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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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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건, 형체 없는 거대한 악의였다.

“...”

그걸 마주하자마자 깨달았다.

그 무언가가 바로 자신을 만들어낸 존재이자.

곧 자신을 이루는 근원이란 걸.

“짜증나...”

태어나고 바깥에 던져진 이후로, 분노는 모든 것에 악의를 느꼈다.

우중충한 잿빛 하늘과 폐허도,

못생기고 비틀어진 마수들도.

그리고 불쌍한 제 처지도.

분노는 그저 바깥이 바라는대로 모든 생명에 대한 적개심을 느꼈다.

“우븝!”

그래야 했는데.

주딱*: 이녀석 맛이 어떠냐

이 주딱이라는 존재한테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나한테 뭘 먹인 거냐!”

분노는 소리치면서도 의아했다.

뭐랄까... 화를 낼 동력이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상해.

주딱의 존재 자체가 이상했다.

마치 적막의 공간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듯한 이질감.

홀로 존재하는 외로움과 모두와 함께하는 유대감이 함께 존재한다.

그야말로 모순적인 존재.

하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호의가 분노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낯간지러웠다.

주딱*: 사탕?

“그게 뭐지? 독극물 같은 거냐!”

분노는 입에서 빼낸 사탕을 바닥에 던져버리려다 멈칫했다.

입에서 맴도는 이 달콤한 맛.

평생을 마수 살점, 썩은 음식만 대충 먹다가 느낀 현대의 달콤함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절대 땅바닥에 내던질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마, 맛있어.”

주딱*: 롤리팝 사탕임 더 줄 수도 있음

“진짜...?”

분노는 무해한 사슴처럼 올려다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아냐 웃기지 마! 나는 너랑 싸우려고 여기 왔다고!”

분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표정을 와락 구기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지만...

분노의 적색 눈동자는 처음처럼 불길하게 이글거리지 못했다.

게다가 열린 창틈으로 칼바람이 불어왔다.

분노는 창문을 닫고 총총걸음으로 돌아와 담요를 몸에 둘렀다.

“...화가 안 나.”

분노는 좋은지 짜증나는지 모를 표정으로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때였다.

[‘밀크 초콜릿 바’ 1개가 배송되었습니다!]

[‘아몬드 초코볼’ 1개가 배송되었습니다!]

허공에서 가지각색의 디저트가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뭐, 뭐야!”

분노는 어깨를 화들짝 움츠렸다.

척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것 투성이였다.

“이렇게 귀한 것을 그저 이렇게 쏟아낸다고?”

하지만 분노는 집어먹지 않았다.

길바닥에 오만원이 있으면 웃으며 줍는다.

그런데 오만원권 다발이 들어찬 검정색 돈가방이 있다면?

“아니면 내게 과시하는 거냐?”

당연히 의심부터 들기 마련이다.

분노는 초콜릿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할 말은 했다.

주딱*: 뭘

“네가 바깥보다 뛰어나다고. 그러니까 날 포섭하려는 게 아니냐는 거다!”

아무리 친절한 척 위장해도 넘어가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원래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강자는 약자에게 먹을 것을 나눠줄 힘이 생기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너도 그렇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낸 분노가 그렇게 물었다.

주딱*: ㅇㅇ 맞는데?

그리고 주딱은 딱히 숨기지 않았다.

“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표독했던 분노는 벙찌고 말았다.

주딱*: 널 포섭하려는 건 맞지

“여, 역시!”

주딱*: 근데 그건 너가 불쌍한 엄벌기라 그런거고 ㅇㅇ

주딱*: 딱히 힘이 필요한 건 아님

“...내가 불쌍해?”

엄벌기는 모르겠지만 충격적이었다.

불쌍하다.

설마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주딱*: 배고프고 추워서 벌벌 떠는 여자애한테 뭘 얻겠다고 도와주겠음??

벌벌 떠는 여자애...? 내가?

분노는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바깥에서 분노는 모든 마수들이 두려워하는 칠죄종, 그것도 분노였으니까.

분노는 저도 모르게 담요를 치우고 소리쳤다.

“나는 분노다!”

주딱*: 배고프고 벌벌 떠는 여자애

“나는 분노라고 했다!”

주딱*: 센 척하는 표독한 사춘기 여자애

“나는!”

