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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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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마디가 백설향의 여린 마음에 남긴 상처는 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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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고,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흠,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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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없는 백설향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지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당장 칼을 뽑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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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백설향은 칼을 뽑을 생각조차 못 했다. 그냥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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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나가버린 백설향이 입을 떡 벌린 채 눈물만 뚝뚝 흘려대고, 그제서야 당황한 나머지 너무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을 해버렸다는 것을 자각한 서준이 급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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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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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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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게 있으면 다 들어주겠다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그런 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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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백설향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이제 그녀는 체면이니 뭐니 그냥 다 놔버렸다. 이미 그런 걸 챙기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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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준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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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계속 빙궁에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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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 후안무치의 대명사 이서준마저 그러한 백설향의 모습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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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살 먹은 화경이 이렇게 짠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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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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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궁에는 미안한 게 조금 (상당히 많이) 있는 상황. 이제 백윤도 잡았겠다, 백서준의 신분을 쓸 일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더 백서준이 사고를 치고 다녔다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백설향에게 너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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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번에 깨달음을 얻으며 힘도 충분히 생겼겠다, 굳이 백서준이라는 신분을 너무 꽁꽁 싸맬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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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충격받지 말고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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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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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사천군 이서준이라고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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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 눈을 굴린 백설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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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피에 미친 광인이라던데…. 그놈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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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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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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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굳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꿈틀대던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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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까지 해서 빙궁을 떠나고 싶은 게냐? 정녕 너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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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의 무인 백설향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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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종류의 심법이 아니라면 사람이 두 종류 이상의 내공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상식 따위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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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무림에는 빙백신기와 정파의 내공을 동시에 다루는 심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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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특색이 강한 빙백신기는 다른 내공과 섞일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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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상식 이전에 하나의 절대적인 명제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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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이서준이 사람 새끼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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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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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눈앞에서 남궁의 창궁대연신기와 빙궁의 빙백신기가 번갈아 피어나는 모습을 목도해버린 백설향은 상식이 깨져나가는 순간에 멍청한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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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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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의 사고는 순식간에 여러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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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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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만에 처음 만든 친구가 사실은 정파의 세작이었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한 백설향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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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하늘을 원망하고, 첫 친구를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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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입마에서 겨우 헤어나왔던 백설향의 정신이 다시금 저 깊고 질척거리는 수렁을 향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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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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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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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백서준이라는 놈은 원래 처음부터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놈이 빙백신공과 북명신공을 익힌 채 소궁주를 참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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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그를 아무튼 소궁주로 인정한 것은 처음에는 억하심정과 세상을 향한 좆같음 탓이었으며, 이제 와 진심으로 저놈이 소궁주 좀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사람 됨됨이가 꽤나 괜찮아 보였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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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됨됨이가 전부 연기였으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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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야 백설향을 푼수니 찐따니 하며 비웃었지만, 그녀는 화경의 무인이자 빙궁의 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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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정말로 어느 정도 사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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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중요한 건 백설향의 첫 친구가 사람 자체는 썩 괜찮다는 것이다(백설향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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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제는 아예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까지 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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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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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의 입꼬리가 삐죽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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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도 사실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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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백서준이 사실은 정파 사람이다? 그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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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가, 그러니까 북해빙궁의 궁주가 정파 친구 좀 사귀겠다는데 그 누가 핀잔을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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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북해빙궁은 동떨어져 있다. 백설향도 친구 하나 없는, 아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범-외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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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한들 물리적으로 그놈들 머리통을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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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어차피 백서준은 처음부터 수상하고 이상한 놈이었고, 거기에 정파 사람이라는 이력이 한 줄 추가되어 봤자 정파 출신의 수상하고 이상한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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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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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점에서 백설향의 사고는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이했다. 증가에서 감소가 아니라, 증가에서 폭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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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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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의 이서준. 사파의 백설향. 서로 다른 파벌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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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파벌을 뛰어넘은 우정이라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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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멋진 울림을 가진 말에 백설향의 차가운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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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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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급한 일은 아니라며 이별을 유예한 백서준, 아니, 이서준과 술자리도 한 판 벌인 김에, 마음 속에서부터 크게 들뜬 백설향은 제 친우와 조심스레 취미를 공유하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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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무지한 놈들이 많다. 이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놈들 투성이라는 게다. 하지만 너, 이 백설향의 친구라면 능히 공감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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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방구석에서 술을 퍼마시다 말고 술병 하나를 손에 쥔 채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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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방구석의 더욱 구석진 곳에서 취미로 모은 온갖 청소도구들을 꺼내들고, 제 유일한 친구 이서준에게 자랑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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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봐라. 이 먼지털이로 말할 것 같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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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말로만 자랑하지 않았다. 