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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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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건 좀….

그 한 마디가 백설향의 여린 마음에 남긴 상처는 지대했다.

가지 말라고,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흠, 그건 좀?

친구 없는 백설향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지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당장 칼을 뽑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백설향은 칼을 뽑을 생각조차 못 했다. 그냥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멘탈이 나가버린 백설향이 입을 떡 벌린 채 눈물만 뚝뚝 흘려대고, 그제서야 당황한 나머지 너무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을 해버렸다는 것을 자각한 서준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아니고…?”

“원하는 게 있으면 다 들어주겠다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그런 말이었는데….”

그 말에 백설향의 눈이 부릅 뜨였다. 이제 그녀는 체면이니 뭐니 그냥 다 놔버렸다. 이미 그런 걸 챙기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래서 서준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물었다.

“…그러면 계속 빙궁에 있는 것이냐?”

인면수심, 후안무치의 대명사 이서준마저 그러한 백설향의 모습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몇백 살 먹은 화경이 이렇게 짠할 수가 있나…?

서준은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했다.

빙궁에는 미안한 게 조금 (상당히 많이) 있는 상황. 이제 백윤도 잡았겠다, 백서준의 신분을 쓸 일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더 백서준이 사고를 치고 다녔다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백설향에게 너무 미안하다.

더불어 이번에 깨달음을 얻으며 힘도 충분히 생겼겠다, 굳이 백서준이라는 신분을 너무 꽁꽁 싸맬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너무 충격받지 말고 들어봐.”

“…그러마.”

“멸사천군 이서준이라고 아나?”

데굴, 눈을 굴린 백설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피에 미친 광인이라던데…. 그놈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게냐?”

“그게 나다.”

“……?”

백설향이 굳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꿈틀대던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준을 보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그렇게까지 해서 빙궁을 떠나고 싶은 게냐? 정녕 너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

화경의 무인 백설향에게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특수한 종류의 심법이 아니라면 사람이 두 종류 이상의 내공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상식 따위가 그러했다.

그리고 이 무림에는 빙백신기와 정파의 내공을 동시에 다루는 심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시당초 특색이 강한 빙백신기는 다른 내공과 섞일 수조차 없다.

그것은 상식 이전에 하나의 절대적인 명제에 가까웠다.

비인간 이서준이 사람 새끼가 아니라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다.

“쨔잔.”

그렇게 눈앞에서 남궁의 창궁대연신기와 빙궁의 빙백신기가 번갈아 피어나는 모습을 목도해버린 백설향은 상식이 깨져나가는 순간에 멍청한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엣.”

백설향의 사고는 순식간에 여러 과정을 거쳤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다.

몇백 년 만에 처음 만든 친구가 사실은 정파의 세작이었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도한 백설향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하늘을 원망하고, 첫 친구를 원망했다.

주화입마에서 겨우 헤어나왔던 백설향의 정신이 다시금 저 깊고 질척거리는 수렁을 향해 가라앉았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흠?

생각해보니 백서준이라는 놈은 원래 처음부터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난 놈이 빙백신공과 북명신공을 익힌 채 소궁주를 참칭했다.

백설향이 그를 아무튼 소궁주로 인정한 것은 처음에는 억하심정과 세상을 향한 좆같음 탓이었으며, 이제 와 진심으로 저놈이 소궁주 좀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 것은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사람 됨됨이가 꽤나 괜찮아 보였던 까닭이다.

그 사람 됨됨이가 전부 연기였으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서준이야 백설향을 푼수니 찐따니 하며 비웃었지만, 그녀는 화경의 무인이자 빙궁의 수장이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정말로 어느 정도 사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백설향의 첫 친구가 사람 자체는 썩 괜찮다는 것이다(백설향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이제는 아예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까지 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도!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백설향의 입꼬리가 삐죽 솟았다.

‘이놈도 사실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구나!

그리 생각하니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백서준이 사실은 정파 사람이다? 그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내가, 그러니까 북해빙궁의 궁주가 정파 친구 좀 사귀겠다는데 그 누가 핀잔을 주겠는가!

어차피 북해빙궁은 동떨어져 있다. 백설향도 친구 하나 없는, 아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범-외톨이다.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한들 물리적으로 그놈들 머리통을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도 있다.

게다가 어차피 백서준은 처음부터 수상하고 이상한 놈이었고, 거기에 정파 사람이라는 이력이 한 줄 추가되어 봤자 정파 출신의 수상하고 이상한 사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오…?

그 시점에서 백설향의 사고는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이했다. 증가에서 감소가 아니라, 증가에서 폭증으로.

그녀는 생각했다.

정파의 이서준. 사파의 백설향. 서로 다른 파벌의 두 사람.

그러니까 이건…, 파벌을 뛰어넘은 우정이라는 놈이다.

그 멋진 울림을 가진 말에 백설향의 차가운 심장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다.

아주 급한 일은 아니라며 이별을 유예한 백서준, 아니, 이서준과 술자리도 한 판 벌인 김에, 마음 속에서부터 크게 들뜬 백설향은 제 친우와 조심스레 취미를 공유하려 시도했다.

“세상에는 무지한 놈들이 많다. 이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놈들 투성이라는 게다. 하지만 너, 이 백설향의 친구라면 능히 공감할 수 있겠지.”

그녀는 방구석에서 술을 퍼마시다 말고 술병 하나를 손에 쥔 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구석의 더욱 구석진 곳에서 취미로 모은 온갖 청소도구들을 꺼내들고, 제 유일한 친구 이서준에게 자랑을 시작했다.

