둘이서만 게임을 테스트하는 거였다.

둘이서만.

몰입의 한계를 없앤 프로토타입이기에, 둘의 생활은 아주 끝까지, 정말 그 끝까지 가게끔 설계했다.

아마 시간이 지속됐다면, 천여울과 정해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분명, 그런 의도를 가진 거였는데….

결국 남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왕국 기사에서 공작가로 스카우트되어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아냈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도 정해인은 옆에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다음으로 눈을 뜬 것은 하시온.

바닥 위에 그대로 엎드린 채, 살짝 고개만 들었다.

‘아… 조금만 더 있었으면….

마침내 만나게 된 정해인.

드디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순간.

정말 조금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정해인의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게임은 잔인하게도 딱 그 도입부에 끝나버렸다.

‘… 아쉽다.

아쉬움, 그리고 애틋함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세 번째로 눈을 뜬 건 유하나.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접근 방식은 좀 특이했고, 유하나의 본래 도덕적 관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불륜녀라니….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금지된 관계에서 오는 짜릿한 감정이 몸을 지배했다.

처음엔 부끄럽고, 또 어딘가 수치스러웠다.

일반적으로는 품을 수도 없는 금지된 감정, 그걸 직접 살아보니, 오히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조금은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나, 혹시….

유하나는 뭔가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여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 역시 게임 속의 일을 회상했다.

얼굴, 볼, 귀 끝까지 전부 빨갛게 달아오름을 느꼈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밀려드는 정신 나갈 정도로 아찔한 행복감.

꿈에 그리던 거의 모든 행동을 다 경험했다.

딱 하나 빼고.

아직도 그의 입술 감촉과 향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를 않는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은 실제로 거사를 치르지는 못했다는 점?

그러나 오히려 그전까지는 전부 경험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실제로 하면 될 일이었다.

넷 여성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아쉽다.

오히려, 이 그 감정은 내면 어딘가를 서서히 뜨겁게 달궜다.

아쉬움이 남긴 작은 불씨가, 그녀들의 내면을 태우고 있었다.


나도 정신을 차렸다.

바로 떠오르는 기억들.

  • 늘 사랑해요, 여보.

  • 저두요….

  • 으윽.

마지막으로.

  • 하읏….

천여울과 나눈 수없이 낯 뜨거운 교류들이, 미친 듯이 머릿속을 찌른다.

‘이거 진짜야?

지금도 귀에 맴도는 듯한 아내… 아니, 천여울의 숨소리.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던 그녀의 나신.

촉촉한 입술, 그 따뜻함까지.

아.

순간,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강아린, 이 미친 인간.

이런 정신 나간 게임을 가져올 줄은 몰랐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렇게 몇 분, 이 공간 안의 인원들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씩씩거리는 윤채하의 분을 삭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봤다.

모든 인원의 얼굴이 익은 홍시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의도는 아니어도 그냥 사과해야 할 것만 같았다.

“뭐가…?”

가장 먼저 대답한 건, 바로 옆의 천여울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이것저것….”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사실 나 때문에 누군가는 불륜녀가 되었고.

누군가는 육욕에 눈이 먼 수녀가.

누군가는 사랑에 눈이 먼 영애.

또 누군가는 그런 영애를 질투하는 기사가 됐다.

어떻게 되어 먹은 게임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옆자리의 천여울이 무릎을 끌어안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난…괜찮아….”

평소답지 않게, 작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당연히 괜찮겠지.”

그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윤채하가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생각해보니, 나와 윤채하는 게임 내에서 접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게임을 끝낸 것은 윤채하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입술을 앙다물고 있더니 이내 불만을 터뜨렸다.

“나만… 나만… 몰입을 못 해서, 얼마나 답답….”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윤채하.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에, 이상하리만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툴툴거리는 윤채하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고, 망설임 없이 들어 올렸다.

“… ?”

그대로 내 무릎 위에 앉힌 뒤, 살살 끌어안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지만, 이내 아주 천천히, 내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에 응답하듯, 천천히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읏.”

귀 끝부터 볼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윤채하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몸이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정신을 차렸다.

‘어…?

아니 갑자기 무슨 짓을….

나도 모르게, 아내가 삐쳤을 때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해버렸다.

여울이는 이렇게 하면 화를 풀며 말없이 나를 침실로 안내했었지….

아니 제발, 정신 좀 차리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주위의 시선이 죄다 내게 꽂혀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드니 천여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눈매가 살짝 올라간 채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말없이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익숙한 듯, 당연하다는 듯, 내게 안기라는 손짓.

한순간, 몸이 저절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허둥지둥 손을 떼며 윤채하와 거리를 벌렸다.

윤채하는 귀까지 붉어진 채로 손끝을 꼭 쥐었다.

방 안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아직, 모두가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분위기였다.

“빨리 나가자.”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이미 한밤중.

문에는 동아리장의 메모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 잘 즐기는 거 같아서 안 깨우고 퇴근함! 문 잠그고 가라~!

센스있는 동아리장.

그냥 깨워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가 남긴 메모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밖은 이미 새벽이었다.

나는 즉시 24시간 카페로 달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6잔을 샀다.

1L짜리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이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마시고 정신 차리자.”

나는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 쪼옵.

  • 쪼옵.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조용히 새벽의 공원을 채웠다.

나는 플라스틱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게임의 부작용을 완벽히 체감했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농담도 하고, 장난도 쳤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녀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을 이성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게 내 신념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이 전부 말아먹었다.

그저, 모두의 시선을 피해 커피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해인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천여울이었다.

평소처럼, 그러나 조금 더 진한 장난기가 담긴 미소.

눈매는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왜 이쪽 안 봐?”

맑은 목소리와 동시에, 옆에 앉아있던 인원들도 하나둘씩 입꼬리를 올린다.

각자 미묘한 미소를 띤 채,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본다.

눈빛에는 기대감이 맺혀있다.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