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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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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흔들림이 왜 이렇게도 익숙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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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바라지만, 엘레노어는 삶을 바랐다. 내가 내던진 욕망을, 엘레노어는 하나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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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은 언제나 머나먼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입은 언제나 꿈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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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성별, 성격, 습관, 자아-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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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이토록 익숙하게, 나 같은 산송장을 닮아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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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플레이어 캐릭터, N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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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길게 생각하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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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살아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이제 와서 죽어도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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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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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은 분명 그대가 겪는 시련의 일부, 퀘스트의 마지막 적이겠지. 그렇다면 저걸 토벌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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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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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에 불과한 우리들의 생은 저것과 함께 끝난다. 다 내버리고, 나라도 살고 싶다고 바라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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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소리쳤다. 가슴께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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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아픔이었지만, 명칭을 모르기에 부를 수 없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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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저 아파하며, 가슴께를 누르고 마냥 인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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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알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대의 심상을 보았기에 알 수 있어.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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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그대는 우리가 살아있지 않음에 괴로워했어. 모종의 사랑이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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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포기하고, 나를 골라다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을거다. 그대가 결정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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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가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힘겹게 외면했던 선택지를 다시금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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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버렸던 욕망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행복을 찾을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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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달콤하게 와닿는 유혹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게, 열심히 피해 왔지만, 나는 분명 엘레노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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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탑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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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진 말이 머리를 쾅 후려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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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항상 죽음을 바라 왔어,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럴 수 없었지. 그렇다면 뻔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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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탑을 나가고,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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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버릴 수 없었던 욕망이 있지 않았나, 분명 이 자리에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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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둔통이 계속해서 일었던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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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괴롭히는 말뚝을 뽑아 버려라, 나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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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엘레노어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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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엘레노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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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 엘레노어를 고른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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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 함께 살면 분명 즐거울 것이다. 7층에서 그 잠시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이만한 망설임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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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일이 있어도 분명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겠지, 아무리 지쳐도 함께라면 분명 웃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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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엄마를 내버리는 길이다. 분명히 괴로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서진혁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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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래도, 그건 탑을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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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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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고민 끝에, 쓰레기 병신 서진혁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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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진 손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기 직전에, 멈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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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금, 일 센티미터. 하지만 이 병신새끼는 직전의 직전에 결국 고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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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다. 앰생 병신 방구석 개백수 쓰레기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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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고른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엇도 고르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남은 건 엘레노어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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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스스로 움직여 준다면, 엘레노어가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와 준다면, 그때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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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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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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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망설이는 내 손을 보고는, 쓰디쓴 표정으로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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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지막 망설임이 그대의 선택이겠지, 백이십 년 전에는 그 망설임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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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두 발자국 물러난다. 망설이는 나를 두고, 엘레노어는 포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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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놈이랑 살고 싶지는 않을 거다. 당연한 거고, 현명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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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 마라, 나도 그대와 다를 것 없었을 뿐이니까. 백 년을 더 살아오며, 그대를 닮아 버린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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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내가 병신이지. 네가, 내 어디를 닮았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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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약해서, 그대에게 힘든 결단을 강요했지 않나. 어머니와 나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내가 너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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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발자국 물러난 엘레노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표정은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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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의무가 있다. 이 왕관을 쓰면서 이어받은 의무가. 설령 영혼 없는 깡통일지라도……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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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망설여 준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내 백성들에게도, 그대에게도,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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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탑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그대까지 이 탑에 묶어버리려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은 입에 담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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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래, 우리는 정말로 닮았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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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멈춰 서지 않기로 했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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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으로서 그것과 똑같은 맹세를 가슴에 박아넣은 엘레노어의 마력이, 나와 같은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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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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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고민 끝에, 똑같은 결정으로- 결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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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가 펜던트를 이용한 템빨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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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마음에 영향받아 흔들리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마력강화 따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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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지워 없앤 엘레노어는 다시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뱀용 토벌을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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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결단에 응해야만 한다. 마음에 휘둘려 싸우기를 망설이지 말자.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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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 레이드 재개까지 : 0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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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재활동 대기 시간까지 앞으로 6분, 병기의 배치와 여타의 준비들은 모두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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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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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치되어 있던 마포 부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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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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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단계에 걸친 버프를 몰아받고, 활동 재개까지 5분이 남은 뱀용을 향해 마력의 탄환과 발리스타가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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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는 꼭 카운트다운이 끝나야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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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몹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를 선제타격하는 것으로, 원하는 타이밍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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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만한 포격 수단이 있으면, 강력한 공격을 첫발에 꽂아넣고 시작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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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5분을 남긴 시점에 최대한의 화력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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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과광! 쿠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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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히 쏘아진 무기가 뱀용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타한다. 잠에서 깨어난 뱀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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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화력은 확보하고 볼 일인가. 상상 이상으로 위력도 효과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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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은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다. 인벤토리에 준비한 물건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마법진 위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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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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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를 담당한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마법의 가동과 함께 나는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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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으로 전이된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하이엘프 정예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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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국군의 정예 병력과 최고 전력인 군단장, 다크엘프 정찰대의 에이스들과 엘레노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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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뱀용의 급소를 직접 공격하는 특공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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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대로 몸부림치는 뱀용의 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이 잘 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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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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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의 격류와 함께 커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진영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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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그림자 마법은 직접 전투보다는 속박 같은 보조 계열에 치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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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그쪽 계열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굉장한 성능이 나온다. 이 점 역시 커뮤니티에서 검증해 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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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전자들이 발로 뛰어, 그림자 계열 마법중 가장 속박 판정이 좋은 스킬을 찾아내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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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알아낸 스킬을 전파해, 마법사들이 재해석해 대규모 술식으로 쌓아올릴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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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단기간에 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법석 같은 재료를 미친듯이 갈아넣는 것으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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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 재료는 내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인 단 한번뿐인 속박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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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를 상대로도 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게도 잘 된 모양이다. 이제 착지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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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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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여버린 뱀용이 소리지른다. 포효 자체에 실린 마력이 퍼져나가며 주변 지형을 으스러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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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있는 정예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엘리트급, 강자 중의 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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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딩! 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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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전신에서 쏘아지는 검은 마력탄을 각자의 방식으로 쳐내고, 놈의 몸에 착지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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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허울 뿐인 존재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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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선택이었는지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던 내가 가장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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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 선택을 지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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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하고 꼴사나운 병신새끼지만, 그런 나이기에 잘 하게 된 일이 하나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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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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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멈추지 않는 것,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적을 찢어 죽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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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결별하고 탑을 올라갈 것을 맹세했으니,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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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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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뱀용의 두꺼운 비늘에 검을 꽂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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