“자, 봐라. 이 먼지털이로 말할 것 같으면….”

백설향은 말로만 자랑하지 않았다. 방구석을 열심히 쏘다니며 제 첫 친구에게 손수 시범을 보였다.

탁탁탁-

서준은 유려한 손놀림으로 방구석의 먼지를 털어내는 백설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지.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백설향의 주사는 청소인 것 같다고.

백설향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청소라는 행위는 정파의 고상한 노인네들이 취미 삼아 가꾸는 분재와 다를 것이 없다.

손수 말끔하게 치워낸 빙궁을 보고 있노라면 그 뿌듯함과 성취감이 경지의 상승에 못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서럽게 우는 게 안쓰러워서 같이 술이나 마셔주던 서준은 새로 생긴 친구에게 무학의 편리함을 전파했다.

“이거 그렇게 할 필요 없이 허공섭물이랑 강기로 금방 끝낼 수 있는데?”

그리고 백설향이 포효했다.

“갈…!!”

“아니, 왜.”

“그딴 잡스러운 사도(邪道)는 인정할 수 없다!”

칠사흑문(七邪黑門)의 일원,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무릇 청소라 함은 내 손으로 더러운 것들을 하나하나 닦아낼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법!”

“어…, 그래. 화이팅.”

“이익…! 너도 한 번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서준이 백설향과 함께 빙궁 청소를 시작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먼지를 새하얀 걸레로 뽀득뽀득 닦아대던 서준은 문득 든 생각에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 하나를 가리켰다.

“근데 저건 어떡해?”

백윤의 시체는 놈의 혼을 가두는 과정에서 없어져버렸지만, 능월의 시체는 백설향에게 이번 일을 설명할 겸 빙궁까지 들고 왔었다.

“아차.”

그걸 본 백설향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끄응…. 멸신회라는 놈들이 금가로도 모자라 빙궁까지 노렸다는 말이지….”

너무 충격적인 사건 탓에 잊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자칫 잘못했으면 백설향이 살해당했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다.

“추방당한 뒤로 조용히 살고 있는 줄 알았건만, 이따위 짓을 벌일 줄이야.”

백설향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백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동문 살해와 인신공양.

백윤이 북해빙궁에서 추방당한 이유다.

놈은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연마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온갖 시도를 거듭했다.

인신공양이야 둘째치더라도 같은 빙궁의 식구를 쌍수라는 명목 아래 살해한 것이다.

백윤은 그 일을 은폐하려 했지만, 전대 궁주는 끝내 찾아낸 말라비틀어진 목내이 몇 구를 토대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본래대로라면 백윤은 그 무공이 폐해진 채 빙궁에서 추방당했을 터.

허나 그는 어떻게 낌새를 눈치챘는지 일찍이 빙궁을 빠져나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뭐…,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대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놈도 궁지에 몰렸겠지.”

백설향이 끌끌 혀를 찼다.

“허나 놈은 선을 넘었어. 같은 빙궁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그러며 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히려 네가 더욱 놈에게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내의 몸으로 빙백신공을 대성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공감?”

서준의 입꼬리가 삐딱하니 올라갔다.

“그런 병신이랑 얽히긴 싫은데.”

빙백신공을 대성하는 데 딱히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금가의 멸문에 일조한 버러지 새끼를 공감해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런 서준의 표정을 본 백설향이 흠칫 몸을 떨었다.

“미, 미안하다…. 그러고 보니 금가와 연이 있다 했었지….”

“미안할 것까지야.”

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만 으쓱였다. 친구가 생겨 들뜬 백설향의 기분을 아주 이해 못 하진 않았다.

흘낏….

정말로 서준의 기분이 딱히 상하지 않은 듯 보이자 백설향이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활짝 폈다.

“흠! 크흠!”

그녀는 일단 헛기침부터 몇 번 하고, 용기를 낸 김에 본론도 같이 꺼내들었다.

“그, 내일 떠난다 하지 않았느냐.”

“응.”

서준이 말하길, 금가의 멸문에 일조한 나머지 쓰레기 하나를 잡으러 간다 하였다.

백설향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친구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책에서 봤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붙잡지는 않을 테니, 혹…, 언제쯤 돌아올 지 알 수 있겠느냐…?”

기약 없는 기다림과 기약 있는 기다림은 그 무게가 다르다.

명확히 정해진 날짜가 있다면, 백설향은 그 시간이 얼마나 되건 하루마다 더해지는 기대감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매일을 영유할 수 있었다.

그런 태도가 눈에 훤히 보였기에 서준은 짠한 마음으로 답했다.

“일 보고 돌아갈 때 한 번쯤 들르지 않을까? 일 주도 안 걸릴 것 같은데.”

“그, 그렇군.”

백설향이 이제 와 근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오는 봄에 혼례를 치를 예정인데.”

“응?”

“너도 올래?”

“…내가? 그래도 되는 게냐?”

“아, 맞네.”

생각해보니 빙궁주가 안휘까지 오면 도중에 일이 좀 많이 생길 것 같다.

“그러면 내가 데리러 올게.”

“정파의 인사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에이, 괜찮아.”

가만히 안 있으면 뭘 어쩌려고.

게다가 십육명문의 수장들이 남의 친구 관계 가지고 꼽을 주진 않으리라 믿는다.

‘아니면 뭐….

재밌어지는 거지.

서준이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