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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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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엘레노어는 생각보다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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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때도 없이 추행을 시도하고, 동침하자며 몸을 들이밀긴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결국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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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정말로 손만 잡고 자자고 약속한 이상, 이상한 짓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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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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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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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확신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엘레노어가 개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힘으로 막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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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제의 자체도 불면증을 해결해 보고자 한 것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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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이런 걱정을 할 때는 아니다. 잠은 밤에 자는 거고, 지금은 아직 한창 낮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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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엘레노어에게 삼대 세력이 얽힌 전쟁의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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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백 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한 인간족 왕국군이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엘프에게 선전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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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엘프가 자리 잡은 대수림이 인간족 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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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간 실효지배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엘프를 몰아내고 숲을 차지할 생각이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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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하이엘프의 대산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크엘프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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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국군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를 싸잡아 자신들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이종족 세력으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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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와 하이엘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치겠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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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리상 먼저 공격받는 것은 당연히 다크엘프, 상황을 보면 엘프끼리 연합해서 왕국군을 막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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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혐성 개씹좆프 새끼들은 연합은 커녕, 뜬금없이 다크엘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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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만 영문도 모른 채, 선전포고 없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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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분은 우리 쪽에서 먼저 주었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 전쟁은 그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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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거라면 엘레노어가 이렇게까지 닳아빠지진 않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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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숲쟁이 놈들의 선전포고는 조금……이상한 점이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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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백 년간의 전쟁이니 이래저래 엉킨 지점이 많으리라. 이 정도면 원래의 명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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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엘프라면 모를까 인간 왕국이 백 년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부터 평범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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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두 쪽에서 다굴하는 형태가 아니라, 셋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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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싸우러 갈 생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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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내 생각을 바로 눈치채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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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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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왕국군은 백 년간의 발전이 쌓인 덕택에 7층, 8층 이상으로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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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엘레노어나 메르세데스 급으로 강한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균형이 안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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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성장 수준은 충분하기에, 꼭 그 전력과 맞서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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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지만, 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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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밴 피 냄새를 좋아하던 엘레노어도, 백 년이 지나니 이런 소리를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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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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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백 년간 이어졌을지라도, 전투가 백 년간 이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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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새 외에도 다크엘프의 영역은 더 있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국지전 같은 게 드문드문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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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적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거니까, 뭐가 됐든 이쪽으로 온다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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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들을 한 발 먼저 발견해서 받아치는 것. 나도 그 역할을 함께 맡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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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안개에 방해받지 않는 구역까지 나오자 곧바로 적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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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구성 인원이 어쩐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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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거,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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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인지 몬스터인지, 하여튼 사람은 아닌 것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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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따져보자면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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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에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데, 아무래도 특수한 방식으로 조종하거나 사역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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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백 년 동안 전쟁을 이어오려면 인적 자원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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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잡아다가 사역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기까지 아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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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얼마나 되려나……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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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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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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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감지가 차단되었다. 동시에 몬스터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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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에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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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를 차단하는 모종의 수단을 마련해 둔 건가. 기습 공격은 글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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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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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의 마법사가 정체불명의 주문 같은 것을 외치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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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를 인지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거겠지. 좋아, 어디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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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방패를 장착하고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 부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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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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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발길질해 선두에 선 몬스터를 멀리 걷어차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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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간 몬스터는 그대로 나무에 여러 번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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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 몬스터를 날려버렸는데,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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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상황 인식을 못 했거나, 인식했지만 몬스터를 멈추지 못하거나, 뭐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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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라길래 뭔가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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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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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며, 방패로 밀쳐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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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대일의 싸움, 받아치기보다는 이렇게 파고들어 섬멸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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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레벨이 통 오르지 않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잔뜩 사냥해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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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이번에도 안 올랐다. 역시 층수보다 레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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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부대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한동안 레벨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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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은 잘 안 되고 있어도, 개인적인 단련으로도 조금씩 스펙을 올리고 있으니까 큰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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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요새로 돌아와 엘레노어와의 동침 준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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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잘 준비를 했다. 일단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으니 목욕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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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상황이지만 다크엘프의 욕탕은 여전히 훌륭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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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탕이 전체적으로 커진데다가, 탕에 약초 같은 걸 풀어놓은 탓인지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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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크엘프의 혼욕 문화도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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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알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다가와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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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마침내 성 안의 침실에서 엘레노어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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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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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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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저런 네글리제 차림만 아니었어도 별로 거리낄 건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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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대도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라. 내 침대는 무척 편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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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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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겁먹지 말고, 정말로 손만 잡고 잘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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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결국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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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 잡고 잔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어는 눕자마자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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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밤중에 습격이라도 일어나면 곧장 일어나야 한다, 남녀사이의 일을 치를 시간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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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전시 상황에 군주가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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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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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손짓하자 방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도 순순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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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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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명상이라도 하며 마력을 굴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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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딱 손만 잡고 내 옆에 누운 엘레노어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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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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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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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정말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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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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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백 년밖에 못 사는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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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는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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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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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나도 말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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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엘레노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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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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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라는 사실을 떠나서, 이게 과연 엘레노어에게 말해도 좋은 일인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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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정 자체는 이미 8층을 떠나오며, 자아를 잃은 엘레노어에게 한 번 토해내듯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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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보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딱히 편해지는 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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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자아가 있는 엘레노어에게 말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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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이트 엘프의 습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엘레노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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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자유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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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엘레노어에게, 너는 탑의 시스템에 종속된 NPC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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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액, 쌔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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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붙잡은 손과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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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명상은 완전히 깨졌고,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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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로 몇 년 만에- 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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