주딱*: 엄 벌 기

“으으으윽!”

분노는 깨달았다.

말싸움으론 절대 저 존재를 이길 수 없다.

납작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 정수리에 톡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분노가 고개를 들어보니, 독특한 외형의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눈물 방울을 예쁜 비단에 감싸놓은 듯한 화려한 생김새.

“초콜릿...?”

그것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분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키세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초콜릿.

모양만 봐도 먹어보고 싶어졌다.

“안 돼! 참아야 해!”

분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걸 먹으면 화가 나지 않는다.

분노의 힘의 원천이 약해지는 것이다.

분노의 눈동자가 유혹에 이리저리 흔들릴 때, 분노의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주딱*: 근데 화내서 좋은 게 뭐임?

“그걸 질문이라고!”

주딱*: 그러니까 분노인 건 알겠는데

주딱*: 장점이 뭐냐는 거지

주딱*: 보아하니까 너도 단 거 좋아하고 따뜻한 곳에서 행복 느끼던데

“그건!”

분노는 주딱의 말에 눈을 부릅 떴다.

눈만 부릅 떴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기껏 생각해낸 답변도 자신이 분노니까, 그게 전부였다.

주딱*: 다른 칠죄종들은 그렇다 쳐. 근데 넌 이득이 뭐가 있음?

칠죄종은 모두 자신을 지칭하는 죄목에서 힘을 얻는다.

오만, 탐욕, 질투, 색욕, 식욕, 나태.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대로 움직이며

그것에서 힘과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딱 하나, 그러지 못한 게 있었다.

주딱*: 분노 너?

주딱*: 개 재 미 없 잖 아

“크으윽!”

주딱의 말대로였다.

분노는 분노에서 재미를 얻지 못했다.

애초에 분노는 욕구가 아니다.

화를 내면 낼수록 더 화만 날 뿐, 그곳엔 어떠한 즐거움도 없다.

“나, 나는 분노에서 힘을 얻는다!”

그래서일까, 분노는 괜히 항변했다.

듣기 싫으면 무시해버리면 그만인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정곡이었으니까.

수긍해버리면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해지지 않던가.

주딱*: 힘을 얻으면 뭐함?

“바깥에서 누구도 내게 대적하지 못하지!”

주딱*: 대적하지 못하면 뭐함?

“...뭐.”

주딱*: 대적하지 못하게 하고, 차지할만한 케이크라도 있음?

케이크가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노는 분명 이 디저트만큼이나 맛있는 거란 걸 깨달았다.

이를 달리 말하면, 바깥에서 아무리 강해봤자 케이크 한 조각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다.

분노는 거기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자신은 그러려고 태어났으니까.

근데 이제와서 그렇게 말한다 한들.

-톡

“앗!”

그때 분노의 정수리에 초콜릿 바가 떨어졌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정수리를 쓰다듬던 분노는 무릎 앞에 떨어진 초콜릿을 응시했다.

주딱*: 드셈

분노의 손이 제멋대로 초콜릿 바에 닿았다.

그때였다.

주딱*: 먹지마셈

“뭐...!”

분노의 볼이 빨개졌다.

지금 자길 놀리는 건가?

하지만 채 따지기 전에 새로운 채팅이 날아왔으니.

주딱*: 그걸 먹는 게 맛있고 행복하다면, 먹고

주딱*: 그걸 먹는 것보다, 무의미하게 분노하고 생명을 해치는 게 즐겁다면 먹지 마셈

분노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무엇이 즐거운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몇 세기동안 이어진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고 부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분노의 앞에, 주딱의 채팅이 다시 나타났으니.

주딱*: 바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너 자유임

“...그런데?”

주딱*: 하지만 돌아갈거면 그건 생각해. 다신 이걸 먹지도 누리지도 못할 거임

분노는 잠깐 주저했다.

잿빛의 황량한 폐허.

그리고 달콤하고 아늑한 이 곳.

분노는 잠시 주저하다, 곧 두 눈을 부릅떴다.

[제목: 주 주딱! 용 나타났다용!!! 용!!!!!]

작성자: 어둠조아

(황금색 용이 입구 주변을 서성이는 짤)

(엘프보다 큰 금안을 들이밀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짤)

(그림자에 숨어 파들파들 떠는 다크엘프 짤)

주 주딱 도와줘라!

