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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남자는 다리를 꼰 상태로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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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없이 합석한 만큼이나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잔향에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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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고위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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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실력자가 마력 갈무리를 못 할 리 없으니 이건 일부러 흘리는 거였다. 대화가 쉬워지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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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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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마법을 줄 수 있다니. 그게 정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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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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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남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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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법을 거래한다는 걸 숨긴 적이 없었다. 거기에 워낙 소문도 많이 퍼졌다. 따라서 저 남자가 마법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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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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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에게 고유 마법은 모든 것이었다. 죽기 직전이라 마지막 도박을 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 어떤 마법사도 차라리 죽이라며 고유 마법을 포기하지 않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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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백발의 남자는 고유 마법을 순순히 주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주는 조건도 ‘부탁을 조금 들어주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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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불량 의뢰인 거 같은데, 실제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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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는 눈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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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에는 제가 정보가 너무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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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지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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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명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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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마법사라면 지아블 파트르나라는 이름을 모르진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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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했더니 백탑주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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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그것은 한가지 목표에 이끌린 수많은 마법사들의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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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상아탑이자 지식의 정점인 황금 마탑은 ‘별의 운명을 튼다’라는 목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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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리안의 아이들이 마탑주를 맡은 청탑은 ‘인류에게 이로운 마법을 개발한다’라는 목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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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슬쩍 나랑 자꾸 엮이는 적탑은 ‘마법의 끝을 본다’라는 목표를 가졌는데, 그래서 백탑은 어떤 곳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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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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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비밀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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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딱 마법사들이 좋아할 법한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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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파악을 끝낸 나는 천천히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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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백탑주님의 고유 마법을 양도하겠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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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어차피 주더라도 네가 감당 못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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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해봐야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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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처럼 내가 7위계 고유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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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확인하게 한 번 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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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만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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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고유 마법을 주겠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요. 다른 사람의 고유 마법이라도 주겠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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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이해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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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아블의 인간관계를 몰랐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대략 알았지만,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관리하는지, 무슨 사람들과 연관됐는지, 누구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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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유 마법을 주겠다니, 무슨 삶을 살았길래 그런 게 가능한지 감도 안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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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이라도 했나? 아니면 큰 은혜를 베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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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죽기 직전의 고위 마법사가 휘하에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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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이고 지아블에게 충성하는 인간이라면, 확실히 고유 마법을 넘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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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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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블의 정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7위계 마법사가 한가하게 백탑주를 사칭하고 다니지는 않을 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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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아블의 진위는 의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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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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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랑 이런 거래를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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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을 끝낸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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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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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를 해줬으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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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무엇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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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지아블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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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왜 가리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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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도 조사해 달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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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돼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아블이 나직이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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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하늘에 신만 있으란 법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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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도 있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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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건 간단하네. 대침공의 원흉을 파헤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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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황제가 신화의 시대를 끝낸 뒤로도 인류에겐 여러 차례 위기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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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침공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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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성배가 완전히 소모됐을 정도의 위기인 만큼 아직도 사람들은 대침공의 후유증에서 못 벗어났는데, 이 대침공의 원흉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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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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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조사하는 거라면, 고유 마법을 대가로 지불하기엔 충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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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왕이자 마족의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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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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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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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고유 마법쯤은 지불하지 않으면 들어주기 싫은 부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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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은 초대 황제의 외신 퇴출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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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대를 끝내고 필멸자의 시대를 연 초대 황제 덕에 지금의 인류가 존재하는 거니까. 당연히 초대 황제의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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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것도 현재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이 아니라,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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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여느 때와 똑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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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농사를 짓고, 사냥꾼이 숲을 쏘다니고, 마법사가 비마법사를 불태우고, 기사는 피를 흘리는, 그런 평범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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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겠지만 사건은, 딱 이럴 때 발생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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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력 1325년 6월 12일.