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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레노어
삼대 세력의 연합과 레이드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군 병사들과 하이엘프들은 서로에게 어마어마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세계를 삼킬 기세를 내뿜고 있는 뱀용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잡졸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이다.
서로 날 세우며 대립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저 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을.
물론 개개인의 감정 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분열하는 꼴은 나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월드 보스의 활동 재개까지 앞으로 한 시간.
요새화된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에 다수 진지가 깔렸다. 진지에는 각각의 무기가 배치되었다.
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던 강화재료와 골드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최대치까지 강화한 마포가 팔십여 문.
하이엘프의 비전 마법으로 구축한 간이 마력포대가 이십여 문.
다크엘프의 전쟁용 병기인 발리스타가 오십여 개. 이 모든 무기에 하나하나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걸어두었다.
거기에 모든 병력에 내 인벤토리에 남아돌던 장비와 무기를 최대치로 강화해 지급했다.
에르웬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추가로 제작해 준 무구들도 적재적소의 인원에게 배부되어, 전력을 키웠다.
당연히 이 모든 무기에도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부여, 그 밖에도 소모성 포션을 개인별로 지급했다.
이걸로 나는 거지가 됐다.
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원도, 작정하고 군대를 무장시키니 어느덧 밑천을 보였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번 전투를 위한 포션과 스위칭용 장비 두어 세트가 전부.
어차피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로, 가진 모든 자원을 투자했다.
“어이구야, 이제야 좀 쉬겠구나. 두 번 하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그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대었던 에르웬이 앓는 소리를 했다.
“이제 쉬어, 이기든 지든 다음은 없을 거야.”
“그것도 그렇겠구나.”
“엘레노어는, 싸우기로 한 거 맞지?”
내 물음에 에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성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다크엘프의 오래된 주술이나 비전 마법 같은 것을 서고에서 찾아내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거나 하기도 했었고.
통솔력을 발휘해서 레이드 준비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었다.
나는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이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움직이고 있는 엘레노어는 정말로 여왕다웠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엘레노어다운 모습은 도통 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린 기분.
“그렇다더구나, 마침 전투 준비도 끝나갈 때구나. 만나러 가 보지 그러느냐?”
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피던 에르웬이 제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가 실패하건 성공하건, 아마 엘레노어와는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
왕성으로 들어오자, 그늘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흐린 눈으로 그러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내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나 해서, 잠깐 보러 왔어.”
나는 왠지 모르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시피 만전이다, 누가 상대라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엘레노어는 검과 지팡이를 챙기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말 그대로 완전 무장 상태였다.
다크엘프의 보물을 모조리 꺼내왔다던데,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찮게 강렬했다.
다만 묘하게, 마력에서 격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기색이 명상할 때 느끼는 내 마력의 떨림과 비슷했다.
“혼자 뭘 따로 준비한다던 게 그거야?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는데?”
“물론이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보물인걸.”
그 세계수가 별의 지맥을 빨아먹는 초거대 기생식물인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실, 이게 다는 아니다. 조금……옛 문헌을 뒤져보고 있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새삼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았지 뭐냐?”
세계수의 정체를 알고 다시 읽으니, 옛 선조가 남겨두었던 기록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그 부분들을 토대로 세계수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연구하니, 새로운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옅게 웃으며 레이드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는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잃은 채였으나- 뭔가 미묘하게.
그 때였다, 엘레노어는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의외로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마력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엘레노어는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대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흐릿하던 두 눈에서 다시금 약한 별빛이 반짝였다.
**
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가던 엘레노어의 별빛, 들여다본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꿈 꾸는 눈.
“저 뱀의 목적은 세계수를 삼키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연료 삼아 다른 별로 떠나는 것이다. 꼭 멸망이 목적은 아니야.”
그것이 밝게 빛나며,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지, 아마 저것은 세계의 9할을 파괴하겠지만- 남은 1할의 땅에서 살 준비를.”
“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내 최고의 특기야. 별의 반대편까지 날아가면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거다.”
“둘이서 함께 그곳에서 사는 거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짓고……아아, 불편한 점은 물론 많겠지.”
“하지만 뭐, 그런 걸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니까. 마법이 있으니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다. 자신 있어.”
“물론 그대는 인간족이니까, 엘프와는 다른 시간을 걷겠지. 앞으로 길어봤자 백 년밖에 못 살 테고.”
“하지만 괜찮다. 별의 지맥이 메마르고, 세계수도 떠난 세계에선 아무리 엘프라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물론 그대보다 몇백 년을 더 살겠지만, 그대와 함께한 백 년을 곱씹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설령 그대가 떠나더라도- 하프엘프는 오래 사는 편이니까. 백 년 안에 아이를 밴다면-”
나는 거기까지 듣고, 손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엘레노어는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왕이었다.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적어도 이 9층에서는.
싸움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백 년 전에 그렇게 했을 거다.
“여기는 어쩌고, 저 뱀을 내버려두면 다 죽을 거 아니야. 네 백성들은 어쩌게.”
나는 가능한 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러 더 침착하게 말했다.
“아, 백성 말이냐.”
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어진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그딴 거.”
그건,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
판단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엘레노어의 목을 겨누었다.
“너, 엘레노어 아니지.”
“아아, 물론이지.”
“뭐 하는 놈이야, 너.”
그러자, 엘레노어는 웃었다. 목에 칼이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아무렴, 나는 엘레노어가 아니지. 저기 있는 엘프들도 내 백성이 아니고, 이 성도 내 것이 아니야.”
미친듯이 웃어젖히는 엘레노어의 눈빛에서 다시금 별빛이 사그라졌다.
“영혼 없는 깡통 인형 따위가, 어떻게 내 백성이겠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뭐?”
나는 더는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엘레노어는 내 검 끝을 손으로 치워내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은…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어.”
“나는 꿈을 통해 그대의 기억과 심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대가 살아온 세계와, 시련의 탑이라는 모형의 세계를 보고 말았지.”
그 말을 듣자, 나와 함께 자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 가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탑에 들어오기 전의 그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고 귀기가 들려 날뛰던 그대의 모습도 보았다.”
“퀘스트를 마치자 인형처럼 변해서- 그대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줬던 우리의 모습도, 모두 보았어.”
“그러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았지. 돌이켜 보니, 모두 허상처럼 흐릿한 기억이다.”
그리고 엘레노어와 함께 자던 매일, 드물게 꾸었던 인형이 나오는 괴상망측한 꿈도.
“평생 자유를 갈망하고, 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건만- 나는 노예였고, 인형이었다.”
엘레노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별빛은, 그녀가 물려받은 나이트 엘프의 본능에서 비롯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숲의 바깥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었으며.
공주라는 타고난 신분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마음의 불꽃이기도 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 전부를 잃어버린 엘레노어의 마른 눈은, 나와 무척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