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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닮은꼴
엘레노어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흔들림이 왜 이렇게도 익숙한지.
나는 죽음을 바라지만, 엘레노어는 삶을 바랐다. 내가 내던진 욕망을, 엘레노어는 하나도 놓지 않았다.
두 눈은 언제나 머나먼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입은 언제나 꿈을 말했다.
종족, 성별, 성격, 습관, 자아-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 반대.
그랬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이토록 익숙하게, 나 같은 산송장을 닮아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논 플레이어 캐릭터, NPC.
무엇을 길게 생각하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내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살아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이제 와서 죽어도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엘레노어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뱀은 분명 그대가 겪는 시련의 일부, 퀘스트의 마지막 적이겠지. 그렇다면 저걸 토벌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깡통에 불과한 우리들의 생은 저것과 함께 끝난다. 다 내버리고, 나라도 살고 싶다고 바라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가!”
엘레노어가 소리쳤다. 가슴께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었다.
알고 있는 아픔이었지만, 명칭을 모르기에 부를 수 없는 아픔이다.
다만 그저 아파하며, 가슴께를 누르고 마냥 인내할 뿐.
“나는……알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대의 심상을 보았기에 알 수 있어.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그대는 우리가 살아있지 않음에 괴로워했어. 모종의 사랑이 있었을 거다.”
“퀘스트를 포기하고, 나를 골라다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을거다. 그대가 결정하면 돼.”
엘레노어는 내가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힘겹게 외면했던 선택지를 다시금 들이밀었다.
내가 내버렸던 욕망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행복을 찾을 기회.
이렇게나 달콤하게 와닿는 유혹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게, 열심히 피해 왔지만, 나는 분명 엘레노어를-
“그대, 탑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지?”
- 이어진 말이 머리를 쾅 후려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대는 항상 죽음을 바라 왔어,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럴 수 없었지. 그렇다면 뻔하지 않나.”
“그대는 탑을 나가고,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생각이야.”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버릴 수 없었던 욕망이 있지 않았나, 분명 이 자리에 있을 거다.”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둔통이 계속해서 일었던 자리를.
“그대를 괴롭히는 말뚝을 뽑아 버려라, 나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끝내 엘레노어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대로 엘레노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걸로 끝이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 엘레노어를 고른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엘레노어와 함께 살면 분명 즐거울 것이다. 7층에서 그 잠시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이만한 망설임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분명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겠지, 아무리 지쳐도 함께라면 분명 웃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엄마를 내버리는 길이다. 분명히 괴로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서진혁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건 탑을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긴 고민 끝에, 쓰레기 병신 서진혁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손을 뻗었다.
**
뻗어진 손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기 직전에, 멈칫하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 일 센티미터. 하지만 이 병신새끼는 직전의 직전에 결국 고르지 못했다.
이게 나다. 앰생 병신 방구석 개백수 쓰레기 서진혁.
고민 끝에 고른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엇도 고르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남은 건 엘레노어의 선택이다.
엘레노어가 스스로 움직여 준다면, 엘레노어가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와 준다면, 그때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망설이는 내 손을 보고는, 쓰디쓴 표정으로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마지막 망설임이 그대의 선택이겠지, 백이십 년 전에는 그 망설임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그렇게 말하며 두 발자국 물러난다. 망설이는 나를 두고, 엘레노어는 포기를 택했다.
그렇겠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놈이랑 살고 싶지는 않을 거다. 당연한 거고, 현명한 거야.
“오해하지 마라, 나도 그대와 다를 것 없었을 뿐이니까. 백 년을 더 살아오며, 그대를 닮아 버린 모양이야.”
“아니야, 내가 병신이지. 네가, 내 어디를 닮았다는 건데.”
“내가 나약해서, 그대에게 힘든 결단을 강요했지 않나. 어머니와 나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내가 너무했지.”
세 발자국 물러난 엘레노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표정은 정직하다.
“내게도 의무가 있다. 이 왕관을 쓰면서 이어받은 의무가. 설령 영혼 없는 깡통일지라도……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 해.”
“그대가 망설여 준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내 백성들에게도, 그대에게도,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어.”
