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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11 KiB

  1. 느린 발을 향한 저주

날 위해 마련된 침대 위에서 잠시간 몸을 뒤척였다.

이렇게 가만히 드러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물론, 시간을 보냈다고는 해도 이제 기껏해야 30분 정도가 지났다. 이 이상은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기 힘들다.

엘레노어의 정혼자 자리를 두고 펼쳐진 결투는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마력강화의 출력을 무리하게 높인 반동을 받은 메르세데스는, 불굴을 발동시킨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그 뒤로 몇 합을 더 나누다 승패가 갈렸고, 나는 다크엘프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져 이렇게 혼자 남았다.

뭐, 싸움에서 이긴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없는 게 당연하다.

사실, 따지자면 나도 엘레노어의 챔피언 같은 역할이었던 거니까. 사후처리는 엘레노어가 알아서 할 거다.

결투의 승리자로서 해야 하는 게 몇 개 있다고는 하던데, 중환자에게 굳이 시킬 만큼 중대한 일은 아니라는 모양이고.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다.

“그럼, 일단.”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냥 쉬고 있을 생각은 없다.

우선은 결투의 복기부터.

결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내가 메르세데스를 뛰어넘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메르세데스는 왕자 녀석에게 갑작스레 불려 결투에 임하게 됐다. 그런 만큼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다.

주무기인 검은 갖고 있었지만, 근접 전사에게 또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는 방패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방어구도 없이 불편한 정복 차림으로 싸움에 임했다.

7층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무장한 모습과 비교하면 분명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 거다.

거기다가 녀석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방심하고 있었다.

내가 움직임을 파악하고 따라가기 전까지, 녀석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싸우고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마력강화를 한 채 싸움에 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심지어 후반에는 귀를 베인 것으로 이성을 잃고, 기술의 날카로움을 잃은 채 날뛰어 댔었다.

뭐, 그건 그쪽의 잘못이니까 내 감점 요소는 아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80점 정도라고 쳐줄 수 있겠지.

문제는 내가 그 전투에서 보인 퍼포먼스를 다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텅 비었네.”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득하던 재료 아이템은 물론이요, 예비용으로 준비해 뒀던 방어구와 무기 대부분을 잃었다.

대부분은 어차피 안 쓰던 물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다.

아이템을 쏟아부어 시야를 가리고, 억지로 빈틈을 만드는 전략.

이 전략의 문제점은 잡템이건 뭐건 아이템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위력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일회성 방패로 동원한 결과, 장비들의 내구도가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특히, 기본 내구도가 낮았던 저층에서의 전리품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수리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1층에서 7층까지 올라오며 긁어모은 아이템을 고작 한 번의 싸움에 소모하고 만 것이다.

[시련의 탑#2661 (1/1)]

만약 언젠가 이 탑에 다른 도전자가 들어온다면, 그 많은 자원을 싹 쓸어다가 내다 버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새삼 뉴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당연히 좆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지만.

좆같으면 뭐, 지가 어쩔건데.

**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정리하자. 일단 인벤토리를 이용한 전략은 괜찮았지만 다시는 못 쓴다.

아이템을 대량으로 소비한다는 문제점도 있고, 애초에 상대가 전사여서 쓸 수 있었던 수다.

만약 메르세데스가 마법사였다면, 그냥 범위가 넓은 마법 한방으로 아이템을 싹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테니.

그리고 전사라도 오러 마스터리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면,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도 있다.

애초에 메르세데스보다 강한 고층의 적이 상대라면 전사건 뭐건 간에 통하지 않겠지.

뭐, 공략이라는 게 다 그렇지.

상대가 누구건 간에 다 통하는 공략법 같은 건 없다. 이번 전략은 메르세데스 맞춤 공략이었던 거다.

쓸 수 있는 수단을 이번에 다 퍼부었으니, 나는 이번 결투에서 소위 말하는 ‘영끌’을 한 셈이다.

그 결과,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150%의 전력을 발휘했고.

메르세데스는 방심이나 무장 상태의 문제 등으로 80%의 전력밖에 내지 못했다.

그러고도 무척이나 힘들게 이겼으니, 메르세데스를 능가했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다.

앞으로 더 단련에 매진해야겠지.

