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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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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의 연합과 레이드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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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병사들과 하이엘프들은 서로에게 어마어마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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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삼킬 기세를 내뿜고 있는 뱀용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잡졸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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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날 세우며 대립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저 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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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개인의 감정 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분열하는 꼴은 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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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월드 보스의 활동 재개까지 앞으로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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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화된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에 다수 진지가 깔렸다. 진지에는 각각의 무기가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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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던 강화재료와 골드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최대치까지 강화한 마포가 팔십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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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비전 마법으로 구축한 간이 마력포대가 이십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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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전쟁용 병기인 발리스타가 오십여 개. 이 모든 무기에 하나하나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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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모든 병력에 내 인벤토리에 남아돌던 장비와 무기를 최대치로 강화해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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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추가로 제작해 준 무구들도 적재적소의 인원에게 배부되어, 전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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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모든 무기에도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부여, 그 밖에도 소모성 포션을 개인별로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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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나는 거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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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원도, 작정하고 군대를 무장시키니 어느덧 밑천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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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번 전투를 위한 포션과 스위칭용 장비 두어 세트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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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로, 가진 모든 자원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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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야, 이제야 좀 쉬겠구나. 두 번 하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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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그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대었던 에르웬이 앓는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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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쉬어, 이기든 지든 다음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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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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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싸우기로 한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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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에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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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혼자 성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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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오래된 주술이나 비전 마법 같은 것을 서고에서 찾아내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거나 하기도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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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솔력을 발휘해서 레이드 준비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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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이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움직이고 있는 엘레노어는 정말로 여왕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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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엘레노어다운 모습은 도통 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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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더구나, 마침 전투 준비도 끝나갈 때구나. 만나러 가 보지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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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피던 에르웬이 제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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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가 실패하건 성공하건, 아마 엘레노어와는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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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으로 들어오자, 그늘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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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흐린 눈으로 그러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내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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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됐나 해서, 잠깐 보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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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모르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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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시피 만전이다, 누가 상대라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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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검과 지팡이를 챙기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말 그대로 완전 무장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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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보물을 모조리 꺼내왔다던데,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찮게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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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묘하게, 마력에서 격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기색이 명상할 때 느끼는 내 마력의 떨림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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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뭘 따로 준비한다던 게 그거야?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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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보물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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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수가 별의 지맥을 빨아먹는 초거대 기생식물인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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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게 다는 아니다. 조금……옛 문헌을 뒤져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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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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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읽어보니, 새삼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았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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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정체를 알고 다시 읽으니, 옛 선조가 남겨두었던 기록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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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들을 토대로 세계수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연구하니, 새로운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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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게 웃으며 레이드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는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잃은 채였으나- 뭔가 미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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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엘레노어는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정색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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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외로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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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엘레노어는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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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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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던 두 눈에서 다시금 약한 별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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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가던 엘레노어의 별빛, 들여다본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꿈 꾸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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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의 목적은 세계수를 삼키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연료 삼아 다른 별로 떠나는 것이다. 꼭 멸망이 목적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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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밝게 빛나며,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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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지, 아마 저것은 세계의 9할을 파괴하겠지만- 남은 1할의 땅에서 살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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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내 최고의 특기야. 별의 반대편까지 날아가면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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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함께 그곳에서 사는 거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짓고……아아, 불편한 점은 물론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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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그런 걸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니까. 마법이 있으니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다. 자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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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대는 인간족이니까, 엘프와는 다른 시간을 걷겠지. 앞으로 길어봤자 백 년밖에 못 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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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찮다. 별의 지맥이 메마르고, 세계수도 떠난 세계에선 아무리 엘프라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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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대보다 몇백 년을 더 살겠지만, 그대와 함께한 백 년을 곱씹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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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설령 그대가 떠나더라도- 하프엘프는 오래 사는 편이니까. 백 년 안에 아이를 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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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기까지 듣고, 손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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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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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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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왕이었다.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적어도 이 9층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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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백 년 전에 그렇게 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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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쩌고, 저 뱀을 내버려두면 다 죽을 거 아니야. 네 백성들은 어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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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한 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러 더 침착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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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백성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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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어진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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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그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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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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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엘레노어의 목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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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엘레노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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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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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놈이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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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엘레노어는 웃었다. 목에 칼이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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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나는 엘레노어가 아니지. 저기 있는 엘프들도 내 백성이 아니고, 이 성도 내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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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이 웃어젖히는 엘레노어의 눈빛에서 다시금 별빛이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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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깡통 인형 따위가, 어떻게 내 백성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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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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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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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는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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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의 침묵, 엘레노어는 내 검 끝을 손으로 치워내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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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은…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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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통해 그대의 기억과 심상 너머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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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살아온 세계와, 시련의 탑이라는 모형의 세계를 보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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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자, 나와 함께 자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 가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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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들어오기 전의 그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고 귀기가 들려 날뛰던 그대의 모습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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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마치자 인형처럼 변해서- 그대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줬던 우리의 모습도, 모두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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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았지. 돌이켜 보니, 모두 허상처럼 흐릿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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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와 함께 자던 매일, 드물게 꾸었던 인형이 나오는 괴상망측한 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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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유를 갈망하고, 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건만- 나는 노예였고,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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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별빛은, 그녀가 물려받은 나이트 엘프의 본능에서 비롯한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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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숲의 바깥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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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라는 타고난 신분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마음의 불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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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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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부를 잃어버린 엘레노어의 마른 눈은, 나와 무척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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