방구석을 열심히 쏘다니며 제 첫 친구에게 손수 시범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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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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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유려한 손놀림으로 방구석의 먼지를 털어내는 백설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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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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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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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백설향의 주사는 청소인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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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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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라는 행위는 정파의 고상한 노인네들이 취미 삼아 가꾸는 분재와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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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말끔하게 치워낸 빙궁을 보고 있노라면 그 뿌듯함과 성취감이 경지의 상승에 못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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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서럽게 우는 게 안쓰러워서 같이 술이나 마셔주던 서준은 새로 생긴 친구에게 무학의 편리함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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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렇게 할 필요 없이 허공섭물이랑 강기로 금방 끝낼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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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설향이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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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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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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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잡스러운 사도(邪道)는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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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흑문(七邪黑門)의 일원,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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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청소라 함은 내 손으로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닦아낼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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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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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너도 한 번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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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백설향과 함께 빙궁 청소를 시작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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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먼지를 새하얀 걸레로 뽀득뽀득 닦아대던 서준은 문득 든 생각에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 하나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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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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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의 시체는 놈의 혼을 가두는 과정에서 없어져버렸지만, 능월의 시체는 백설향에게 이번 일을 설명할 겸 빙궁까지 들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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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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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본 백설향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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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응…. 멸신회라는 놈들이 금가로도 모자라 빙궁까지 노렸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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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충격적인 사건 탓에 잊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자칫 잘못했으면 백설향이 살해당했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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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뒤로 조용히 살고 있는 줄 알았건만, 이따위 짓을 벌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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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백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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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살해와 인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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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이 북해빙궁에서 추방당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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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연마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온갖 시도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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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양이야 둘째치더라도 같은 빙궁의 식구를 쌍수라는 명목 아래 살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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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은 그 일을 은폐하려 했지만, 전대 궁주는 끝내 찾아낸 말라비틀어진 목내이 몇 구를 토대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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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대로라면 백윤은 그 무공이 폐해진 채 빙궁에서 추방당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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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는 어떻게 낌새를 눈치챘는지 일찍이 빙궁을 빠져나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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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대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놈도 궁지에 몰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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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끌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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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놈은 선을 넘었어. 같은 빙궁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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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며 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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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네가 더욱 놈에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대성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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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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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의 입꼬리가 삐딱하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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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병신이랑 얽히긴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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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백신공을 대성하는 데 딱히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금가의 멸문에 일조한 버러지 새끼를 공감해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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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서준의 표정을 본 백설향이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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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하다…. 그러고 보니 금가와 연이 있다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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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할 것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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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만 으쓱였다. 친구가 생겨 들뜬 백설향의 기분을 아주 이해 못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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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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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서준의 기분이 딱히 상하지 않은 듯 보이자 백설향이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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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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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단 헛기침부터 몇 번 하고, 용기를 낸 김에 본론도 같이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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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일 떠난다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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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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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말하길, 금가의 멸문에 일조한 나머지 쓰레기 하나를 잡으러 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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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친구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책에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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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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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지는 않을 테니, 혹…, 언제쯤 돌아올 지 알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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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는 기다림과 기약 있는 기다림은 그 무게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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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히 정해진 날짜가 있다면, 백설향은 그 시간이 얼마나 되건 하루마다 더해지는 기대감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매일을 영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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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태도가 눈에 훤히 보였기에 서준은 짠한 마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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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보고 돌아갈 때 한 번쯤 들르지 않을까? 일 주도 안 걸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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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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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향이 이제 와 근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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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오는 봄에 혼례를 치를 예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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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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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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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래도 되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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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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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빙궁주가 안휘까지 오면 도중에 일이 좀 많이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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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내가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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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의 인사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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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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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안 있으면 뭘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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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십육명문의 수장들이 남의 친구 관계 가지고 꼽을 주진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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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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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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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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