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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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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련 없이

이 세계에서는 매우 고급품에 속하는, 공산품이 아닌 식재가 한가득 쌓여 있다.

아니, 쌓여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아서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 이거 봐요, 대단하죠? 앞으로 맛있는 거 계속 먹을 수 있겠죠?”

사신 한 명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스무명이 넘는 사신들은 저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재잘거리며 자신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토피아 시티도 빨리 찾아가보고 싶지만, 일단 아지트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후두두둑!

조금 걱정했지만, 산더미 같은 식재료는 제대로 아이템으로 판정되어 인벤토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내키는 대로 창고를 털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다 가져가려고 이만큼이나 되는 양을 챙겨왔는지.

NPC인 이상 내 인벤토리를 완벽하게 인식할 수는 없을 테니, 단순히 욕심을 잔뜩 부린 것뿐일지도 모른다.

“파파는 어떻게 했지?”

식재료를 챙기던 중, 1호 사신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을 안 해줬구나.

“죽였어.”

“그런가.”

1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심경이 복잡해 보인다.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 최연장자고, 그만큼 상원의원의 지시를 받으며 생활한 시간도 길 거다.

밥도 안 주는 파파따위 없어도 된다며 반역을 결심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썩 유쾌하지는 않은 거겠지.

그나저나, 퀘스트가 완료되었으니 자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 편하고 빠르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야아, 빨리 가자! 나 얼른 페퍼로니 피자가 먹고 싶어!”

“갈비찜! 갈비찜!”

“저는 새로운 음식이 먹어보고 싶어요, 안될까요?”

신이 난 어린아이들처럼 재촉하는 사신들을 보며, 18층과 19층에서의 일을 조금 떠올렸다.

엘레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약속하고, 그 흘러간 ‘다음’의 결말을 보았던- 그건 아직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이 식충이 사신들에게도 ‘다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적어도 내 손이 닿은 범위의 일은 제대로 매듭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자.”

나는 그대로 사신들을 이끌고 아지트로 돌아와, 요청받은 음식을 있는 대로 잔뜩 만들어주었다.

상원의원의 벙커에서 털어온 식재료는 내 인벤토리에 갖춰져 있던 재료들보다 종류가 훨씬 다양했다.

덕분에 각각 사신들의 ‘최애 음식’을 보다 업그레이드해서 먹여줄 수도 있었고, 새로운 음식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요리 스킬의 레벨도 더 올랐고, 한식 계열의 음식을 먹이며 국뽕을 채우기도 했고- 아무튼 즐거웠지만.

“자, 내가 너희에게 요리를 해 주는 건 오늘까지다.”

이 식충이들의 응석을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당하게 파업을 선언했다.

너희도 슬슬 독립할 준비를 해야지.

**

자극에 중독된 사신들은 더 이상 내가 만들어주는 요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 사이버펑크에도 맛있는 요리는 있다. 하지만 이 사신들이 중독된 ‘현대 음식’은 오직 내 손에서만 나온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긁어모은 레시피에, 내 나름의 개량을 거쳐 맵단짠을 강조한 자극적인 스타일의 요리.

이걸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요리사는 이 23층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곧 23층을 떠나야만 한다. 사신들의 중독적인 욕구를 무한히 채워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최소한 내 손으로 확실하게 독립심을 길러주고 떠날 필요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무, 무무무,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사신들은 이번에도 격하게 반응했다. 어쩐지 전보다 더 심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말 그대로야, 내일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해 먹든가 해. 나는 여기까지니까.”

그러자 사신들은 망연자실해 주저앉거나, 나노머신으로 칼을 만들어 들이밀거나, 엉엉 우는 녀석도 있었다.

이런 모습까지도 각자 개성이 넘쳐흐르니, 얼굴이 똑같아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너무 잘 된다.

나는 칼을 들이민 사신의 손목을 꺾어 나노머신을 빼앗고, 그걸 식칼 형태로 변형시켜 돌려주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앞으로도 여기서 살 생각은 없고.”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바깥에서 왔다는 거야?”

