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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유독 강렬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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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기운이 강성해지는 계절이 사뿐히 찾아왔음을 증명하는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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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대륙은 대개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시원한 기후가 특성이지만. 유독 팬드래건이 속한 영역만큼은 더위가 무성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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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드래건 영역 근처에 자리 잡은 ‘영산 불칸’이 품은 불의 기운이 여름만 되면 기승을 부려 여름의 날씨가 여타의 곳보다 무더워진다는 것이 학자들의 추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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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력과 신비, 요정의 장난 등이 공존하는 대륙에선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기도 하여 이상기후에도 이상함을 느끼는 이들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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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동부 대륙처럼 마법에 실패하여 반년 동안 비가 내리는, ‘대우기(大雨期)’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거나, 중앙 대륙처럼 요정들에게 분노를 사서 1년 내내 ‘대폭설’에 시달리는 것만 아니라면, 도리어 이렇게 더위만 기승을 부리는 게 팬드래건 입장에서도 행운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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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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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교란 이름을 쓰지만, 아실 분은 아실 겁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불칸을 비롯한 요정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할 예정인 것을, 이처럼 우리 인류만이 대륙에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무수한 종족과 자연 등과 함께 이 대륙에서 공존하는 무수한 집단 중 하나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만한 제국처럼 자신들이 대륙의 주인인 것마냥 행동해선 안 된다는 뜻이며,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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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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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조차 감사함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요약하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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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언제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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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들리면 어쩌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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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탈수증으로 쓰러질 것 같아서 그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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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차라리 쓰러지는 게 좋지 않을까? 회복실로 이동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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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너…! …천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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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의 일장연설을 듣는 생도들은 지루함을 넘어 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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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에 모여 있긴 했지만, 수백 명 인원이 빽빽하게 모여 있으니 강당조차 더운 건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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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런 무더운 환경에서 무려 한 시간 넘게 똑같은 대사를 반복해서 듣고 있으려니, 생도들의 표정이 아찔해지는 것도 당연한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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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렇다고 해서 학장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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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군신의 시대에서 명재상 소리 듣던 전직 재상을 상대로 대꾸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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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정신이 회까닥 하는 생도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뜻은 아니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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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영애님, 학장님을 좀 말릴 수 없나요? 영애의 조부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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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할아버님께서 연설을 시작하면 친족조차 막을 수 없답니다. 막으려면 못해도 할아버님의 친우 분 정도가 갑작스레 방문하셔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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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우 분이 누구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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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트리스탄의 전 가주님이나, 아니면 현왕 전하, …혹은 펠리시아 공 같은 분들이 얼마 없는 친우 분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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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연설을 끝까지 듣는 게 현명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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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이들이 오면 더욱 큰 재난이 아닐 수 없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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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귀족 영애는 깨갱하며 그대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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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진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며 카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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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가면을 쓴 듯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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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회색 더벅머리 소년을 대할 때완 달리 유독 생기가 적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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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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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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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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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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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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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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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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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부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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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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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라고 부르면 반응이 없고, 이름으로 부르니 반응하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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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외모가 꿀린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던 카린이었지만, 눈앞의 소녀와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조금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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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신비종족 중 그 아름다움으로 손꼽히는 인어와 조인, 그리고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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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요정을 닮은 듯한 신비한 푸른 보석안과 금으로 세공한 금실의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같은 여성조차 매혹시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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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윈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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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대, 아니 시대를 대표할 마법사가 되리라 확신 받는 마법사이자, 갈라하드 공작의 수양딸로도 잘 알려진 학술원 최고의 유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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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은 감히 그런 소녀의 옆에 앉거나 근처에 있지 못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카린이 옆에 앉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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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다른 곳에 앉았어야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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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방금 전부터 한숨을 푹푹 쉬셔서 무슨 일인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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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우울한 티를 내고 있으니, 말을 안 걸 수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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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한숨을 내쉬는 아이린이었고, 카린은 그런 그녀에게 어쩔 수 없이 말을 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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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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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저도 티내고 싶지 않은데, 그냥 좀 마음이 쓰이는 일이 있어, 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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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그거 힘들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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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죠, …어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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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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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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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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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애 성격이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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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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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는 생긴 거랑 달리 귀찮은 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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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말을 건 것은 잘못된 선택지였음이 분명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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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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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귀여운 회색빛 강아지와 같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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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풋풋한 반응을 즐기면 즐겼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소녀의 상담사 노릇을 하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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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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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카린 영애님, 많이 더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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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아…. 아무래도 좀 덥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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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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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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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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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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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시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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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정말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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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물빛 마력이 그녀를 한 번 휩쓸었고, 카린은 더할 나위 없는 상쾌함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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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은 물론이요 먼지나 더러운 노폐물조차 단번에 씻겨나갔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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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도 그 상쾌함과 시원함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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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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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봬도 제가 물과 바람의 마법사잖아요. 이 정도는 간단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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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거 정말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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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이제 좀 진심으로 소녀를 어화둥둥 해주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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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예쁜 짓을 하면 호감도가 오르는 게 사람의 심리란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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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 알렌시아 드 귀네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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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녀는 이 귀찮은 소녀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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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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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의 고민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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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감, 너무 옅어진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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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의 유무라고 할까, 호감 가는 남성과 대화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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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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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약이 줄어들긴 했지. 영화나 드라마로 치면 딱 한 번 활약하고 하차하는 까메오 느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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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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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유령 소녀의 촌철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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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은 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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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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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내가 너무 속 좁아 보이잖아. 레비가 무사한 건 다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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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 윈들러를 더욱 주눅 들게 하며,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원흉이 있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고, 이대로 속상해 하면 너무 자신이 나쁜 년이 되는 것 같아 차마 앓는 티조차 제대로 못 낸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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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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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원으로 무사히 복귀한 친구, 그리고 그 소녀의 존재가 최근 아이린의 존재감을 위협하며 우울하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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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무 속이 좁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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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이제야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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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 편을 들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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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예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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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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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서러운 아이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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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레비가 무사히 학술원에 복귀한 것은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모두가 소녀의 복귀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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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순이, 이제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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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히 돌아와 다행입니다.