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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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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처럼 생겼다면, 그건 그냥 사람이다.
이 마을의 다크엘프들은 모두 평범한 NPC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변명 뒤에 숨었다.
리즈멜이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NPC라는 편리한 방패를 내세운 것이다.
“나 좀, 가볼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웬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나이 차이가 수천 살은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르웬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에르웬은 지금쯤 리즈멜이 있을만한 장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마 살면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을 꼽으라면, 분명 오늘일 것이다.
전속력으로 뛰어 도착한 장소는, 다크엘프의 마을 외곽에 있는 쉼터 비스무레한 곳이었다.
쉼터에는 나무와 덩굴로 만든 그네며 시소 따위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것처럼 생겼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유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리즈멜은 쉼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리즈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멜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다크엘프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고, 반대로 다크엘프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심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사람이 아닌 NPC로 생각하기 위한 선.
내 이름을 알려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NPC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깡통으로 돌아갈 인형이니까.
“……”
리즈멜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리즈멜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리즈멜의 검술 훈련 퀘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처리가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리즈멜이 2층의 양치기 소녀처럼 깡통 인형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7층 진영 퀘스트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나, 엘리트 NPC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반반이다. 리즈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너, 뭐야……내가 더 찾지 말라고 했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에르웬이 말해 줬어, 아마 여기 있을 거라고.”
“이모님이? 엘레노어도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대……?”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리즈멜은 굉장히 착잡하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럼, 나는 왜 찾아왔는데. 나랑 볼일은 끝났잖아? 나는 인간족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매몰찬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나는 병신이다.
의지도 박약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욕과 변명뿐인 병신.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말을 골라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면 리즈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걸 잘못하고 살아와서, 잘못만 하고 살아온, 잘못뿐인 사람이라서.
올바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 같은 병신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한 발짝 나아가는 것.
레벨을 올리기 위해 고블린을 때려잡았듯이, 1층을 깨기 위해 노멀 클래스로 전직했듯이.
이런 나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것.
“미안해.”
그리고 리즈멜은 웃었다.
**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리즈멜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말을 섞을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리즈멜이 다크엘프란 점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다크엘프는 모두 인간을 귀여워한다. 내 미숙하고 어수룩한 사과에도 금방 마음을 풀어줄 만큼.
사람을 대하는 방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길은 무척 험난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음에 놓인 길은, 내 어설픈 걸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던 에르웬의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족은 이래서 싫어, 연약하고 일찍 죽는 주제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하기도 힘들잖아.”
“인간족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좀 유별난 거야.”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인간족을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라. 네가 얼마나 유별난 건지.”
나는 인간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리즈멜의 말을 듣고, 인간족이 보통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7층 세계의 인간족이 내가 아는 인간과 똑같다는 보장도 없고.
“그럼 보면 되잖아, 나이트 엘프는 원래 숲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엘레노어랑 어울리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네.”
“어울린 적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그렇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좀 만나봐.”
리즈멜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현 여왕이 내린 칙령 탓에 인간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없다고.
“나도 마음으로는 인간을 많이 만나보고 싶지만……아니, 그치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여왕은 하이엘프와 화친을 맺으려는 생각에 인간 진영을 멀리하고 있다던가.
엘프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혼의 순환장치, 세계수와 대수림에 짙은 미련이 있는 탓이라고 들었다.
“아, 이제 좀 알겠네.”
에르웬이 내가 엘레노어의 손님이라 맞출 수 있었던 이유. ‘그 애뿐이니까’ 라고 했었지?
공주인 엘레노어 정도가 아니면, 금기를 깨고 인간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엘레노어가 나를 데려온 건,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 파기를 위해서.
약혼이 무산되어 하이엘프와의 화친이 백지화되면, 인간족과의 교류 금지도 풀릴 테고.
엘레노어는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티내지 않고 있지만, 리즈멜을 비롯해 인간을 애호하는 다크엘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엘레노어의 계획에 협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나왔다.
그림자 인형을 늘어놓고 혼자 단련하고 있던 리즈멜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여기는 왜 왔어?”
“왜긴, 검술 배워야지.”
리즈멜과는 이미 화해를 마쳤다. 그러니 검술 훈련도 당연히 재개할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리즈멜은 내 물음을 듣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진짜였는데.”
퀘스트가 완료 처리된 것은 리즈멜이 생각을 바꿔서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가 모든 훈련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직 리즈멜이 어떻게 수정 거미의 광선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건 내가 터득한 감각 강화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좀 더 상위의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하지만……그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마법의 영역에 더 가까운 거라.”
“마법의 영역이라고?”
“응, 나는 검술 전문이라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냥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즉, 어제 일이랑은 별개로 리즈멜과의 검술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물론, 아예 훈련할 게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검술 외의 다른 무기술도 갖추고 있으니까, 리즈멜을 연습 상대 삼아서 단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럴 시간에 그냥 정찰대 일을 하면서 필드 몬스터 사냥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리즈멜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다.
나는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며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내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즈멜과 느긋하게 교류하며 효율 나쁜 단련을 할 생각은 없다.
“그걸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야지.”
“응? 엘레노어가 왜 나와?”
“마법의 영역이라고 했잖아.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는 최고거든.”
리즈멜은 ‘그 변태 같은 계집애랑 너무 어울리는 건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 엘프 여기사의 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그림자 마법은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인데다가, 내 클래스는 애초에 전사다 보니 대충 넘겼었는데.
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리즈멜과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말을 했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아하.”
이게 그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