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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14 KiB

왕성 정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에반데.”

켈리어튼은 신생 왕국이었다.

하지만 왕성의 규모나 보안을 생각하면, 제국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괜히 기사 왕국이라는 이름이 달린 게 아니니까.

켈리어튼엔 실력 좋은 기사들이 널렸다.

저렇게 쿠키처럼 쉽게 갈라질 건 아니란 소리였다.

[제목: ???: 우릴 구하러 와줬구나!]

(구석에 쳐박혀 기절한 기사 짤)

아니 나도 잡혔어

  • 기사였던 것

  • 아니 뭔 기사가 저렇게 쉽게 당하냐?

  • 근데 저거 파딱 아님?

ㄴ 아니 ㄹㅇ이네

ㄴ 파딱이 왜 분탕치고 있는거임?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왕성 내부 갤럼들의 화면을 공유했다.

그곳엔 역시, 내가 아는 외형의 익숙한 곧죽흡이 있었다.

거친 안개를 지나 낫을 들고 고고하게 걸어오는 모습은 위압감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헉.”

숨어 있던 기사가 쏜살같이 곧죽흡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어지간한 실력자도 반응 못할, 예리한 습격이었다.

그 빠른 기습에 곧죽흡은.

-서걱!

“...”

딱히 피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비스듬이 돌려 기사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기사의 검격에 곧죽흡의 어깨부터 팔이 깔끔하게 절단되었지만, 반응조차 없었다.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쑤욱

1초만에 팔이 재생되었다.

곧죽흡은 불사였다.

여태껏 봤던 불사호소인이 아닌, 진짜 불사.

“...”

“허억!”

곧죽흡은 팔과 함께 떨어지던 낫을 새로운 팔로 잡았다.

그리고 마치 벼를 수확하듯, 기사의 목 옆으로 낫을 가져다 대었다.

느린 동작이었으나, 반응할 수 없었다.

누구도 팔이 한쪽 잘린 상태에서 저렇게 태연하게 공격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강철 갑옷이 있긴 한데...”

기사도 나도 알고 있었다.

잘하면 잘린다.

“다인전은 몰라도 1대1만큼은 거의 최강이니까.”

기사는 절망감이 깃든 표정으로 다급히 갤러리에 글을 남겼으니.

[제목: 아 ㅋㅋ]

(초근접 곧죽흡 짤)

파딱한테 개겨봤는데 안되네

ㅅㅂ 주딱아 파딱 관리 안하냐!!!

아무튼 먼저 탈갤한다

재밌었습니다 수고요

[추천12] [비추천0]

  • 응 가지마~ 너 없으면 갤 망해~

  • ㅅㅂ ㅋㅋ 쿨하네요

  • 아니 진짜 죽냐? 이렇게 죽는 건 개억울한데;

“그건 안 되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곧죽흡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내게 붙어 있었다.

착하고 소심하면서, 귀여웠다.

“반대로 왕성 곧죽흡은...”

그야말로 정반대, 완벽한 분탕이었다.

곧죽흡이 곧 낫을 크게 휘두르던 그때였다.

내게도 방법은 있었다.

[상점/철합금]

[강철판10T 100x400mm] - 25p

“배송지는 켈리어튼 왕성으로.”

즐겨찾기.

상점 즐겨찾기를 통해 등록해둔 강철판을, 단 몇 초만에 구매 후 배송했으니.

[상품을 해당 좌표로 배송했습니다!]

마치 허공에서 강철판이 생성된 것처럼 나타났다.

  • 까드득!

투박하고 거친 소음과 함께 곧죽흡의 낫이 애꿎은 강철판만 그었다.

“!”

싸늘하던 곧죽흡의 표정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아연실색하던 기사 또한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으니.

주딱*: 뭐함 잽싸게 튀셈 ㅇㅇ

“가, 감사합니다.”

곧죽흡은 죽이려던 기사를 놓쳤다.

그 사실에 곧바로 기사에게 다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주딱*: 멈춰!!!!!

암묵적인 갤러리 절대 규칙, 멈춰.

물론 거기엔 어떤 마나도, 강제력도 없다.

하지만 갤러리를 한 번이라도 해 봤다면, 멈출 수밖에 없었으니.

“갤로그 탐색은 안 돼도 채팅은 보내지니까.”

파딱 기강잡기는 주딱의 역할.

나는 근엄한 투로 일갈했다.

주딱*: 갈!

곧죽어도흡혈: ...!

주딱*: 파딱이 되어서 유동분신술로 분탕을 치려고 해?