“비슷해, 아무튼 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야. 너희한테 평생 요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

이어서, 인벤토리에서 평소에 쓰던 조리도구를 꺼내 늘어놓았다. 사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니들 파파는 뒈졌어, 그리고 나는 너희의 새 파파가 되어줄 생각이 없지. 그러면 이젠 독립해야 할 거 아니냐.”

그렇다. 나는 사신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것이다. 내가 없어져도 저들끼리 알아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도록.

퀘스트가 완료되고 깡통이 된 NPC에게도, 기억은 남아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이제부턴 직접 만들어 먹어, 만드는 방법은 전부 알려 줄 테니까.”

“우, 우리는 요리 같은 거……해본 적 없단 말이야!”

“나도 요리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많이 하다 보면 알아서 다 늘더라. 그러니까 일단 해 봐.”

아직 페스티벌이 시작되기까지는 제법 기간이 남았다. 그전까지만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을 하게끔 가르쳐 놓을 거다.

화이트 존의 병력과 싸우며 전자발경도 제법 가닥을 잡았으니, 시간 여유는 꽤 많이 남아 있다.

“쉬운 것부터 하자, 일단 너 나와봐.”

사신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량이 지난 이후였다.

**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노머신을 완벽하게 다루며, 그걸로 사이보그를 숭덩숭덩 잘라내던 녀석들이다.

제대로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식칼 사용을 비롯한 기본적인 도구 사용법은 대부분이 하루 만에 익혀 내었다.

요리는 기본만 할 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그저 레시피를 외우고 사소한 요령을 몸에 익히는 것뿐이다.

시간과 함께 쌓인 숙련도는 결과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사신들에겐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이거 봐, 파파! 완벽하게 튀겨졌어!”

결국, 이 녀석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요리 기술을 습득해 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공부가 된다더니, 나도 사신들을 가르치며 요리 스킬의 레벨이 더 올랐다.

나는 완벽한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 낸 사신 8호를 칭찬해주며, 오픈 커뮤니티를 살펴보았다.

[중요)페스티벌 날짜 공지]

이제 페스티벌 이벤트는 거의 모든 정보가 풀렸고, 기간 역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페스티벌 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는 것은 내일모레, 시간으로 치면 48시간이 살짝 안 되게 남은 상태다.

원래는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사신들을 다 가르쳐 놓고, 유토피아 시티까지 다녀와 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시티의 히든 요소를 캐보기에는 살짝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슬슬 가야겠네.”

나는 곧바로 아지트의 갱단원들과 사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알렸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특히 실컷 부려 먹었던 갱단원 중에서는 신 난다는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놈도 있었고.

사신 쪽은 본인들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쉬워하는 녀석들과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들로 갈려 있었다.

“정말 떠나는 건가?”

그러던 중, 1호 사신이 혼자 앞으로 나와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맨날 사람을 음흉하다고 쏘아붙이더니, 얼굴에 아주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다.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도 특히 요리를 빠르게 배워서, 이제 내 요리에 집착할 이유는 없을 텐데도.

“네 저질스러운 욕망을 위한 클론 하렘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된 거지?”

“그런 계획 세운 적 없는데.”

“거짓말 마라, 네 속셈은 뻔히 보여. 그게 아니면 요리를 가르칠 이유가 없으니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이제 1호 사신의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도 흘려넘길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1호 사신은 역정을 내며 내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잠깐!”

순순히 끌려와 다시 고개를 돌려주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를 떠는 1호의 모습이 보였다.

“진짜로 가는 거야?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당연하다, 나는 유토피아 시티를 확인하고 나면 그대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뿐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인사하러 한번 올 수도 있고.”

설마 1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층을 지나 멋진 회색 현자가 된 에인과 재회했듯이, 이 녀석들과도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으로 바라되 미련은 남기지 않고, 나는 내가 바라보는 길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

“될 수 있으면 또 보자.”

깡통이 된 후에 헤어지면 더 아쉬울 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