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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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내부는 외부의 초라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기둥과 대리석 바닥은 고대 신전의 웅장함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곳곳에는 우아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신성한 기운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아마 스켈레톤 굴이었으면 달랐겠지만, 여기는 이중 던전이었다.
“응 좋다. 컨디션이 좋아지네.”
천여울이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얼굴에는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머리카락은 윤기를 머금어, 마치 실처럼 찰랑였다.
이 던전은, 아니 던전이라 해야 할까.
일본의 전설적인 무녀, 이아노의 무덤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쯤, 일본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이아노가 생전 남겼던 유서가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본국에는 가짜를, 타국에 진짜를.’
유서에 따르면, 그녀는 도굴을 우려해 가짜 무덤을 일본 본국에 남겼고, 진짜 무덤은 아무도 모르는 타국의 깊은 산속에 숨겼다고 했다.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일본에 있던 이아노의 가짜 무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굴당했다.
문제는 그 유서로 인해 밝혀진 사실.
수백 년간 일본이 지켜온 무덤은 결국 가짜였던 것.
일본은 유서를 바탕으로 전 세계를 뒤져 그녀의 진짜 무덤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 무덤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몇 위계였어?”
천여울에게 한 질문이었다.
이아노는 자신의 무덤을 타국에 던전을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단단히 숨겨놨었다.
걸맞은 신성력이 아니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기준이 최소한 3 위계였다.
그러나 아까 천여울이 펼친 그 기운은 3 위계의 것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글쎄… 난 완전 3 위계였는데?”
천여울은 내 질문에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갸웃했다.
“왜? 아닌 것 같아?”
그녀는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역으로 질문했다.
나는 던전 내부를 다시 둘러보았다.
이곳은 이중 던전이다. 원래라면 복잡한 퍼즐과 난관이 이곳저곳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했다.
‘너무 깨끗해.’
대리석 바닥에는 먼지 한 점 없었고, 어지럽게 얽혀 있어야 할 길은 직선으로 펼쳐져 있었다.
게임에서 치트를 사용해 7위계 이상의 사제를 동원했을 때나 발생하는 상태였다.
일반적인 사제의 3 위계로는 택도 없다.
‘… 그럴 수도 있나.’
최상급 성수를 사용하긴 했다. 영감이 엄청나게 아끼던 거다, 굉장히 귀중하기도 하고.
게다가 천여울은 평범한 사제가 아니다. 설령 같은 3위계여도 그녀의 신성력의 양과 질은 타 사제와 궤를 달리했을 것이다.
사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긴 한데.
“다 외워 왔는데….”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공략과 퍼즐을 외워 왔다.
막상 못 쓰게 되니 속이 쓰린 기분.
“신기하네. 그 조그만 던전 뒤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
천여울은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마치 레드카펫이 깔린 듯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길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다, 원래 이 길은 수많은 함정과 퍼즐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다행이네.’
어리석었던 아까의 나를 잊겠다.
“넌 어떻게 알았어?”
길을 걸으며 천여울이 물었다.
“성수도 준비해 오고,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반짝였다.
궁금할 만도 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꺼냈다.
“여긴 이아노의 무덤이야.”
“정말로?”
천여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아노에 대해서는 그녀도 아는 눈치였다.
“문헌을 뒤지다가, 이아노가 과거 태백에 방문한 기록을 발견했어.”
실제로 일본은 여기까지 와서 수색했었다. 결국 못 찾았지만.
“태백은 산맥 덕분에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데, 언데드 던전이라니. 앞뒤가 안 맞잖아? 그래서 여기 있을 수도 있겠다 추측한 거야.”
천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뭐, 90퍼센트는 운이지.”
천여울은 조용히 웃었다.
“겸손하네.”
대화가 끝날 즈음, 우리는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시 한번 숨을 멎게 했다.
모든 함정을 돌파하면, 자동으로 이 문이 열린다.
-쿠구궁….
아무래도 우리는 모든 함정을 돌파한 것으로 취급되는 모양이었다.
거대한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내부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 있었다.
“와….”
내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곳에는 동양적인 정취가 가득한 주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기와로 얹힌 지붕과 붉은 기둥들, 그리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집 옆에 우뚝 선 벚나무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흩날리는 벚꽃 잎들은 눈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고요한 분위기를 더했다.
“분위기가 달라졌네?”
천여울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생전, 이아노의 생가를 본뜬 무덤이었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는 거대한 동상이 서 있었다.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의 형상이었는데, 땅에 꽂힌 검과 옆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이곳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처럼 보였다.
마치 시간을 초월한 공간에 들어온 듯, 모든 것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무덤의 풍경을 구경하던 그 순간.
-쾅!!!!
뒤의 거대한 문이 부서질 듯이 닫혔다.
“앞에!”
천여울이 소리쳤다.
