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9 lines
10 KiB
Markdown
209 lines
10 KiB
Markdown
|
|
6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
|
|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처럼 생겼다면, 그건 그냥 사람이다.
|
|
|
|
이 마을의 다크엘프들은 모두 평범한 NPC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변명 뒤에 숨었다.
|
|
|
|
리즈멜이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NPC라는 편리한 방패를 내세운 것이다.
|
|
|
|
“나 좀, 가볼게.”
|
|
|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웬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
|
|
|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
|
|
|
나이 차이가 수천 살은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르웬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
|
|
|
에르웬은 지금쯤 리즈멜이 있을만한 장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
|
|
|
아마 살면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을 꼽으라면, 분명 오늘일 것이다.
|
|
|
|
전속력으로 뛰어 도착한 장소는, 다크엘프의 마을 외곽에 있는 쉼터 비스무레한 곳이었다.
|
|
|
|
쉼터에는 나무와 덩굴로 만든 그네며 시소 따위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것처럼 생겼다.
|
|
|
|
다른 장소들에 비해 유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리즈멜은 쉼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
|
|
|
“리즈멜.”
|
|
|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멜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
|
|
|
나는 다크엘프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고, 반대로 다크엘프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
|
|
|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심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 같다.
|
|
|
|
이들은 사람이 아닌 NPC로 생각하기 위한 선.
|
|
|
|
내 이름을 알려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
|
|
|
어차피 NPC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깡통으로 돌아갈 인형이니까.
|
|
|
|
“……”
|
|
|
|
리즈멜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리즈멜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
|
|
|
리즈멜의 검술 훈련 퀘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처리가 되었다.
|
|
|
|
그렇다는 것은, 리즈멜이 2층의 양치기 소녀처럼 깡통 인형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
|
|
|
7층 진영 퀘스트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나, 엘리트 NPC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
|
|
결국 반반이다. 리즈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
|
|
|
“너, 뭐야……내가 더 찾지 말라고 했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
|
|
|
“에르웬이 말해 줬어, 아마 여기 있을 거라고.”
|
|
|
|
“이모님이? 엘레노어도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대……?”
|
|
|
|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리즈멜은 굉장히 착잡하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
|
|
|
“그럼, 나는 왜 찾아왔는데. 나랑 볼일은 끝났잖아? 나는 인간족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
|
|
|
매몰찬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
|
|
|
나는 병신이다.
|
|
|
|
의지도 박약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욕과 변명뿐인 병신.
|
|
|
|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말을 골라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면 리즈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다.
|
|
|
|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
|
|
|
너무 많은 걸 잘못하고 살아와서, 잘못만 하고 살아온, 잘못뿐인 사람이라서.
|
|
|
|
올바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
|
|
|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 같은 병신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
|
|
|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한 발짝 나아가는 것.
|
|
|
|
레벨을 올리기 위해 고블린을 때려잡았듯이, 1층을 깨기 위해 노멀 클래스로 전직했듯이.
|
|
|
|
이런 나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것.
|
|
|
|
“미안해.”
|
|
|
|
그리고 리즈멜은 웃었다.
|
|
|
|
**
|
|
|
|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리즈멜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
|
|
|
말을 섞을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
|
|
그런 부분에서, 리즈멜이 다크엘프란 점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
|
|
|
다크엘프는 모두 인간을 귀여워한다. 내 미숙하고 어수룩한 사과에도 금방 마음을 풀어줄 만큼.
|
|
|
|
사람을 대하는 방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길은 무척 험난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넘어질 수 있다.
|
|
|
|
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음에 놓인 길은, 내 어설픈 걸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다.
|
|
|
|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던 에르웬의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
|
|
|
“인간족은 이래서 싫어, 연약하고 일찍 죽는 주제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하기도 힘들잖아.”
|
|
|
|
“인간족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좀 유별난 거야.”
|
|
|
|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인간족을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라. 네가 얼마나 유별난 건지.”
