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1 lines
11 KiB
Markdown
201 lines
11 KiB
Markdown
|
|
193. 미련 없이
|
|
|
|
이 세계에서는 매우 고급품에 속하는, 공산품이 아닌 식재가 한가득 쌓여 있다.
|
|
|
|
아니, 쌓여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아서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
|
|
|
“이, 이거 봐요, 대단하죠? 앞으로 맛있는 거 계속 먹을 수 있겠죠?”
|
|
|
|
사신 한 명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
|
|
|
스무명이 넘는 사신들은 저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재잘거리며 자신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
유토피아 시티도 빨리 찾아가보고 싶지만, 일단 아지트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
|
|
|
-후두두둑!
|
|
|
|
조금 걱정했지만, 산더미 같은 식재료는 제대로 아이템으로 판정되어 인벤토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
|
|
|
내키는 대로 창고를 털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다 가져가려고 이만큼이나 되는 양을 챙겨왔는지.
|
|
|
|
NPC인 이상 내 인벤토리를 완벽하게 인식할 수는 없을 테니, 단순히 욕심을 잔뜩 부린 것뿐일지도 모른다.
|
|
|
|
“파파는 어떻게 했지?”
|
|
|
|
식재료를 챙기던 중, 1호 사신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을 안 해줬구나.
|
|
|
|
“죽였어.”
|
|
|
|
“그런가.”
|
|
|
|
1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심경이 복잡해 보인다.
|
|
|
|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 최연장자고, 그만큼 상원의원의 지시를 받으며 생활한 시간도 길 거다.
|
|
|
|
밥도 안 주는 파파따위 없어도 된다며 반역을 결심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썩 유쾌하지는 않은 거겠지.
|
|
|
|
그나저나, 퀘스트가 완료되었으니 자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
|
|
|
차라리 그랬으면 더 편하고 빠르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
|
|
“야아, 빨리 가자! 나 얼른 페퍼로니 피자가 먹고 싶어!”
|
|
|
|
“갈비찜! 갈비찜!”
|
|
|
|
“저는 새로운 음식이 먹어보고 싶어요, 안될까요?”
|
|
|
|
신이 난 어린아이들처럼 재촉하는 사신들을 보며, 18층과 19층에서의 일을 조금 떠올렸다.
|
|
|
|
엘레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약속하고, 그 흘러간 ‘다음’의 결말을 보았던- 그건 아직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
|
|
|
이 식충이 사신들에게도 ‘다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다.
|
|
|
|
그러니 적어도 내 손이 닿은 범위의 일은 제대로 매듭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
|
|
|
“그래, 알았으니까 가자.”
|
|
|
|
나는 그대로 사신들을 이끌고 아지트로 돌아와, 요청받은 음식을 있는 대로 잔뜩 만들어주었다.
|
|
|
|
상원의원의 벙커에서 털어온 식재료는 내 인벤토리에 갖춰져 있던 재료들보다 종류가 훨씬 다양했다.
|
|
|
|
덕분에 각각 사신들의 ‘최애 음식’을 보다 업그레이드해서 먹여줄 수도 있었고, 새로운 음식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
|
|
|
그러면서 요리 스킬의 레벨도 더 올랐고, 한식 계열의 음식을 먹이며 국뽕을 채우기도 했고- 아무튼 즐거웠지만.
|
|
|
|
“자, 내가 너희에게 요리를 해 주는 건 오늘까지다.”
|
|
|
|
이 식충이들의 응석을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당하게 파업을 선언했다.
|
|
|
|
너희도 슬슬 독립할 준비를 해야지.
|
|
|
|
**
|
|
|
|
자극에 중독된 사신들은 더 이상 내가 만들어주는 요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
|
|
|
물론 이 사이버펑크에도 맛있는 요리는 있다. 하지만 이 사신들이 중독된 ‘현대 음식’은 오직 내 손에서만 나온다.
|
|
|
|
오픈 커뮤니티에서 긁어모은 레시피에, 내 나름의 개량을 거쳐 맵단짠을 강조한 자극적인 스타일의 요리.
|
|
|
|
이걸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요리사는 이 23층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
|
|
|
하지만 나는 곧 23층을 떠나야만 한다. 사신들의 중독적인 욕구를 무한히 채워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
|
|
|
그러니 최소한 내 손으로 확실하게 독립심을 길러주고 떠날 필요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
|
|
|
“무, 무무무,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
|
|
|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사신들은 이번에도 격하게 반응했다. 어쩐지 전보다 더 심한 것 같기도 하고.
|
|
|
|
하지만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
|
|
|
“말 그대로야, 내일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해 먹든가 해. 나는 여기까지니까.”
|
|
|
|
그러자 사신들은 망연자실해 주저앉거나, 나노머신으로 칼을 만들어 들이밀거나, 엉엉 우는 녀석도 있었다.
|
|
|
|
이런 모습까지도 각자 개성이 넘쳐흐르니, 얼굴이 똑같아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너무 잘 된다.
|
|
|
|
나는 칼을 들이민 사신의 손목을 꺾어 나노머신을 빼앗고, 그걸 식칼 형태로 변형시켜 돌려주었다.