착죽흡과 나죽흡으로 나뉜 곧죽흡.

그걸로 모자라 왕성에 침입해 소중한 병력인 기사를 베려고 했다.

내가 채팅을 치자, 곧죽흡이 움찔거리며 굳었다.

주딱*: (정색하는 개구리 콘)

주딱*: 대답 안 해?

주딱*: 대답

아무래도 곧죽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나아가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채팅러시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우잉...”

내 품속에 있던 또다른 곧죽흡이, 채팅에 대답한 것이다.

곧죽어도흡혈: 우잉

주딱*: 대답

곧죽어도흡혈: 우이잉

주딱*: 너 말고, 나쁜 곧죽흡 대답

곧죽어도흡혈: 우응

“혼난다.”

“이잉...”

하지만 왕성에 있는 나쁜 곧죽흡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낯선 것을 바라보듯 경계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마치 갤러리와 나를 모르는 것처럼.

“...”

이를 증명하듯 곧 내 채팅이 직접적인 위협이 없단 걸 판단하자마자.

다시금 기사들을 향해 재빠르게 날아가 낫을 휘두르려 했다.

주딱*: 멈춰!

“!”

그리고 내가 다급하게 채팅을 치자, 곧죽흡은 반사적으로 또 멈칫했다.

“왜?”

곧죽흡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내 말에 스스로 멈추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 모양.

하지만 그로 인해 더는 싸울 마음을 잃어버린 걸까.

들어 올렸던 낫을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넌 누구지?”

그리고 곧 갤러리, 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물었다.

주딱*: 내가 반대로 묻고 싶은데. 진짜 기억 하나도 안 남?

곧죽흡은 그래도 내가 전이한 이후로 초창기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요즘들어 활동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아예 기억을 잃고 나오다니.

그러자 곧죽흡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 나는...”

주딱*: 파딱이잖아. 나랑 직접 만난 적도 있었고

“파딱? 내가 너랑 만났다고?”

-스르륵

곧죽흡의 낫이 피로 변하더니,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었지만.

나는 천천히 곧죽흡을 달래듯 말했다.

그냥 분탕이면 밴하고 말겠지만, 곧죽흡은 자의도 아닐뿐더러.

“파딱이니까.”

함께 새벽 오크 벗짤을 보며 견뎌온 전우니까.

그리고 내 기대에 부흥하듯 곧죽흡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는가 싶던 그때였다.

“아니, 아니야.”

곧죽흡이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헙.”

그에 알현실 내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참치여왕과 눈이 마주쳤으니.

곧죽흡은 엄청난 속도로 기사를 제치고 달려가 참치 여왕의 팔을 붙잡아버렸다.

“히, 힉.”

“인간들의 여왕...”

곧죽흡은 곧 증오스럽단 눈길로 참치여왕을 노려보던 그때였다.

-와그작

“엥?”

  • 참치캔여왕님) 아, 아파! ㅠ∩ㅠ

ㄴ 아이고!!!

ㄴ 귀염둥이 참치여왕이!

참치캔 여왕이 곧죽흡에게 물려버리고 말았다.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마찬가지로 수능에게 물리면 재수를 하고.

교수에게 물리면 대학원생이 된다.

“흡혈귀도 마찬가지지.”

흡혈귀에게 물리면? 흡혈귀가 된다.

정확히는 시조인 곧죽흡의 노예1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으헤엑.”

“여왕님!”

“아이고 내 귀엽고 말랑한 여왕님이!!!”

기사들이 다급히 곧죽흡을 막아섰으나, 그땐 이미 늦었다.

곧죽흡은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난 이후였으니까.

“머, 머리가 뜨거워.”

참치여왕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순식간에 고열이 올라오는지,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뭐임 진짜 이렇게 죽는다고?

  • 아니 참치여왕 죽는 건 진짜 안되지

  • 켈리어튼 서비스 종료 발표

ㄴ 씨발아 저주하지마

참치여왕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하지만 참치여왕은 두려워하기보단 꽤 침착하게 나부터 찾았으니.

참치캔여왕님: 우씨

주딱*: ㅈㅅ;;

생각해보면 내가 여왕으로 만들었지.

켈리어튼에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참치여왕이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그러다 그 결말이 곧죽흡에게 물려버리는 거라니.

하지만 참치여왕은 날 탓하지 않았다.

참치캔여왕님: 괜찮아

주딱*: ㅇㅇ?