눈앞에 있던 거대한 동상이 마치 생명이라도 얻은 듯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거리를 확보했다.
동상은 무겁게 땅을 울리며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더니, 우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겨눴다.
“… 이곳은, 과거, 미래, 현재, 그 어떤 시간의 구분도 없는 곳이다.”
붉은 안광이 투구 사이에서 번쩍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검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천여울을 겨눴다.
“네놈은… 자격이… 있는가?”
그의 검에서 나온 기운이 일렁이며 천여울을 감쌌다.
주변 공기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동상의 붉은 눈이 잠시 빛을 잃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자격이 인정됐다.”
“보는 눈이 있네.”
천여울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녀의 농담에도 동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나에게로 겨눴다.
차기 성녀 후보인 그녀가 인정받는 건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네놈은… 자격이… 있는가?”
기운이 이번엔 나를 휘감았다.
나는 허리춤에 찬 창을 강하게 쥐었다.
이제 싸워야 할 시간인 듯했다.
“전투 준비.”
작게 내뱉은 말에 천여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녀는 눈을 감으며 깍지를 끼고 기도를 시작했다.
아마 동상은 곧 저 큰 검을 그대로 내리꽂을 것이다.
근육이 터질 듯이 수축했다. 나는 언제든지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 자격이 인정됐다.”
“…어?”
칼을 내려놓은 동상이 다시 붉은 안광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뭐지?’
동상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천리를 거스르는 자여, 드디어 짐을 내려놓았나….”
천리? 짐?
이런 전개는 모른다.
그냥 대판 싸우고 이긴 다음, 동상에게 인정받는다. 이게 정석적인 전개였다.
“그리고 그 짐을 나누어 짊어진 자여….”
천여울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 무게를 느껴라.”
-콰가가가가각!
동상은 말이 끝나자 거대한 검으로 자신을 갈랐다.
금이 간 돌덩이처럼 천천히 무너지며 안쪽에서 반짝이는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응.”
천여울이 조용히 되뇌였다.
“느낄게.”
그녀의 표정에는 어딘가 결의가 서려 있었다.
동상이 서 있던 초석 위에는 십자가와 투명한 병이 놓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십자가와 투명한 병에 담긴 액체.
하나는 이아노의 십자가로, 상상 이상의 신성력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전설의 영약.
마나의 통로를 강제로 확장하고, 그 효율을 극한까지 상승시키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영약이었다.
전자는 천여울의 몫으로 생각해뒀고, 후자는 성시우의 몫으로 계획해 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각각의 가치를 현금화한다면….
‘못해.’
그만큼 이 유물들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쉽다, 이럴 거면 분배 요청할걸.”
천여울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십자가를 들고 잠시 고민했다.
‘지금 줄까?’
어차피 십자가의 신성력을 받아들여도, 그녀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지금 이곳에서 넘겨주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했다. 밖으로 나가면 협회가 달려들어 시간이 지체될 게 뻔하니 말이다.
결심한 나는 십자가를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너 가져. 나도 이런 보상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어차피,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수도 있어.”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순간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바뀌었다.
“그것도 좋은데, 내가 더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
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우리 신전에 비싼 돈 받고 팔아.”
그리고는 귀에 속삭였다.
“어차피, 교단에서는 무조건 나한테 줄 거거든.”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때?”
…천재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 그래도 돼?”
“응.”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국 십자가와 영약 모두를 가방에 넣었다.
“그 영약은 어떻게 할 거야? 마실 거지?”
“아니, 쓸 곳이 있어서.”
성시우 먹여야지. 그가 유일하게 타고난 마력 용적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그래?”
천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함께 던전 입구를 향해 걸었다.
“잠깐.”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그 영약 나한테 줘봐. 내가 판단해볼게.”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영약을 꺼냈다.
“뚜껑은 열지 마, 효과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뚜껑만 열지 않으면 된다. 오랜 시간 응축된 그 기운은 뚜껑을 열자마자 섭취하지 않으면 전부 날아간다.
나는 그녀에게 신중히 영약을 건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퐁
?
뭔 퐁?
뚜껑을 여는 듯한 소리에 놀란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푹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내 입에 영약을 꽂아버렸다.
“읍!”
-꿀꺽
목을 타고 뜨겁게 타오르는 액체가 넘어간다.
그녀는 내 뒤에서 나를 꽉 붙들며 말했다.
“옳지… 옳지… 쭉 들이켜.”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몸속에서 폭발하듯 퍼졌다.
몸의 힘이 풀리며 다리의 힘이 빠져 나간다. 나는 그녀에게 기대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응, 우리 해인이… 착하지?"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귀에 속삭였다.
"누나한테 안겨서··· 푹 자고 일어나자?"
그 순간, 용솟음치는 마력의 흐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약효가 몸에 돌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흥, 이게 얼마나 귀한건데. 또 누굴 주려고….
사라져 가는 의식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