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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드래건 왕가의 혈족은 타국의 왕가에 비하면 극단적으로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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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핏줄을 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자식을 보기가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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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의 왕족들이 못해도 수백에서 수천 명 가까운 친척과 방계가 있는 것과 반대로, 팬드래건의 혈족은 단 열 명밖에 없으니 얼마나 적은지 비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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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왕족의 기준이 엄격하기 때문에 혈족이 적은 것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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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머리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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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룡의 축북을 받았다는 증거였으며, 그 증거를 증명하지 않는 한 팬드래건은 팬드래건의 성을 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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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른 왕족은 모르겠으나 팬드래건은 결코 혼외 자식이 생길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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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토록 손이 귀한 팬드래건이다 보니, 왕가의 피는 항상 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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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선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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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명예를 생각하면 자결도 불가피하겠으나, 왕가의 피를 남겨야 하는 고결한 사명이 나에겐 있다. 왕족의 사명과 기사의 명예. 이 두 가지 추를 저울에 올렸을 때 어찌 왕가의 사명을 등한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난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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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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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죽이는 것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닌 바. 날 죽이지 마라,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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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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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먹으로 위협하는 것도 그만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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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 웃긴 새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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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구걸을 하는데도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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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밉기도 얄밉고, 말투도 분명 주먹을 부르는데 동시에 웃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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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고 싸가지가 없는데, 어딘지 밉지 않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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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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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칼 뽑은 놈을 봐줄 정도로 내가 호인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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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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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손버릇을 고쳤어야지. 내 여린 심장이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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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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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만 내민 채 땅에 파묻힌 왕자에게 나지막한 선고를 내렸고, 아렌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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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그의 제삿날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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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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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한테 시비 건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었거든. 거기다 뒤끝도 상당해서 이런 일은 익숙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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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 이들이 암살자를 안 보낸 게 신기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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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냈어. 단지 암살자는 다 죽었고. 보낸 놈들은 반신불수가 돼서 대소변도 못 가린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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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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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선배와는 절대로 적이 되지 말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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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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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면 변명처럼 들릴 수 있음을 알지만, 아렌은 그를 위협할 마음은 있어도 해할 마음은 일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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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저 평소처럼 누이 전하, …아, 아니 왕세녀 전하에게 빌붙으려는 기생충인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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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이한은 정당하게 초대를 받은 기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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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자였으니까. 좌천당한 주제에 얼마 가지 않아 학술원에서 명성을 얻다니…! 이토록 수상한 자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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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그것만으로 의심했다는 것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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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에 비하면 지극히 평화주의자이자 왕가에 대한 존경심도 있는 제이크였지만, 그런 그일지라도 변호해 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말은 타당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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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제이크의 얼굴을 확인한 아렌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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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상인을 설득하지 못하면 삽을 든 괴물이 그를 다시금 묻어버릴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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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물론 이것만 가지고 의심한 것은 아니다! 들은 얘기가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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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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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도한 자란 얘기였다. 힘없는 단원들은 업신여기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는 자라는, 그런 주제에 권력자들과 연을 틀려고 안달이 났다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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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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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있던 제이크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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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이 힘없는 단원을 업신여기고 마구잡이라고 폭행하며 권력자들에게 딸랑거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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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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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저런 짓을 하는 건 백은사자의 흔해빠진 귀족 영식들이었지, 이한과는 전혀 무관한 얘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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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기를 한 이들이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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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다, 어찌 기사된 자가 동료의 이름을 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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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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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의 시선은 슬쩍 돌아갔고, 거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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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 대만 더 때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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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시죠,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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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시선을 머금은 맹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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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래도 입을 다무실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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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말할 수 없다 했지 않느냐! 어찌 베이커 경과 리먼 경의 이름을 팔 수 있을까! 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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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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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은 무겁다! 가먼드 경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는 것을 어찌 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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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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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왕족에 대한 존경심이 절반가량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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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게 낫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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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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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긴 오래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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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는 없을지언정 생존본능은 비굴할 정도로 많은 그가 장수할 상이다 싶은 제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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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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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기사단 유일한 친구의 설명에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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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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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잘못 들은 게 아니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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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1기사단이 널 정적(政敵)으로 규정한 것 같아. 