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27 lines
11 KiB
Markdown
227 lines
11 KiB
Markdown
|
||
62. 모순의 본심
|
||
|
||
필드 보스를 쓰러트린 후, 감각 강화 스킬의 레벨이 한 번 더 상승했다.
|
||
|
||
그리고 [감각 증폭]이라는 새로운 액티브 스킬도 습득했다. 스킬의 성능은 단순하게 오감을 더 강화하는 것.
|
||
|
||
감각 증폭을 켜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생체 레이더가 된다.
|
||
|
||
그냥 민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반사로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
||
|
||
위기를 깨부수며 이룩한 성장은 언제나 짜릿하다. 나는 만족하며 다크엘프의 마을로 되돌아왔다.
|
||
|
||
마을에는 밤을 지새운 듯 보이는 엘레노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
“그대, 피냄새가 나는구나.”
|
||
|
||
그러고보니 다크엘프는 후각이 예민하다 했지. 장비를 갈아입긴 했지만,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나.
|
||
|
||
밤중에 갑자기 장비를 챙기고 외출하더니,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상황.
|
||
|
||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을 법도 한데, 엘레노어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
“역시 그대는 내 취향이란 말이지……보면 볼수록 탐나서 원,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구나.”
|
||
|
||
음, 뭔가 심오한 말을 하려나 했는데 아니었네. 야성미가 넘치는 연하인지 뭔지가 취향이라고 했었지.
|
||
|
||
아무래도 엘레노어는 내가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
||
|
||
“그런데, 그대도 밤을 새운 거지? 잠은 안 자도 되나?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
||
|
||
“딱히.”
|
||
|
||
“인간족은 좀 자주 먹는 편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
|
||
그렇겠지. 다크엘프는 종족 전체가 식사 주기가 뜸한 편이고, 나도 항상 화이트롤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까.
|
||
|
||
물론 다크엘프들은 나랑 눈만 마주쳐도 간식을 먹이려고 들긴 하지만, 어쨌든.
|
||
|
||
지금도 필드 보스를 잡은 직후에 화이트롤을 먹어서 따로 뭘 먹을 필요는 없고, 수면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
||
|
||
“식욕이 없거든.”
|
||
|
||
나는 대충 대답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식욕이고 수면욕이고 하는 건 옅어진 지 오래니까.
|
||
|
||
아니, 저절로 옅어졌다기보다는 스스로 잘라낸 것에 가깝겠다.
|
||
|
||
1층에 처박혀 있던 시절에도, 꼴에 입이라고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처먹었으니까.
|
||
|
||
일차원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때의 정신상태로 이 7층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
||
|
||
다크엘프들에게 빌붙어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받아먹고, 밤에는 엘레노어랑 뒹굴지 않았을까.
|
||
|
||
그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역겨움이 치민다. 짐승만도 못한 꼴이겠지.
|
||
|
||
가슴에 깊이 박아넣은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 거다.
|
||
|
||
“그런가,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닌데.”
|
||
|
||
엘레노어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식욕을 잃어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
||
|
||
**
|
||
|
||
엘레노어와는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졌다. 서로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으니까.
|
||
|
||
나는 곧바로 정찰대의 건물로 이동했고, 정찰대원 다크엘프들의 관심을 흘려넘기며 리즈멜을 찾았다.
|
||
|
||
리즈멜과 만나자마자 다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몸풀기를 마치고, 어제 하던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
||
|
||
리즈멜은 어제보다 훈련의 난이도를 낮춰서 천천히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
||
|
||
-서걱!
|
||
|
||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휘두른 검이 가볍게 인형을 베어냈다.
|
||
|
||
“뭐야, 오늘은 컨디션이 무척 좋은 모양이네? 푹 쉬다 왔구나?”
|
||
|
||
특별히 더 훈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와는 사뭇 다른 결과에, 리즈멜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
||
|
||
뭐, 반은 맞다.
|
||
|
||
쉬다 온 건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기는 하니까.
|
||
|
||
그리고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험이 급격히 진도를 나갈 마다, 리즈멜의 표정은 점점 나빠져 갔다.
|
||
|
||
처음에는 마냥 기뻐하며 칭찬도 하고, 너무 우쭐해하지 말라며 틱틱거리기도 했지만.
|
||
|
||
내가 인형 다섯을 동시에 여유롭게 쓰러트리고, 어제 보여줬던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시작할 때쯤.
|
||
|
||
“……”
|
||
|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리즈멜은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
||
|
||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아낌없이 내보였다.
|
||
|
||
눈을 감고 여유롭게 인형을 무찌르며, 감각의 확장을 완벽히 다루고 있음을 증명했다.
|
||
|
||
“어떻게 된 거야?”
|
||
|
||
리즈멜이 돌연 험악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
|
||
“네가 알려준 거잖아. 틀린 부분 있어?”