딴 건 다 참겠는데 이건 진짜 안 된다!

주따악!!!

[추천7431] [비추천6]

  • 와 존나 섬뜩하네 ㅋㅋㅋ

  • 어떻게 눈이 입구보다 큼?

  • 기습하면 이길 가능성 몇 퍼임?

ㄴ 정보) 용의 눈동자는 종에 따라 비늘보다 단단하다

ㄴ 오 ㄱㅅㄱㅅ

ㄴ 로엔) 지금 죽겠는데 너무하다!!!

  • 근데 저거 실례합니다. 라고 하는 거 같은데

갤러리에 다급한 글이 올라왔다.

“뭐야, 흔한 헬프콜이잖아.”

하지만 헬프콜을 친 종족이 무려 엘프도, 인간도 아닌 다크엘프라는 것.

자립심이 강한 드워프보다 더 내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던 종족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급하게 도움 요청을 한다?”

의아해서 들어가보니, 용이 도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크엘프들은 당연히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한데.

“말랑이?”

켈리어튼 마탑 최상층에서 용용이와 함께 동거중인 골댕이, 아니 골드래곤 말랑이었다.

내가 알기로 루멜린과 켈리어튼 거리가 꽤 되는 걸로 아는데...

도대체 왜 저기까지 날아간 거지?

“설마 다크엘프와 과거에 사이가 안 좋았나?”

용사냥꾼 전설이 있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설마 싶었으나, 곧 당사자가 글에 등장했다.

  • 말랑) 앗, 그건 아니에용

ㄴ ㅋㅋㅋㅋ 앗 이러고 있네

ㄴ 로엔) 그, 그럼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 인가요?

용에 인지부조화가 온 로엔이 컨셉이 깨지면서까지 존대말을 썼다.

말랑이가 루멜린까지 간 이유는 간단했다.

  • 말랑) 주딱님께서 보석을 협곡 밑바닥으로 버리셨다고 해서용

ㄴ 로엔) 그 그렇다.인데요?

ㄴ 말랑)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잠시 내려가볼 수 있을까 해서요!

말랑이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그리고 용의 친절한 목소리는.

크아아아!

으르렁거리는 공포스런 하울링이 되어 협곡 사이사이를 누볐으니.

ㄴ 로엔) 히에엑

ㄴ 헤에엑

ㄴ 흐에엑

다크엘프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당연히 쉽게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락할 수도 없으니까.

“내가 나설 때인가?”

결국 내가 직접 중재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 주딱*) “소코마데다”

ㄴ 말랑) 앗

내가 나서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말랑이.

내가 오기 전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던 걸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ㄴ 주딱*) ㅋㅋ

ㄴ 말랑) ㅎㅎ...

ㄴ 주딱*) 실례가 안 되겠냐?

ㄴ 말랑) 힝규ㅜㅠ

다행히 일이 커지기 전에 진압에 성공했다.

잠깐 갤러리를 안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4.444.404: 주딱...

그때 마침 분노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딱*: ㅇㅇ?

4.444.404: 결정했다

결정했다는 짧은 채팅 하나.

“생각보단 금방 결정했네.”

내 말을 따라 여기서 머무를지, 아니면 균열로 넘어갈지.

“힘 대부분이 저쪽 너머에 붙잡혀 있다고 했던가?”

분노는 어떤 이유로 인해 힘 대부분이 바깥에 묶여 있었다.

즉, 여기 남으려면 힘을 포기해야 했다.

주딱*: ㅇㅇ 말해주셈

물론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뻔했다.

“여기 남겠지.”

저 잿빛 세상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기 남는다고 하면 착하다고 사탕이나 더 줄까. 그런 생각을 할 즘이었다.

4.444.404: 바깥으로 돌아갈 거다

“왓?”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바깥으로 돌아가겠다고?

“왜?”

결정을 이해 못하던 그때 채팅이 또 도착했다.

4.444.404: 아 맞다 그리고 하나 더

주딱*: ?

4.444.404: 주딱, 네 옷도 필요해

주딱*: ???

4.444.404: 그러니까...

4.444.404: 당장 벗어!

분노가 기어코 돌아간다고 했다.

당당히 내 옷까지 벗어 내놓으라고 따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