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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의 밤
다크엘프 진영을 골랐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버리고자 했으나 좀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던 것, 마지막에는 결국 저열한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지금 나는, 내 사사로운 욕망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대는 세상 정세에 둔감했지?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놀랐겠어.”
내 손을 잡아끈 엘레노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은 7층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군사 목적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새로 지어져 있고,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엘레노어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로, 진영 퀘스트 1장의 마무리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삼대 세력이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킨 이후의 시점이기도 하다.
무력 충돌이 벌어진 원인은, 7층에서 진영 퀘스트를 수행한 도전자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는데.
하이엘프 진영을 도왔으면 그것대로, 왕국군 진영을 도왔으면 또 그것대로, 다크엘프 진영을 도왔어도 마찬가지로.
NPC들은 진영에 조력한 도전자의 행위가 충돌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했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다.
물론, 이는 게임으로 치면 조건부로 재생되는 스크립트에 불과하다.
진영 퀘스트 수행 여부에 따라 언급의 내용이 달라질 뿐, 8층의 기본적인 배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다.
도전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올라왔더라도, 삼대 세력은 결국 어떻게든 충돌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거다, 숲쟁이 놈들이 기어이 맛이 간 거야. 바라던 일이긴 했다만.”
엘레노어는 마지막으로 하이엘프의 험담을 덧붙이며,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마무리했다.
20년치의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짧고 단순하다.
이걸 시스템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과민한 걸까.
“그래……?”
나는 대충 대답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다른 다크엘프들이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여보, 저기……저거 혹시 그 인간족 아니야?”
“어머, 정말 똑 닮았네요. 그 인간족의 자식이나 그런 걸까요?”
“자식이 장성할 만큼 지난 건 아니지 않아? 20년인데?”
“인간족은 20년이면 다 자란다던데요.”
행색은 조금 달라졌지만, 7층에서 몇 번 봤던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NPC들 하나까지 나를 알아본다.
20년이라고는 해도,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는 그렇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인간과 접해본 경험은 유독 인상 깊게 남는다고도 하고, 워낙에 파격적인 일을 벌였기도 하니까.
“너, 너!”
그렇게 길을 가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송이 인간족이잖아! 뭐야, 다시 돌아온 거야?”
7층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한 리즈멜이 그곳에 서 있었다.
헤어 스타일도 7층에서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 답지 않은 원피스 차림에 귀에는 피어싱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리즈멜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똑같은 피어싱을 하고 있는 남자 다크엘프가 있었다.
“맞아, 인사해. 이쪽은 내 남편.”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린 리즈멜의 모습은, 여러 생각을 들게 했다.
**
리즈멜의 남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7층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도 않았고, 리즈멜이랑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20년이라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 있었던 거겠지.
그게 실존했던 것인지는 둘째 치고.
“놀란 눈치구나, 그대는 리즈멜이랑 많이 친했었으니까.”
“뭐 그렇지.”
“으음, 리즈멜의 결혼은 우리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지나가던 길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라, 리즈멜과는 가볍게 인사만 마치고 헤어졌다.
엘레노어는 리즈멜의 결혼 사실에 놀란 나에게, 둘의 연애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다크엘프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됐다.
“과거의 엘프들은 귀를 통해서 세계수의 은혜가 흘러들어 온다고 믿었거든.”
두 사람이 짝을 맞춘 피어싱의 의미와, 엘프들에게 귀가 가지는 의미도.
“그곳에 같은 장신구를 단다는 건, 같은 은혜를 공유하며 나란히 삶을 걸어가겠다는 의미가 되는 거야.”
엘프의 귀는 인간으로 치면 왼손 약지와 같은 위치였던거다. 짝을 맞춘 피어싱은 결혼반지랑 비슷한 거고.
“처음부터 장신구를 달던 건 아니고, 원래는 부부끼리 귀에 같은 모양으로 흉터를 새기는 식이었지.”
이야기를 들으니, 하이엘프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왜 그렇게 분노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귀에 같은 흉터를 새기는 것이 결혼의 맹세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귀를 잘리는 건 어떤 의미일까.
메르세데스의 귀에는 피어싱은커녕 뚫은 자국조차 없었지.
귀를 뜯어버리겠다는 내 말에, 엘레노어가 그런 욕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웃었던 것도 떠오른다.
나 엄청나게 심한 짓을 한 거였구나. 미안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안 생기지만.
-저벅.
걷다 보니, 금세 내가 7층에서 이용하던 숙소에 도착했다.
엘레노어는 나를 이끌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이 마을을 떠났던 것은 기껏해야 두세 시간 전의 일, 풀어놓을 이야기 따위는 당연히 없다.
“자, 어서 말해다오.”
그렇지만 엘레노어의 꿈꾸는 눈을 외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22층에서 뒤질뻔했던 썰 푼다]
[설산수련 23일차.txt]
[시발 악마년한테 통수맞았다 ㅋㅋㅋㅋ]
나는 1층에서 칩거 생활을 할 적에 읽었던, 커뮤니티의 썰풀이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경험인 척 읊었다. 엘레노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후후, 이렇게 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대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구나.”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을 꿰뚫어 봤었다.
“조금 전부터 표정도 좋지 않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대여.”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내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
내 말재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거짓말은 금방 들켰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하기 힘들다면, 보여줘도 괜찮다. 방법은 그대도 알지 않나.”
엘레노어가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사념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미안, 못 하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대가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인내심은 호기심 이상으로 많아.”
“그대가 스스로 말해줄 날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무얼, 시간이라면 수백 년도 더 있으니.”
엘레노어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배려였다.
하지만 정작 엘레노어는 담담하다 못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표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엘레노어의 20년 전 밤이자, 나의 어젯밤에 보았던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그 밤에.
“나는 언제든 그대의 편이니까.”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나주었다.
-후우.
나는 작게 한숨 쉬며, 잠시간의 고민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단련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앞으로 올라가야 할 층이 90층도 넘게 남았다. 이런 일로 벌써 흔들리면 안 될 노릇이지.
눈을 감고 명상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한다.
-쿵, 쿵, 쿵.
그러나, 작디작은 심장 소리가 북처럼 크게 귓가에 울려 퍼지며 신경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력은 주인의 의지와 마음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혼란하기 짝이 없는 마음 탓에 집중은 점점 흐트러져만 가고, 마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씨발…좆같네, 진짜.”
몇 번을 시도해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명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안의 마력의 흐름은커녕,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강렬한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 기척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노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엘레노어가 유독 강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거나,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내 마력감지 수준이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뜻이니까.
“응……?”
아니, 그러고 보니까 딱 한 번- 엘레노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다크엘프의 서 1장을 완료하고, 마을을 떠나기 직전.
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듯 보였던, 그때의 엘레노어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련의 탑 시스템에 의해 평범한 깡통 NPC가 됐다고 해도, 마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내가 엘레노어에게서 느끼고 있는 이 기척은 대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