|
|
|
|
나는 인간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리즈멜의 말을 듣고, 인간족이 보통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
|
|
|
하지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
애초에 이 7층 세계의 인간족이 내가 아는 인간과 똑같다는 보장도 없고.
|
|
|
|
“그럼 보면 되잖아, 나이트 엘프는 원래 숲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
|
|
|
“엘레노어랑 어울리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네.”
|
|
|
|
“어울린 적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그렇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좀 만나봐.”
|
|
|
|
리즈멜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현 여왕이 내린 칙령 탓에 인간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없다고.
|
|
|
|
“나도 마음으로는 인간을 많이 만나보고 싶지만……아니, 그치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
|
|
|
그러고 보니, 여왕은 하이엘프와 화친을 맺으려는 생각에 인간 진영을 멀리하고 있다던가.
|
|
|
|
엘프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혼의 순환장치, 세계수와 대수림에 짙은 미련이 있는 탓이라고 들었다.
|
|
|
|
“아, 이제 좀 알겠네.”
|
|
|
|
에르웬이 내가 엘레노어의 손님이라 맞출 수 있었던 이유. ‘그 애뿐이니까’ 라고 했었지?
|
|
|
|
공주인 엘레노어 정도가 아니면, 금기를 깨고 인간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거다.
|
|
|
|
그리고 엘레노어가 나를 데려온 건,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 파기를 위해서.
|
|
|
|
약혼이 무산되어 하이엘프와의 화친이 백지화되면, 인간족과의 교류 금지도 풀릴 테고.
|
|
|
|
엘레노어는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
|
|
|
티내지 않고 있지만, 리즈멜을 비롯해 인간을 애호하는 다크엘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다.
|
|
|
|
“그럼, 내가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
|
|
|
엘레노어의 계획에 협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
|
|
|
**
|
|
|
|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나왔다.
|
|
|
|
그림자 인형을 늘어놓고 혼자 단련하고 있던 리즈멜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
|
|
|
“뭐야, 여기는 왜 왔어?”
|
|
|
|
“왜긴, 검술 배워야지.”
|
|
|
|
리즈멜과는 이미 화해를 마쳤다. 그러니 검술 훈련도 당연히 재개할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
|
|
|
리즈멜은 내 물음을 듣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
|
|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진짜였는데.”
|
|
|
|
퀘스트가 완료 처리된 것은 리즈멜이 생각을 바꿔서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가 모든 훈련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
|
|
|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직 리즈멜이 어떻게 수정 거미의 광선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
|
|
|
그건 내가 터득한 감각 강화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좀 더 상위의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
|
|
|
“그렇긴 하지만……그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마법의 영역에 더 가까운 거라.”
|
|
|
|
“마법의 영역이라고?”
|
|
|
|
“응, 나는 검술 전문이라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냥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
|
|
|
즉, 어제 일이랑은 별개로 리즈멜과의 검술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물론, 아예 훈련할 게 없는 건 아니다.
|
|
|
|
나는 검술 외의 다른 무기술도 갖추고 있으니까, 리즈멜을 연습 상대 삼아서 단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
|
|
|
그럴 시간에 그냥 정찰대 일을 하면서 필드 몬스터 사냥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
|
|
|
리즈멜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다.
|
|
|
|
나는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며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내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
|
|
|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즈멜과 느긋하게 교류하며 효율 나쁜 단련을 할 생각은 없다.
|
|
|
|
“그걸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야지.”
|
|
|
|
“응? 엘레노어가 왜 나와?”
|
|
|
|
“마법의 영역이라고 했잖아.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는 최고거든.”
|
|
|
|
리즈멜은 ‘그 변태 같은 계집애랑 너무 어울리는 건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
|
|
|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 엘프 여기사의 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
|
|
|
그림자 마법은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인데다가, 내 클래스는 애초에 전사다 보니 대충 넘겼었는데.
|
|
|
|
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리즈멜과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말을 했었다.
|
|
|
|
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
|
|
|
“아하.”
|
|
|
|
이게 그거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