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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0년 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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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골랐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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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자 했으나 좀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던 것, 마지막에는 결국 저열한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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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내 사사로운 욕망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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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대는 세상 정세에 둔감했지?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놀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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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끈 엘레노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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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은 7층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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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군사 목적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새로 지어져 있고,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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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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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로, 진영 퀘스트 1장의 마무리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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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삼대 세력이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킨 이후의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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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 충돌이 벌어진 원인은, 7층에서 진영 퀘스트를 수행한 도전자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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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진영을 도왔으면 그것대로, 왕국군 진영을 도왔으면 또 그것대로, 다크엘프 진영을 도왔어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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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들은 진영에 조력한 도전자의 행위가 충돌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했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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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게임으로 치면 조건부로 재생되는 스크립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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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퀘스트 수행 여부에 따라 언급의 내용이 달라질 뿐, 8층의 기본적인 배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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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올라왔더라도, 삼대 세력은 결국 어떻게든 충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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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다, 숲쟁이 놈들이 기어이 맛이 간 거야. 바라던 일이긴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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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마지막으로 하이엘프의 험담을 덧붙이며,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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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치의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짧고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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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시스템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과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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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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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충 대답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다른 다크엘프들이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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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저기……저거 혹시 그 인간족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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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 똑 닮았네요. 그 인간족의 자식이나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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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장성할 만큼 지난 건 아니지 않아? 20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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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은 20년이면 다 자란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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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은 조금 달라졌지만, 7층에서 몇 번 봤던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NPC들 하나까지 나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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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라고는 해도,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는 그렇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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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접해본 경험은 유독 인상 깊게 남는다고도 하고, 워낙에 파격적인 일을 벌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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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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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가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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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이 인간족이잖아! 뭐야, 다시 돌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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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한 리즈멜이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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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스타일도 7층에서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 답지 않은 원피스 차림에 귀에는 피어싱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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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리즈멜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똑같은 피어싱을 하고 있는 남자 다크엘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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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인사해. 이쪽은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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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린 리즈멜의 모습은, 여러 생각을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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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남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7층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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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도 않았고, 리즈멜이랑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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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할 수 없는 20년이라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 있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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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실존했던 것인지는 둘째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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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눈치구나, 그대는 리즈멜이랑 많이 친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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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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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리즈멜의 결혼은 우리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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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길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라, 리즈멜과는 가볍게 인사만 마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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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리즈멜의 결혼 사실에 놀란 나에게, 둘의 연애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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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다크엘프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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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엘프들은 귀를 통해서 세계수의 은혜가 흘러들어 온다고 믿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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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짝을 맞춘 피어싱의 의미와, 엘프들에게 귀가 가지는 의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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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같은 장신구를 단다는 건, 같은 은혜를 공유하며 나란히 삶을 걸어가겠다는 의미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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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귀는 인간으로 치면 왼손 약지와 같은 위치였던거다. 짝을 맞춘 피어싱은 결혼반지랑 비슷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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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장신구를 달던 건 아니고, 원래는 부부끼리 귀에 같은 모양으로 흉터를 새기는 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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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으니, 하이엘프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왜 그렇게 분노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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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같은 흉터를 새기는 것이 결혼의 맹세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귀를 잘리는 건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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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귀에는 피어싱은커녕 뚫은 자국조차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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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뜯어버리겠다는 내 말에, 엘레노어가 그런 욕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웃었던 것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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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엄청나게 심한 짓을 한 거였구나. 미안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안 생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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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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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금세 내가 7층에서 이용하던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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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를 이끌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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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이 마을을 떠났던 것은 기껏해야 두세 시간 전의 일, 풀어놓을 이야기 따위는 당연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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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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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엘레노어의 꿈꾸는 눈을 외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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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층에서 뒤질뻔했던 썰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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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수련 23일차.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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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악마년한테 통수맞았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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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층에서 칩거 생활을 할 적에 읽었던, 커뮤니티의 썰풀이 글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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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내 경험인 척 읊었다. 엘레노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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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이렇게 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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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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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쩐지 그대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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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을 꿰뚫어 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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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부터 표정도 좋지 않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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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처음부터 내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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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재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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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금방 들켰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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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기 힘들다면, 보여줘도 괜찮다. 방법은 그대도 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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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사념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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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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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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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대가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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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인내심은 호기심 이상으로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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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스스로 말해줄 날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무얼, 시간이라면 수백 년도 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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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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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엘레노어는 담담하다 못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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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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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20년 전 밤이자, 나의 어젯밤에 보았던 표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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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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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든 그대의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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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이번에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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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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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게 한숨 쉬며, 잠시간의 고민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단련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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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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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올라가야 할 층이 90층도 넘게 남았다. 이런 일로 벌써 흔들리면 안 될 노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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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명상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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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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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디작은 심장 소리가 북처럼 크게 귓가에 울려 퍼지며 신경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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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력은 주인의 의지와 마음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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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하기 짝이 없는 마음 탓에 집중은 점점 흐트러져만 가고, 마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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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좆같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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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시도해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명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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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마력의 흐름은커녕,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강렬한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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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척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노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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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유독 강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거나,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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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내 마력감지 수준이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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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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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고 보니까 딱 한 번- 엘레노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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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서 1장을 완료하고, 마을을 떠나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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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듯 보였던, 그때의 엘레노어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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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시스템에 의해 평범한 깡통 NPC가 됐다고 해도, 마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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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엘레노어에게서 느끼고 있는 이 기척은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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