적당한 높이의 벽을 마주하는 것은 강력한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 벽 너머를 잠시나마 엿보았다면 더더욱.

일단 일차 목표는 마력의 감응과 운용 수준을 더 높이는 것으로 삼자.

메르세데스는 내가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벽이다.

다음에는 내 100%로 너의 100%를 능가하고 말겠다. 그리고, 그 때에도 계속 시비를 건다면-

나머지 귀 한쪽도 마저 잘라주마, 깐프 년아.

**

결투의 복기와 반성을 대충 마치고, 남는 시간은 모조리 명상에 투자했다.

마력감응와 마력운용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 당장의 목표이기도 하고, 마력강화의 위력까지 몸소 겪어본 참이니.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놈의 명상은 좀처럼 잘되질 않는다. 엘레노어가 말한 마음의 혼란이 원인일 것이다.

마음이 혼란하면 마력도 함께 혼란해진다고 했던가.

나는 일차원적인 욕망의 덩어리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가 싫다. 확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탑을 뚫고 나가야만 하니까.

이 모순의 심리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마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하면 또 혐오감이 차오르니.

별다른 성과가 없는 명상을 미련하게 반복하게 된다.

“후우……”

잠시 눈을 떠서 숨을 내쉬고 보니, 어느새 바깥은 밤이 되어 있었다.

명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명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려나.

그런데 엘레노어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결투의 사후처리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긴 했는데.

뭐, 그 변태 엘프가 방해하지 않으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평소 이맘때쯤이면 시련의 탑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곤 했었는데, 괜히 허전하다.

“아니, 뭔 소리야.”

허전하면 안 되잖아, 역시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어. 빨리 8층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겠다.

8층에서도 엘레노어는 만나게 되겠지만, 배경상 이렇게 여유를 부릴 일은 없을 테니.

그 때, 인상에 깊이 남은 강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끼익.

문이 열리고, 엘레노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대, 자고 있는가?”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엘레노어의 기척은 유독 알기 쉽다.

**

워낙에 격한 전투였다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누워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들어와.”

평소의 네글리제 차림이 아닌 걸 보니, 결투의 사후처리를 마치고 곧바로 온 모양이다.

솔직히 이젠 네글리제 차림이건 뭐건 크게 신경도 안 쓰이지만 말이다.

“깨어 있었나, 지쳤을 텐데 왜 쉬지 않고.”

“이 정도로 지치기는.”

“휴식은 중요한 거다. 그대라고 다르지 않을 거야.”

엘레노어는 옅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이것도 그동안 꽤 익숙해져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놈과의 약혼은 제대로 파탄 났다. 숲쟁이들과의 화친도 순조롭게 어그러진 것 같고, 의뢰 완료구나.”

그 말대로, 퀘스트 창에는 [다크엘프의 서 - 1장]이 완료되었으며 보상을 준비 중이라고 나타나고 있었다.

“아, 약속했던 답례는 그대가 딱 좋아할 만한 걸로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실, 그동안 보상에 관한 부분은 반쯤 까먹고 있었다.

특별히 뭘 준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의 다른 도전자들과 같은 보상을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별 대단치 않은 보상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어느새 좀 더 가까이 달라붙은 엘레노어가 따뜻한 숨을 뱉었다.

침대를 짚고 있던 내 손 위로 엘레노어의 손이 겹쳤다.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그대가 선택할 수 있어. 그대는 정식으로 내 정혼자가 되었으니.”

엘레노어는 약혼을 깨달라고만 했지, 그 후에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혼자의 자리를 꿰찼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도 아무 상관 없다.

원래부터 그런 계약이었으니.

그리고 반대로 떠나지 않고, 이대로 엘레노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내 취향이란 말이야. 몇백 년이 지나도, 그대만 한 이상형은 나타나지 않겠지.”

그렇잖아도 가까웠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그리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춘다.

“떠날 생각이구나, 그대.”

“어.”

“그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

엘레노어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처럼.

엘레노어는 언제나 이렇다. 그냥 변태처럼 보여도, 신기할 정도로 깊게 생각한다.

“쳇, 분위기 타서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이런 점까지도 이제는 익숙하다.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익숙해지고 말았다.

더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