참치캔여왕님: 끝내 흡혈귀가 되어서 죽는다 해도, 난 널 탓할 생각이 없어

참치캔여왕님: 애초에 너한테 받은 게 많으니까

흡혈귀가 된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즉, 어떻게 될지 모른다.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참치여왕은 어쩔 줄 모르는 주변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근데.

“안 죽는데.”

나는 알고 있었다.

별로 위험할 거 없다.

애초에 곧죽흡과 함께 지내며 흡혈귀에 관해 궁금했던 걸 다 물어봤고.

만일 흡혈귀가 되었을 때,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참치여왕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치캔여왕님: 유언이 있어.

주딱*: (고개를 기울인 개구리 콘)

참치캔여왕님: 문과유령...

“헉.”

문과유령의비밀.

일전에 갤러리 게임, 오목에서 참치여왕을 농락했던 고닉이었다.

물론 내 부계정이었다.

참치캔여왕님: 어디 살아...

참치여왕은 말하다 말고 고개를 떨궜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은 난리가 났지만, 나는 익숙하게 보관중이던 혈액을 꺼냈다.

[주딱의 피]

주딱의 피다. 기름지다.

“원래는 곧죽흡 주는 용도였는데.”

혈액병을 잡아다 착죽흡에게 보여주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곧죽흡이 유난히도 좋아하던 내 피였다.

곧죽흡의 흡혈 충동과 수면욕을 가라앉히던 치료제와도 같았으니.

  • 참치캔여왕님) 크아앙! \∩ /

ㄴ 헉

ㄴ 진짜 흡혈귀 된 거임?

ㄴ 흡혈귀참치캔여왕니뮤ㅠㅠㅠ

쓰러져 있던 참치여왕이 곧 눈을 부릅 뜨며 깨어났다.

붉게 번뜩이는 눈과 시선에서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흡혈충동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여왕님, 진정하십시오!”

“이거 강철입니다, 이 다치십니다 이!”

“크아앙!”

물론 위협적이진 않았다.

기사들은 도리어 참치여왕이 다칠까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으니.

[물품을 배송했습니다!]

“크앙?”

이성을 잃고 흥분하던 흡혈참치여왕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흡혈귀를 다루는 법은 간단했다.

내 피만 있으면 된다.

“시조가 곧죽흡 뿐이니까.”

더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있는 흡혈귀는 곧죽흡 뿐.

그럼 새로 생긴 흡혈귀 또한 곧죽흡에게 감염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흡혈귀가 된 참치여왕은 얌전하게 내 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제목: 우리 여왕님 귀엽죠 ㅠㅠㅠㅠㅠ]

(혈액병을 잡고 혀로 홀짝거리는 참치여왕 짤)

(세상 무해하게 웅크리고 있는 짤)

비추 ㄴㄴㄴㄴ

[추천4023] [비추천0]

  • 작성자) 왜 진짜 비추 없음?

ㄴ 귀엽잖아

ㄴ 착해, 귀여워, 열심히 해, 참치캔만 먹으면 만족하는 권력자를 누가 싫어함?

  • 솔직히 입에 넣어보고 싶음

ㄴ ㅅㅂ 존나 무례하누 ㅋㅋㅋㅋ

ㄴ 그래도 일국의 여왕인데 취급 이거 맞냐

하지만 이걸로 끝난 건 아니다.

“결국 피가 떨어지면 또 날뛸 테니까.”

이를 고치는 법은 하나뿐이었다.

곧죽흡이 다시 사람으로 돌리는 것뿐.

문제는 곧죽흡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관측할 수 없습니다.]

[중복된 ip입니다.]

한 아이피를 두 명이 공유한다.

현대에서는 이상할 것 없는 일이지만, 아이피가 일종의 주민번호인 이곳에선 달랐으니.

“여러 명이라 추적이 안 된다?”

그럼 그동안 곧죽흡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감염시킬 수 있었다.

그러기 전에 막아야 했다.

  • 근데 그래서 파딱 어디로 감?

  • 얼핏 아드리안 쪽으로 가는 거 같던데

  • 아니 왕성 대문도 조각내는데, ㅅㅂ 어캄?

당연히 갤러리는 불안감에 떨었다.

곧죽흡이 당장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방법은 꽤나 간단했다.

“우잉?”

시선을 내리자,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착죽흡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세상 무해한 모습.

[해당 사용자를 영구밴 하시겠습니까?]

“예.”

[해당 사용자를 갤러리에서 영구 추방 처리했습니다.]

“잉.”

그리고 나는 그런 착죽흡을 눈앞에서 영구밴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