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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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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열 받는 건 역시 의견은 안 내면서 반대만 하는 인간과 강제로 살아야 되는 거지만, 그와 비슷하게 열 받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시험 방식을 자꾸 바꾸는 주최자였다.
비슷한 예로 매년 바뀌는 교육과정에 신음을 흘리는 수험생이 있었는데, 지금도 비슷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기준에 참가자들이 분노했다.
“뭐가 부동의 현자냐. 하루마다 기준이 갈대처럼 바뀌는데.”
“아르카나 체스? 갑자기 이런 건 왜 하라는 건지.”
다만 분노했다고 주최자를 들이박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한가지. 사람들의 불만이 많다면 그건 힘이 부족한 거다.
부동의 현자를 봐라. 멋대로 시험 문제를 바꾸는데 아무도 항의를 못 하지 않나?
“즉 충분한 힘을 갖춘다면, 마법을 얻기 더 쉬워진다는 거죠.”
“이제 대놓고 빼앗겠다는 선언을 하는구나.”
“아니죠. 조금 더 공평히 거래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나는 경기장에 모인 면면들을 살폈다.
7위계 마법사인 섬뢰와 6위계 마법사 챠리부터 시작해 최소 5위계의 강자들이 모였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 있게 아르카나 체스 기물을 만지작거렸다.
하기야. 아르카나 체스는 마법사가 좋아할 법한 보드게임이니까. 전부 자신이 있을 법했다.
마법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오만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믿었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거다.
그런 녀석들이기에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해 기어코 법칙을 뒤트는 것이기도 했는데, 아르카나 체스는 머리를 쓰는 게임이니까. 머리를 쓰는 게임에서 자신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 마법사는 세상에 없었다.
나는 대충 빈자리에 앉았다. 정해진 자리가 없기도 했고, 자리는 체스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누군가 내 앞에 앉았다.
웬 남자였는데,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게 어딘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타까움을 담아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화장실이 급하신가요? 아직 시작 안 했으니 갔다 오시는 게 어떤가요.”
“닥쳐.”
남자가 으르렁댔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는데,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왜 이러지?
으음.
알았다!
“여자가 체스를 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보네요?”
“너, 나 몰라?”
“저를 만나신 적 있나요? 제 기억엔 없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닐까요?”
“네가 며칠 전에 하늘로 날린 사람의 얼굴은 외워야 되지 않나?”
“아하.”
누군가 했더니 나무 거인에게 붙잡혀 하늘로 날아갔던 마법사구나.
용케 최후의 10명 안에 들었네. 실력이 제법 좋은가?
“저는 믿었어요. 당신이 반드시 저를 만나러 돌아올 거라고요.”
“내 이름이 뭔지는 아나?”
“한스 아닌가요?”
“리자른이다.”
“안녕하세요.”
리자른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반드시 나를 이기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는데, 딱 그때 타이밍 좋게 요정족이 등장했다.
“모두 모였군.”
요정족은 우리를 훑어보고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승자가 나올 때까지 알아서 승자를 가리도록.”
그 말을 끝으로 요정족은 적당한 곳에 앉았다. 사람들도 체스를 시작했다. 리자른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말을 뱉었다.
“내 목적은 하나다. 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잠깐 하늘 구경을 했다고 원한이 깊게 쌓였네요.”
“아르카나 체스? 차라리 잘 됐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이니 뭐니 하는 애매한 것보다, 이런 확실한 게 백배 낫지.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살면서 아르카나 체스에서 져본 적이 한 번도 없―.”
수십 분 후.
나는 멍하니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리자른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그래도 기념적인 하루네요. 처음 겪는 경험을 했잖아요?”
“……”
“수고하세요.”
망연자실한 리자른을 놔두고 나는 다음 상대를 찾았다.
방금의 처참한 결과를 목격해서 그런가. 참가자들이 움찔 떨며 내 시선을 피했다.
마치 당장 나를 피하면 방법이 생긴다고 믿는 거 같았는데,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빈자리에 앉아 다리를 꽜다.
그다음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천장에 연기를 흘리며 웃었다.
“뭐 해요. 모두 덤비세요.”
*
락토르는 굉장히 오래 산 요정족이었다.
약 1000년 전. 마왕이 세상을 박살 낼 때도 락토르는 살아 있었다.
뭐, 그때는 반신이라 불릴 만큼의 능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별개로 락토르는 기나긴 삶을 살았는데.
의외라고 해야 될까. 예상대로라고 해야 될까.
부동의 현자 락토르는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올라가라.”
나를 안내해 준 요정족은 짧게 말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후의 일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꺄르륵. 원소들이 웃는다. 정령들이 뛰노는 정원은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바람의 정령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논다. 장난기 넘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아쉽게도 이 세계의 정령은 생명체가 아니었다.
