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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느린 발을 향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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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위해 마련된 침대 위에서 잠시간 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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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만히 드러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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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간을 보냈다고는 해도 이제 기껏해야 30분 정도가 지났다. 이 이상은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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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정혼자 자리를 두고 펼쳐진 결투는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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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의 출력을 무리하게 높인 반동을 받은 메르세데스는, 불굴을 발동시킨 나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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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합을 더 나누다 승패가 갈렸고, 나는 다크엘프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져 이렇게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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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싸움에서 이긴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없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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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자면 나도 엘레노어의 챔피언 같은 역할이었던 거니까. 사후처리는 엘레노어가 알아서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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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승리자로서 해야 하는 게 몇 개 있다고는 하던데, 중환자에게 굳이 시킬 만큼 중대한 일은 아니라는 모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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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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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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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냥 쉬고 있을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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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결투의 복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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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내가 메르세데스를 뛰어넘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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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왕자 녀석에게 갑작스레 불려 결투에 임하게 됐다. 그런 만큼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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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기인 검은 갖고 있었지만, 근접 전사에게 또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는 방패가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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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방어구도 없이 불편한 정복 차림으로 싸움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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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무장한 모습과 비교하면 분명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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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녀석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방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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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움직임을 파악하고 따라가기 전까지, 녀석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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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처음부터 마력강화를 한 채 싸움에 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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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후반에는 귀를 베인 것으로 이성을 잃고, 기술의 날카로움을 잃은 채 날뛰어 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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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쪽의 잘못이니까 내 감점 요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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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보면 80점 정도라고 쳐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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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그 전투에서 보인 퍼포먼스를 다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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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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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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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하던 재료 아이템은 물론이요, 예비용으로 준비해 뒀던 방어구와 무기 대부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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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어차피 안 쓰던 물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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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쏟아부어 시야를 가리고, 억지로 빈틈을 만드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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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략의 문제점은 잡템이건 뭐건 아이템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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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위력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일회성 방패로 동원한 결과, 장비들의 내구도가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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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본 내구도가 낮았던 저층에서의 전리품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수리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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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7층까지 올라오며 긁어모은 아이템을 고작 한 번의 싸움에 소모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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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266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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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언젠가 이 탑에 다른 도전자가 들어온다면, 그 많은 자원을 싹 쓸어다가 내다 버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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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뉴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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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좆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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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으면 뭐, 지가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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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정리하자. 일단 인벤토리를 이용한 전략은 괜찮았지만 다시는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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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대량으로 소비한다는 문제점도 있고, 애초에 상대가 전사여서 쓸 수 있었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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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메르세데스가 마법사였다면, 그냥 범위가 넓은 마법 한방으로 아이템을 싹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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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사라도 오러 마스터리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면,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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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메르세데스보다 강한 고층의 적이 상대라면 전사건 뭐건 간에 통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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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공략이라는 게 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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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누구건 간에 다 통하는 공략법 같은 건 없다. 이번 전략은 메르세데스 맞춤 공략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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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수단을 이번에 다 퍼부었으니, 나는 이번 결투에서 소위 말하는 ‘영끌’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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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150%의 전력을 발휘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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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방심이나 무장 상태의 문제 등으로 80%의 전력밖에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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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무척이나 힘들게 이겼으니, 메르세데스를 능가했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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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단련에 매진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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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높이의 벽을 마주하는 것은 강력한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 벽 너머를 잠시나마 엿보았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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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차 목표는 마력의 감응과 운용 수준을 더 높이는 것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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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내가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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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내 100%로 너의 100%를 능가하고 말겠다. 그리고, 그 때에도 계속 시비를 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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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귀 한쪽도 마저 잘라주마, 깐프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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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복기와 반성을 대충 마치고, 남는 시간은 모조리 명상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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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응와 마력운용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 당장의 목표이기도 하고, 마력강화의 위력까지 몸소 겪어본 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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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놈의 명상은 좀처럼 잘되질 않는다. 엘레노어가 말한 마음의 혼란이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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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혼란하면 마력도 함께 혼란해진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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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차원적인 욕망의 덩어리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가 싫다. 확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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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탑을 뚫고 나가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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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의 심리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마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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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런 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하면 또 혐오감이 차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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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성과가 없는 명상을 미련하게 반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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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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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떠서 숨을 내쉬고 보니, 어느새 바깥은 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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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명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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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결투의 사후처리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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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변태 엘프가 방해하지 않으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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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평소 이맘때쯤이면 시련의 탑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곤 했었는데, 괜히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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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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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하면 안 되잖아, 역시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어. 빨리 8층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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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도 엘레노어는 만나게 되겠지만, 배경상 이렇게 여유를 부릴 일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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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인상에 깊이 남은 강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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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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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엘레노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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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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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엘레노어의 기척은 유독 알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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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격한 전투였다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누워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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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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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네글리제 차림이 아닌 걸 보니, 결투의 사후처리를 마치고 곧바로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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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젠 네글리제 차림이건 뭐건 크게 신경도 안 쓰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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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었나, 지쳤을 텐데 왜 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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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지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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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중요한 거다. 그대라고 다르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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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옅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이것도 그동안 꽤 익숙해져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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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놈과의 약혼은 제대로 파탄 났다. 숲쟁이들과의 화친도 순조롭게 어그러진 것 같고, 의뢰 완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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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대로, 퀘스트 창에는 [다크엘프의 서 - 1장]이 완료되었으며 보상을 준비 중이라고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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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약속했던 답례는 그대가 딱 좋아할 만한 걸로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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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동안 보상에 관한 부분은 반쯤 까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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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뭘 준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의 다른 도전자들과 같은 보상을 줄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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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 대단치 않은 보상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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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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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좀 더 가까이 달라붙은 엘레노어가 따뜻한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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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짚고 있던 내 손 위로 엘레노어의 손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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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그대가 선택할 수 있어. 그대는 정식으로 내 정혼자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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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약혼을 깨달라고만 했지, 그 후에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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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혼자의 자리를 꿰찼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도 아무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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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부터 그런 계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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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대로 떠나지 않고, 이대로 엘레노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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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내 취향이란 말이야. 몇백 년이 지나도, 그대만 한 이상형은 나타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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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가까웠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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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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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생각이구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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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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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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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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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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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언제나 이렇다. 그냥 변태처럼 보여도, 신기할 정도로 깊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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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분위기 타서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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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점까지도 이제는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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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부분이, 익숙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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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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