|
|
|
|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앞으로도 여기서 살 생각은 없고.”
|
|
|
|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바깥에서 왔다는 거야?”
|
|
|
|
“비슷해, 아무튼 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야. 너희한테 평생 요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
|
|
|
|
이어서, 인벤토리에서 평소에 쓰던 조리도구를 꺼내 늘어놓았다. 사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
|
|
|
“니들 파파는 뒈졌어, 그리고 나는 너희의 새 파파가 되어줄 생각이 없지. 그러면 이젠 독립해야 할 거 아니냐.”
|
|
|
|
그렇다. 나는 사신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것이다. 내가 없어져도 저들끼리 알아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도록.
|
|
|
|
퀘스트가 완료되고 깡통이 된 NPC에게도, 기억은 남아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
|
|
|
|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이제부턴 직접 만들어 먹어, 만드는 방법은 전부 알려 줄 테니까.”
|
|
|
|
“우, 우리는 요리 같은 거……해본 적 없단 말이야!”
|
|
|
|
“나도 요리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많이 하다 보면 알아서 다 늘더라. 그러니까 일단 해 봐.”
|
|
|
|
아직 페스티벌이 시작되기까지는 제법 기간이 남았다. 그전까지만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을 하게끔 가르쳐 놓을 거다.
|
|
|
|
화이트 존의 병력과 싸우며 전자발경도 제법 가닥을 잡았으니, 시간 여유는 꽤 많이 남아 있다.
|
|
|
|
“쉬운 것부터 하자, 일단 너 나와봐.”
|
|
|
|
사신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량이 지난 이후였다.
|
|
|
|
**
|
|
|
|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노머신을 완벽하게 다루며, 그걸로 사이보그를 숭덩숭덩 잘라내던 녀석들이다.
|
|
|
|
제대로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식칼 사용을 비롯한 기본적인 도구 사용법은 대부분이 하루 만에 익혀 내었다.
|
|
|
|
요리는 기본만 할 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그저 레시피를 외우고 사소한 요령을 몸에 익히는 것뿐이다.
|
|
|
|
시간과 함께 쌓인 숙련도는 결과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사신들에겐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
|
|
|
“이거 봐, 파파! 완벽하게 튀겨졌어!”
|
|
|
|
결국, 이 녀석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요리 기술을 습득해 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
|
|
다른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공부가 된다더니, 나도 사신들을 가르치며 요리 스킬의 레벨이 더 올랐다.
|
|
|
|
나는 완벽한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 낸 사신 8호를 칭찬해주며, 오픈 커뮤니티를 살펴보았다.
|
|
|
|
[중요)페스티벌 날짜 공지]
|
|
|
|
이제 페스티벌 이벤트는 거의 모든 정보가 풀렸고, 기간 역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
|
|
|
페스티벌 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는 것은 내일모레, 시간으로 치면 48시간이 살짝 안 되게 남은 상태다.
|
|
|
|
원래는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사신들을 다 가르쳐 놓고, 유토피아 시티까지 다녀와 볼 생각이었는데.
|
|
|
|
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시티의 히든 요소를 캐보기에는 살짝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
|
|
|
“슬슬 가야겠네.”
|
|
|
|
나는 곧바로 아지트의 갱단원들과 사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알렸다.
|
|
|
|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특히 실컷 부려 먹었던 갱단원 중에서는 신 난다는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놈도 있었고.
|
|
|
|
사신 쪽은 본인들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쉬워하는 녀석들과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들로 갈려 있었다.
|
|
|
|
“정말 떠나는 건가?”
|
|
|
|
그러던 중, 1호 사신이 혼자 앞으로 나와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
|
|
|
맨날 사람을 음흉하다고 쏘아붙이더니, 얼굴에 아주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다.
|
|
|
|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도 특히 요리를 빠르게 배워서, 이제 내 요리에 집착할 이유는 없을 텐데도.
|
|
|
|
“네 저질스러운 욕망을 위한 클론 하렘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된 거지?”
|
|
|
|
“그런 계획 세운 적 없는데.”
|
|
|
|
“거짓말 마라, 네 속셈은 뻔히 보여. 그게 아니면 요리를 가르칠 이유가 없으니까!”
|
|
|
|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이제 1호 사신의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도 흘려넘길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
|
|
|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1호 사신은 역정을 내며 내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
|
|
|
“잠깐!”
|
|
|
|
순순히 끌려와 다시 고개를 돌려주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를 떠는 1호의 모습이 보였다.
|
|
|
|
“진짜로 가는 거야?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
|
|
|
당연하다, 나는 유토피아 시티를 확인하고 나면 그대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뿐이었다.
|
|
|
|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인사하러 한번 올 수도 있고.”
|
|
|
|
설마 1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
|
|
|
한 층을 지나 멋진 회색 현자가 된 에인과 재회했듯이, 이 녀석들과도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
|
|
|
그러니- 마음으로 바라되 미련은 남기지 않고, 나는 내가 바라보는 길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
|
|
|
|
“될 수 있으면 또 보자.”
|
|
|
|
깡통이 된 후에 헤어지면 더 아쉬울 뿐이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