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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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절차로 지도자를 뽑던 한 국가가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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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느린 해피 중세랜드였지만, 그럼에도 멸망의 날 모두가 깨달았다. 대체 누가 이 세계를 망가트리려 하는지, 누가 자신들의 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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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잿더미로 하늘이 뒤덮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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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에게 인류의 적은 폐허가 된 왕국 꼭대기에서 포효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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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마왕과 인류의 첫대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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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인류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파괴만을 원했다. 애초에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드높은 격에 착각할 수 있지만, 녀석은 굳이 따지면 본능에 충실한 짐승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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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멸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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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 목적을 위해 마왕은 반년 만에 인류의 거점 절반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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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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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마법사 아델리안, 몽장(夢匠) 그레이스, 천검(千劍) 실버즈라, 현자 락토르, 잠룡 천백은 뭘 했길래 세상이 그대로 박살이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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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답은 심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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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현자 락토르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직접 만나서 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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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열한 사람 중 아델리안을 제외하면 인류의 위기가 발생해도 나설 초월자가 없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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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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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그들이 나섰어도, 못 막았을 가능성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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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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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의 한계가 사라진 초월자들의 세대교체가 발생한 건, 마왕이 앞선 초월자들을 전부 찢어 죽였던 덕이 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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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신들이 승천의 자격을 박탈당해 땅에 떨어졌다. 왕국은 불탔으며, 제국은 인류 최후의 방어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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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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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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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희망을 잃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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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절벽 끝에 몰렸을 때 피어오른 희망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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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섯 명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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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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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역대 지성체들은 뛰어난 소수에게 구원을 외주주며, 근근이 살아왔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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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이 나한테 돈 벌어오라고 시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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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제 시켰나요. 크리스 님이 멋대로 저를 팔아먹은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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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뻔뻔하게 헛소리를 하는 크리스를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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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즉시 바로잡지 않으면 곤란해졌다. 저런 헛소리를 방치하면, 이 금화의 정기를 빨아먹는 서큐버스가 어느새 슬금슬금 날 다 털어먹기 위해 달려들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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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 내가 아무리 돈을 좋아해도 동료를 털어먹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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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요. 저도 마법을 아무리 좋아해도, 동료의 마법은 절대 안 뺏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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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나를 빤히 응시한다. 나도 크리스를 빤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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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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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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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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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 유머 감각이 뛰어나네. 간만에 크게 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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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치료를 해줬어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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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나는 진짜 동료의 돈을 안 털어먹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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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도 진짜 동료의 마법을 안 털어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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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잔치다. 기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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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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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냄새가 코를 찌른다. 특유의 묵직한 공기가 피부를 때리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못 참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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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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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 왜 소심히 말해. 당당히 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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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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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중세랜드에서 ‘바다다’를 외치는 건 마치 범죄를 저지르는 느낌이라서. 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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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최남단. 바다와 맞닿은 네트라 왕국에 도착한 나는 가까운 여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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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뭐부터 해야 되는지는 진작에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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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생선구이와 벌꿀주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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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도 참 한결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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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님도 마음껏 주문하세요. 제가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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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야영지가 아니라 마을에서 듣는 거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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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 마음껏 음식을 주문한 크리스는 금세 나온 벌꿀주를 홀짝이며 내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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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루이나 님. 다른 사람은 놔두고 왜 나만 데려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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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일행은 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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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영과 크리스. 이렇게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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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규모 인원이 된 건 마왕의 흔적 조사라는 귀찮은 일에 남들을 데려오기가 살짝 미안해서였는데, 실제로 내 얘기를 들은 레온과 제리는 바쁘다며 마법학교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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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크리스도 바쁘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크리스만은 억지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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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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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님은 마왕 추적에 도움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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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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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는 유명한 마왕의 하수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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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납득을 한 걸까. 크리스는 얌전히 벌꿀주를 마시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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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 님 요즘 힘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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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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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턱을 괴며 창문 밖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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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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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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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조사를 마치고, 고유 마법이나 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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