즉, 넌 왕당파에게 정치적 숙적으로 낙인찍힌 거야. 그리고 왕자, 아니 제1기사단장님은…, 그냥 이용당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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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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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왕족이지, 거기다 대형 낙하산이고. 아마 저분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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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본능은 좋은데, 눈치는 더럽게 없는 놈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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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공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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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의 신분과 뛰어난 외모. 거기다 기사가 될 정도의 재능도 있으나 아쉽게도 눈치와 정치 감각이란 걸 왕자에게 뺏어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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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저토록 쉽게 이용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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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경우는 그냥 귀가 얇고 다혈질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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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됐건 단명할 팔자임은 분명한데, 묘하게 생존본능에는 충실한지라 위기는 맞아도 오래 살 것 같은 놈이 아닐 수 없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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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밌는 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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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이제 너무 멍청해서 화도 안 난다며 왕자에 대한 신경을 껐고, 대신 아까부터 드는 의문을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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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정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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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이 그를 정적으로 지정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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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이한은 현실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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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말 그들을 건드린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왜 갑자기 정치적 숙적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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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문에 제이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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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무 눈에 띄어서겠지. 그러게 활약을 작작 좀 할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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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너무 나댔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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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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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달리 눈치란 것이 있는 이한이었고, 단번에 친구의 말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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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말은 이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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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사자, 아니 궁전의 귀족들은 이한을 경계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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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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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활약했고, 지나치게 잘나가는 중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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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왕세녀 전하의 부름이 결정타였겠지만, 아마 그 전부터 너를 노리는 세력들이 많았을 거고, 이번 기회에 찔러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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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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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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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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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공을 쌓는 일이 있어도 다 숨기고 다른 놈들에게 넘겼으며, 정말 조용하게 기사 생활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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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제 와서 공 좀 쌓았다고 정적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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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딴 놀 같은 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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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아무것도 안 해서 문제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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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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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너도 백은사자에 있는 이상 결정했어야 한다는 거야. 왕당파를 지지할지, 아니면 귀족파를 지지할지. 둘 중 하나를 결정했어야 했는데, 넌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잖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밉보일 만한데, 넌 실력마저 출중해. 즉, 모난 돌이 드디어 정을 맞는 날이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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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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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진짜 염병할 일이지. 하지만 어쩌겠어,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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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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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고, 이한은 눈이 절로 찌푸려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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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찍히다니… 뭐 이런 머저리 같은 논리가 다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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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선 기사들을 다 찾아가 두들겨 패고 싶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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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 싸우는 건 그다지 득이 아니야. 오히려 저놈들은 자기들한테 시비를 걸어주길 원할걸? 네 이미지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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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참으라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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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한 것은 알겠지만, 기껏 얻은 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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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런 상황에서 그가 기사단과 싸우면 명성은 악명으로 치환될 우려가 있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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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악명이 나지 않길 바라는 선의를 보이는 그였고, 부디 그가 현명한 선택을 내기릴 바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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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생겨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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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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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랑 리먼이라고 했나? 일단 그 새끼들부터 조지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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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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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는 그제야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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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제 이미지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는 놈이고, 상대의 신분과 관계없이 자길 공격한 이들 모두를 전신불구로 만들 짐승 같은 놈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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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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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겠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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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 명이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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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요,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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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녀 전하라고 불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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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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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이 설명을 너에게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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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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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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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스는 예전부터 레이라 윈터에게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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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에겐 아무런 음흉함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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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그녀 입장에선 음흉하고 속내를 숨긴 자들이 상대하기 편하지, 레이라 윈터처럼 속내가 투명하고 순박한 이들을 상대하는 게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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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약점 아닌 약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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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시녀에 불과한 여인의 말실수에도 그녀는 딱히 화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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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나름 친절하게 굴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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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아이시스의 유일한 천적이란 게 있다면 눈앞에 있는 땋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순박한 시녀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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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궁금하여 날 불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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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다른 게 아니라요…. 