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
rupy1014 f66fe445bf Initial commit: Novel Agent setup
-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1 KiB

  1. 동침

사실 엘레노어는 생각보다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시도때도 없이 추행을 시도하고, 동침하자며 몸을 들이밀긴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결국 포기한다.

그러니 정말로 손만 잡고 자자고 약속한 이상, 이상한 짓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아닌가?

솔직히 확신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엘레노어가 개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힘으로 막으면 된다.

동침 제의 자체도 불면증을 해결해 보고자 한 것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아직 이런 걱정을 할 때는 아니다. 잠은 밤에 자는 거고, 지금은 아직 한창 낮이니까.

이후에는 엘레노어에게 삼대 세력이 얽힌 전쟁의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우선, 백 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한 인간족 왕국군이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엘프에게 선전포고했다.

듣기로는 엘프가 자리 잡은 대수림이 인간족 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나.

다만 그간 실효지배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엘프를 몰아내고 숲을 차지할 생각이라는 것 같다.

문제는 하이엘프의 대산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크엘프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왕국군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를 싸잡아 자신들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이종족 세력으로 칭했다.

다크엘프와 하이엘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리상 먼저 공격받는 것은 당연히 다크엘프, 상황을 보면 엘프끼리 연합해서 왕국군을 막아야 할 테지만.

이 미친 혐성 개씹좆프 새끼들은 연합은 커녕, 뜬금없이 다크엘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다크엘프만 영문도 모른 채, 선전포고 없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물론 명분은 우리 쪽에서 먼저 주었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 전쟁은 그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그렇겠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거라면 엘레노어가 이렇게까지 닳아빠지진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래도 숲쟁이 놈들의 선전포고는 조금……이상한 점이 많았지.”

뭐, 백 년간의 전쟁이니 이래저래 엉킨 지점이 많으리라. 이 정도면 원래의 명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솔직히, 엘프라면 모를까 인간 왕국이 백 년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부터 평범하진 않다.

다크엘프 진영을 두 쪽에서 다굴하는 형태가 아니라, 셋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그대……싸우러 갈 생각이구나?”

엘레노어가 내 생각을 바로 눈치채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9층의 왕국군은 백 년간의 발전이 쌓인 덕택에 7층, 8층 이상으로 강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엘레노어나 메르세데스 급으로 강한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균형이 안 맞으니까.

이미 성장 수준은 충분하기에, 꼭 그 전력과 맞서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지만, 죽지 마라.”

내 몸에 밴 피 냄새를 좋아하던 엘레노어도, 백 년이 지나니 이런 소리를 다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

전쟁은 백 년간 이어졌을지라도, 전투가 백 년간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요새 외에도 다크엘프의 영역은 더 있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국지전 같은 게 드문드문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물론 적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거니까, 뭐가 됐든 이쪽으로 온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들을 한 발 먼저 발견해서 받아치는 것. 나도 그 역할을 함께 맡기로 했다.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안개에 방해받지 않는 구역까지 나오자 곧바로 적들이 보였다.

깃발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구성 인원이 어쩐지 이상했다.

“뭐야 저거, 좀비?”

언데드인지 몬스터인지, 하여튼 사람은 아닌 것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니, 따져보자면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적진에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데, 아무래도 특수한 방식으로 조종하거나 사역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백 년 동안 전쟁을 이어오려면 인적 자원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했겠지.

몬스터를 잡아다가 사역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기까지 아낄 수 있을 거다.

“마법사는 얼마나 되려나……어디.”

나는 일단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시도했다.

-키잉!

그런데, 웬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감지가 차단되었다. 동시에 몬스터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그에에으엑!

감지를 차단하는 모종의 수단을 마련해 둔 건가. 기습 공격은 글렀네.

“■■■■, ■■■!”

왕국군의 마법사가 정체불명의 주문 같은 것을 외치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존재를 인지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거겠지. 좋아, 어디 해 보자.

검과 방패를 장착하고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 부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퍼걱!

가볍게 발길질해 선두에 선 몬스터를 멀리 걷어차 날려버렸다.

날아간 몬스터는 그대로 나무에 여러 번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왔다.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 몬스터를 날려버렸는데,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마법사들이 상황 인식을 못 했거나, 인식했지만 몬스터를 멈추지 못하거나, 뭐 그런 거겠지.

군대라길래 뭔가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촤악!

이어서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며, 방패로 밀쳐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어차피 다대일의 싸움, 받아치기보다는 이렇게 파고들어 섬멸하는 게 낫다.

요즘 레벨이 통 오르지 않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잔뜩 사냥해 보겠네.

**

레벨은 이번에도 안 올랐다. 역시 층수보다 레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몬스터 부대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한동안 레벨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레벨업은 잘 안 되고 있어도, 개인적인 단련으로도 조금씩 스펙을 올리고 있으니까 큰 상관은 없다.

그렇게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요새로 돌아와 엘레노어와의 동침 준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아무튼 잘 준비를 했다. 일단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으니 목욕부터.

전시 상황이지만 다크엘프의 욕탕은 여전히 훌륭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욕탕이 전체적으로 커진데다가, 탕에 약초 같은 걸 풀어놓은 탓인지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아, 다크엘프의 혼욕 문화도 여전했다.

인간족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알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다가와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아무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마침내 성 안의 침실에서 엘레노어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

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엘레노어가 저런 네글리제 차림만 아니었어도 별로 거리낄 건 없었을 텐데.

“자, 그대도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라. 내 침대는 무척 편하다고.”

“어, 음.”

“그렇게 겁먹지 말고, 정말로 손만 잡고 잘 거라니까.”

엘레노어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결국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손만 잡고 잔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어는 눕자마자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어차피 밤중에 습격이라도 일어나면 곧장 일어나야 한다, 남녀사이의 일을 치를 시간도 없어.”

하긴, 전시 상황에 군주가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겠지. 아마도.

-훅.

엘레노어가 손짓하자 방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도 순순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생각은 없다.

이대로 명상이라도 하며 마력을 굴릴 셈이다.

정말로 딱 손만 잡고 내 옆에 누운 엘레노어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대여.”

“왜.”

“그대는 정말 인간인가?”

“그런데.”

“인간은 백 년밖에 못 사는 거 아니었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나도 말할 생각은 없다.

낮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엘레노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NPC라는 사실을 떠나서, 이게 과연 엘레노어에게 말해도 좋은 일인가 해서.

내 심정 자체는 이미 8층을 떠나오며, 자아를 잃은 엘레노어에게 한 번 토해내듯 말했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딱히 편해지는 건 없었지.

그렇다면 이렇게 자아가 있는 엘레노어에게 말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이트 엘프의 습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엘레노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엘레노어는 자유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했다.

그런 엘레노어에게, 너는 탑의 시스템에 종속된 NPC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쌔액, 쌔액.

엘레노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붙잡은 손과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따듯하다.

원래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명상은 완전히 깨졌고,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졌다.

그리고, 실로 몇 년 만에- 긴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