|
||
|
||
리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
||
|
||
“너……어젯밤에 뭐 했어?”
|
||
|
||
리즈멜의 눈동자에 다시 깊은 걱정이 담겼다.
|
||
|
||
**
|
||
|
||
나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켕기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설명했다.
|
||
|
||
“그냥 실전에서 연습 좀 하고 왔어, 별 거 아냐.”
|
||
|
||
하지만 끝맺고 보니 별로 떳떳한 말투가 아니었다. 이것도 내 부족한 말재주 탓이겠지.
|
||
|
||
“실전에서 연습하고 왔다니, 지금 장난해? 네 눈을 베면서 싸우는 게 어떻게 그냥 연습인데!”
|
||
|
||
리즈멜은 내게 바짝 달라붙어서, 추궁하듯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
||
|
||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그런데 왜?”
|
||
|
||
“뭐가.”
|
||
|
||
“왜 또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기 시작한 거냐고.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
||
|
||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
||
|
||
“맞아.”
|
||
|
||
“그러면, 왜?”
|
||
|
||
“할 수 있으니까.”
|
||
|
||
예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었다.
|
||
|
||
수정 거미 때와 똑같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 거라고.
|
||
|
||
리즈멜은 그때도 이 대답을 듣고,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
||
|
||
“나는 네가 뭔가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
||
|
||
“그래서 자꾸만 위험하게 실전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라고. 내가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정한 이유도 그거였어.”
|
||
|
||
“내가 검술을 가르쳐서 너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위험한 짓을 감수할 일도 더는 없을 거라고.”
|
||
|
||
“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알았어, 네가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거. 여유가 있어 보였거든.”
|
||
|
||
그리고, 리즈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즈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
|
||
“너는, 그냥 강해지는 게 좋은 거잖아.”
|
||
|
||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어떤 의미에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
||
|
||
리즈멜은 내가 성장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
||
|
||
**
|
||
|
||
나는 1층을 공략하고 처음으로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행위의 짜릿함을 알게 되었다.
|
||
|
||
그 짜릿함은 싸구려 도파민에 빠져 있던 내게 너무나 크고 새로운 자극이었고, 나는 한동안 그것을 쫓아 달렸다.
|
||
|
||
아니, 지금도 다를 것 없다. 나는 지금도 성장할 때마다 격한 쾌감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
||
|
||
노력을 즐기는 건 평범하게 좋은 일 아닌가?
|
||
|
||
당장 내가 시련의 탑을 공략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성장의 쾌감.
|
||
|
||
“네가 위험한 방식밖에 몰라서, 그 방법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
||
|
||
리즈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토 달지 않고 들었다.
|
||
|
||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내가 가르쳐 주는 걸 따라오기만 해도 충분해. 나는 네가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어.”
|
||
|
||
리즈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리즈멜과의 수련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
||
|
||
다만 이번에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어느 부분이 달랐다고는 나도 말하기 힘들지만.
|
||
|
||
“내가 너무 조심하게 굴어서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
||
|
||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리즈멜의 걱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부분도 분명 있긴 했다.
|
||
|
||
하지만 꼭 그게 이유라고 할 수만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
||
|
||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내가 느끼기 시작한 초조함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
||
|
||
그렇게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
||
|
||
나는 왜 어제만 유독 그렇게 초조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밖에 빠르게 답이 나왔다.
|
||
|
||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지나다가는, 다시 예전처럼 한심한 놈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그거였지.
|
||
|
||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 그건 쉽다. 리즈멜이 말한 그대로다.
|
||
|
||
나는 리즈멜과 수련하며 강해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만족해 버렸기 때문이다.
|
||
|
||
나는 만족을 누려서는 안 된다.
|
||
|
||
나는 내 욕망을 모조리 거세했다. 식사는 화이트롤만으로 제한하고, 수면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었다.
|
||
|
||
다크엘프의 환상적인 몸매에 눈길을 빼앗기면서, 엘레노어의 유혹을 모조리 거부했다.
|
||
|
||
“그러네, 네 말이 맞다.”
|
||
|
||
리즈멜은 내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말은 무척 정확했다.
|
||
|
||
할 수 있어서 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심은 따로 있었던 거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
||
|
||
“나는 죽고 싶은 거였어.”
|
||
|
||
모정을 빌미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사람 하나를 착취하고 죽여버린 희대의 쓰레기, 서진혁.
|
||
|
||
나는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거다.
|
||
|
||
그 새끼가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서, 자꾸만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다.
|
||
|
||
하지만 죽어버리면 탑을 나가서 엄마에게 사과한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으니까, 나는 그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
||
|
||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모두 나의 본심. 둘 다 나의 욕망.
|
||
|
||
그러나 내 가슴에 박아넣은 맹세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
||
|
||
‘멈춰 서지 않고 끝없이 나아간다. 이 탑의 천장을 뚫고 벗어날 때까지.’
|
||
|
||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 리즈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