“내가 탑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그대까지 이 탑에 묶어버리려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은 입에 담고 말았어.”
엘레노어는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래, 우리는 정말로 닮았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으니.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멈춰 서지 않기로 했던 맹세.
여왕으로서 그것과 똑같은 맹세를 가슴에 박아넣은 엘레노어의 마력이, 나와 같은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는……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해.”
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고민 끝에, 똑같은 결정으로- 결별을 택했다.
**
내 마력강화가 펜던트를 이용한 템빨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마력은 마음에 영향받아 흔들리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마력강화 따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눈물을 지워 없앤 엘레노어는 다시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뱀용 토벌을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도 그 결단에 응해야만 한다. 마음에 휘둘려 싸우기를 망설이지 말자.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월드 보스 레이드 재개까지 : 00‘06’24]
뱀용의 재활동 대기 시간까지 앞으로 6분, 병기의 배치와 여타의 준비들은 모두 완료되었다.
-뿌우우우우!
작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치되어 있던 마포 부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쏴라!”
몇 단계에 걸친 버프를 몰아받고, 활동 재개까지 5분이 남은 뱀용을 향해 마력의 탄환과 발리스타가 쏘아졌다.
레이드는 꼭 카운트다운이 끝나야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잡몹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를 선제타격하는 것으로, 원하는 타이밍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만한 포격 수단이 있으면, 강력한 공격을 첫발에 꽂아넣고 시작할 수 있으니.
반드시 5분을 남긴 시점에 최대한의 화력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받은 바 있다.
-쾅! 콰과광! 쿠과광!
일제히 쏘아진 무기가 뱀용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타한다. 잠에서 깨어난 뱀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역시 화력은 확보하고 볼 일인가. 상상 이상으로 위력도 효과도 훌륭하다.
이 다음은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다. 인벤토리에 준비한 물건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마법진 위로 올랐다.
“무운을.”
전이를 담당한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마법의 가동과 함께 나는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공중으로 전이된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하이엘프 정예 기사들.
그리고 왕국군의 정예 병력과 최고 전력인 군단장, 다크엘프 정찰대의 에이스들과 엘레노어까지.
우리는 뱀용의 급소를 직접 공격하는 특공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몸부림치는 뱀용의 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이 잘 되어야 할 텐데.
-키리리링!
그 때,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의 격류와 함께 커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진영의 마법이다.
다크엘프의 그림자 마법은 직접 전투보다는 속박 같은 보조 계열에 치중되어 있다.
그런 만큼, 그쪽 계열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굉장한 성능이 나온다. 이 점 역시 커뮤니티에서 검증해 준 내용.
여러 도전자들이 발로 뛰어, 그림자 계열 마법중 가장 속박 판정이 좋은 스킬을 찾아내 주었고.
나는 그렇게 알아낸 스킬을 전파해, 마법사들이 재해석해 대규모 술식으로 쌓아올릴 수 있도록 했다.
원래는 단기간에 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법석 같은 재료를 미친듯이 갈아넣는 것으로 해결.
당연히 그 재료는 내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인 단 한번뿐인 속박 마법.
월드 보스를 상대로도 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게도 잘 된 모양이다. 이제 착지만 하면 된다.
-그아아아아아아!!
사슬에 묶여버린 뱀용이 소리지른다. 포효 자체에 실린 마력이 퍼져나가며 주변 지형을 으스러트린다.
하지만 여기 있는 정예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엘리트급, 강자 중의 강자들.
-티딩! 팅!
뱀용의 전신에서 쏘아지는 검은 마력탄을 각자의 방식으로 쳐내고, 놈의 몸에 착지해 내려앉았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허울 뿐인 존재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선택이었는지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던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 선택을 지지하겠다.
우유부단하고 꼴사나운 병신새끼지만, 그런 나이기에 잘 하게 된 일이 하나는 있으니까.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적을 찢어 죽이는 것.
너와 결별하고 탑을 올라갈 것을 맹세했으니,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겠어.
-쿠르릉!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뱀용의 두꺼운 비늘에 검을 꽂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