이 세계의 정령은 자연 발생하지도 않았고 살아 있지도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AI가 그나마 비슷할 거였다.
원소에 자아를 불어넣는 마법.
그게 이 세계의 정령술이었다.
아마 헤이즈도 정령술에서 영감을 받아 적영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헤이즈에게 물어봐야겠다.
하여간 이런 정령들은 총 두 가지 경로로 생겨났다.
하나. 정령 마법.
둘. 세계수.
그리고 이곳의 정령들은 세계수가 만든 정령들일 게 분명했다.
부동의 현자는, 딱히 마법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잠깐 걷자 곧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자 텅 빈 실내가 나를 맞이했다.
해피 중세랜드에서 벌써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다니. 과연 현자다. 남달랐다.
“루이나.”
낮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집주인의 등장에 나는 나무줄기로 의자를 만들며 앉았다.
“손님 대접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네요.”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내가 만들어준 의자에 앉는 상대를 살폈다.
잿빛 머리카락과 잿빛 눈동자가 인상 깊은 남자였다. 그 어딘가 고독해 보이는 색에 나는 상대의 삶을 짐작했다.
모든 걸 깨닫고, 모든 걸 깨달았기에 홀로 살아온 요정족.
부동의 현자 락토르.
드디어 만났다.
락토르는 무감정하게 나를 응시했다. 다만 초점이 어긋났다. 내가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이건 또 뭐야.
“어딜 보세요?”
“루이나. 마법을 익히는 건 즐겁나?”
“즐거워요.”
“켈튼에게 감사해라.”
“감사는 늘 하고 있는데, 별개로 그 의미심장한 말투는 뭔가요.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아는 현자의 말이라 그냥 넘기기 힘든데요.”
“켈튼은 대단한 마법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요정족. 묘하게 어딘가 엇나간 말을 한다.
대화하는 건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이런 녀석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락토르 님.”
“현자의 돌을 원해서 왔겠지? 주도록 하지.”
“와.”
진짜 현자는 현자네.
내가 뭘 할지 정확히 알아채고 회피기동을 하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한입 하는 게 어떤가요.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너는 술이 뭔지 다시 배우는 것이 좋겠군. 맛있는 술을 가져오랬지, 누가 불꽃쇼를 하라 했나?”
“하지만 락토르 님이 좋아하는 게 이거잖아요.”
“현자의 돌 제작법이다. 받아 가라.”
락토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직후 내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왔다.
나는 복잡한 현자의 돌 제작법을 헤아리다가, 재료의 목록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사조의 깃털, 하늘의 눈동자, 별의 씨앗, 세계수의 열매….
“하나 같이 얻기 까다로운 것만 있네요.”
“그러니 현자의 돌을 하나밖에 못 만들었지.”
특히.
이 재료를 구하는 게 가장 까다로웠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드래곤 하트 파편이라니, 이럴 거면 차라리 원본 드래곤 하트를 얻는 게 낫지 않나요?”
“원본보다 파편을 얻는 게 훨씬 쉽지. 거기에 원본을 얻는다 해도 그걸 인간이 사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어렵네요.”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락토르를 흘겼다.
분명 락토르가 주는 건 제작법뿐만이 아니었다.
제작법과 얻기 어려운 재료까지 하나 준다고 해 사람들이 몰린 거였으니까.
내 은근한 시선에 락토르는 이번엔 반대쪽 손을 들었다.
“보채지 않아도 줄 거다.”
“드디어 드래곤 하트 파편을―.”
“곧 세계수에 열매가 맺힌다. 가져가도록.”
“그쪽이었나요.”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자신 있게 ‘가장 얻기 어려운 재료는 내가 주겠다’라는 식으로 말해 드래곤 하트 파편이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세계수의 열매가 끝이야?
실망이 컸다.
“100년에 한 번 맺히는 열매다. 이런 걸 쉽게 구할 수 있을 거 같나.”
“알겠어요.”
일단 납득한 나는 적당히 물러났다. 세계수의 열매도 충분히 좋았으니까.
허나 어제부터 떠올랐던 의문을 억누르는 데엔 실패했다.
나는, 어제부터 떠올랐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저에게 현자의 돌을 주려는 이유가 뭔가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현자의 돌 제작법을 준다는 둥, 아르카나 체스 우승자를 가리라는 둥, 명백히 누구 한 명을 노리고 조건을 거는 중이었다.
내 말에 락토르는 자신의 무릎에 앉는 정령을 쓰다듬다가, 나직이 말했다.
“꼭 꿈을 이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