아, 뭐를 물어보려고 그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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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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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방금 전 보고 온 건데, 기사님이 왕녀님 동생 분 끌고 가시던데, 그거 괜찮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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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그렇군, 그 우둔한 것을 지칭하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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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동생을 이토록 까먹느냐고 할 수 있으나, 그녀가 기억하는 건 우수한 인재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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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테까지 신경을 기울일 정도로 그녀는 한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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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말하자면 우수한 형제들의 경우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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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에 목이 잘리거나, 유폐당한 이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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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그녀의 관심을 사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바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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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가 우둔한 광대를 데리고 갔다면 이유가 있겠지. 아무렴, 광대답게 이용당한 것일지도 모르겠지.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것도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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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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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여는 네가 조금만 더 똑똑하길 바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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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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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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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이 천리안이라도 가지고 있나 의심할 정도의 통찰력답게, 그녀는 단번에 진실에 가까운 추측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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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사단이 광대를 부추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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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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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위상이 바닥을 기고 있으니, 계승권도 없으며 사실상 쓸모도 없는 8왕자쯤은 갖고 놀 수 있다 판단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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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얀 것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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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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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옥, 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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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옥수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고운 손가락이 찻잔을 두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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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눈에는 천사나 요정이 고민에 빠진 것만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을 테지만, 저러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온하기 그지없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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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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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생각해보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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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녀가 나설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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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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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 의동생은 참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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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大虎)가 어찌 비루한 개들의 건방짐을 참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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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스는 자신의 의동생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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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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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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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전하! 베, 베르헨이옵니다! 다, 다급히 전할 소식이 있어 알현을 청하건대, 부디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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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라. 시종장은 무슨 일이기에 이 야심한 시각에 본녀의 방을 찾아온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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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죄송합니다, 전하. 다, 다름이 아니오라…. 기, 기사 이한이 현재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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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동이 아니라 대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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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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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그녀의 말을 되묻는 불경한 짓을 한 시종장이었지만, 아이시스는 오늘만큼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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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기 짝이 없는 궁전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가뭄의 단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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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유해지기로 한 그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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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사들의’ ‘정당한’ ‘대련’으로 인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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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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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생활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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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굴과 같은 왕궁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바였으며, 시종장은 왕세녀께서 이 문제를 ‘덮어라’ 명령하였음을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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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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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흠, 저, 정당한 대련으로 인해 ‘약간의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나, 크,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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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은 어떻게든 이 일을 ‘사건’이 아니라 ‘대련’으로 바꿔야 함을 깨달으며 손을 떨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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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야근은 확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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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스는 시종장의 현명한 답변에 만족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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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군. 해서, 부상자는 얼마나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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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사단의 경우 예순 셋. 제2기사단의 경우 일흔 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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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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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리려다가 도리어 뒤섞였다고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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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총 135명인가, 후후, 그거 참 과격한 대련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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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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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넘길 일이 아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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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기사 한 명으로 인해 백은사자 기사단 300명 중 135명의 인원이 뭉개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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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외부로 알려졌다간 커다란 사달이 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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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의 마음은 타들어갔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흐뭇한 기색이 역력하니 시종장으로선 초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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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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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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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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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 그녀의 부름에 시종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기대를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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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특하시기 그지없는 왕재를 지닌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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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러한 사달을 해결할 묘책을 주실 것이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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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 그런 흥미로운 일이 있다면 여를 빠르게 부르도록. 모처럼 구경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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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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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이리 없어서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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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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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시종장 베르헨은 돌연 은퇴가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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