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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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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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과 안도, 또한 충고가 곁들여진 잔소리가 한동안 소녀에게 이어졌으나, 레비는 그 모든 잔소리를 해맑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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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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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며칠 동안 보지 못했을 뿐인데 훨씬 더 성숙해진 소녀였고, 동기들은 그저 레비가 한동안 고생이 많아 성숙해진 것이라고 판단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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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정을 묻는 이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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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교관님이 활약해주셨으리라 짐작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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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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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 교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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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 붕대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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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롤 백 마리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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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은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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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남다른 무력을 아는 생도들로선 경악성마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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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이 저토록 다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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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봉인된 고대의 마물이 부활한 게 아닐까 싶은 공포마저 들었다면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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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들의 걱정과 공포가 무색하게도, 교관은 무덤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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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어른들은 애들이 모르는 여러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많이 묻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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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일축하며 평소처럼 잔소리를 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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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지금 할 예시론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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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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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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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고, 모두 잘 알아둬라. 곰순이는 자퇴서인지 뭔지도 낸 적이 없으며. 잠시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와 무단결석을 했을 뿐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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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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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어서 빠르게 찾아오거나 늦게 찾아올 수도 있는 거야. 곰순이한텐 그 시기가 좀 늦게 찾아왔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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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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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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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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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레비의 탈주기는 얼렁뚱땅 끝이 났으나, 여전히 의문인 구석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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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관은 저토록 상처를 많이 입고 온 것이며, 레비 폴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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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앞으로 폴트란 성으로 안 부르셔도 돼요. …성은 버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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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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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을, 가문을 버리게 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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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풀리지 않은 의문은 많았으나, 생도들은 의문을 접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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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중요한 건 소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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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큰 신경은 쓰지 않기로 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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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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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교관님. 혹시 아카데미 조교 신청은 어디서 하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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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을 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그녀를 마주하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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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폴…, 아니 레비가 조교 과정을 밟으려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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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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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리비 영애! 왜 사서 이 불바다에 들어오시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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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폴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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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의 조교(노예)인 그는 처음 입학식 때, 잘 차려입은 도련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구울과 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초췌한 인상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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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모든 조교가 저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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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모든 일을 다 맡겨버리는 이한으로 인해 유난히 고생 중인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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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레비가 조교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그의 조교로 들어오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고, 데미안 폴렛은 말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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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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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그 앞은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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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말이 절로 나올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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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해맑게 조교 신청서를 내고, 빠르게 조교에 합류하게 된 소녀였으며, 모두가 아연실색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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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할 만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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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조교 일이 너무 쉬워 오히려 눈을 끔뻑거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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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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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 엄살을 부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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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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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조교가 2인이 됐다 한들, 중노동인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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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소녀의 감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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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9년 동안 진정으로 고난과 역경, 괴로움이 사무치는 나날을 보냈던 소녀에게 있어 이러한 일들은 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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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너무 쉬워서 놀랐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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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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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냥 쉽고도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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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듣길, 데미안 폴렛이 소녀를 두려워하며 존경하게 된 계기라 하였고. 소녀는 눈 깜짝할 새 일에 적응해가며 새로운 모습을 연신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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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더 열심히 수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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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더 생도들과 친근하면서도 부드럽게 대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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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더 최선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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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부님, 이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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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부님, 피곤하시진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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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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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듯하게, 아니 지극정성으로 교관을 모시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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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과감해진 듯하면서도, 밝아진 소녀를 보고 있자니 무성한 초목의 싱그러움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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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소녀의 얼굴에는 어두움조차 보이지 않은 해맑은 생기만이 가득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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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생도들은 새삼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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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소녀에게, 아니 교관과 소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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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습을 보던 아이린 윈들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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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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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의 시선에서 순수하다 못해 지고지순한 애정(愛情)의 흔적을 발견하며 그만 바보 같은 표정마저 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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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지고지순한 애정이 향하는 방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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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린아, 시녀님 급 강적이 생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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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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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직한 기사를 향하고 있는 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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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린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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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그래도 골드 리트리버의 사랑스러움과 요정과 같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시녀란 강적이 있는데, 왜 하필 저런 강적이 또 나타난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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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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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즉, 친구가 연적이 된 탓에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란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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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아니 그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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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니긴요. 딱 봐도 그런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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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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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호오.”
|
||
|
||
이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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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각보다 더 재밌는 상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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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그저 심심풀이로 얘기를 들었을 뿐인데, 이게 듣다 보니 상당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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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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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렴, 벌써 한 시간 동안 똑같은 얘기만 떠드는 할아버님, 아니 학장님에 비하면 훨씬 더 재밌고 마음 풋풋한 소녀의 사랑 얘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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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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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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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흠, 제법이네요,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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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 흥미로우면서도 상대에 대한 감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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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학술원 최고의 미인과 더불어 학술원 남성들의 첫사랑이라 불리는 레비 영애의 사랑마저 독차지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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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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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 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여심을 잡을 줄 아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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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모의 대상이 누구인지 발설하지 않은 아이린에 의해 묘한 오해가 생긴 카린이었고. 카린은 북부의 사자에게 새삼스레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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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림체가 남다른 어느 기사가 그 대상이라곤 차마 떠올리지 못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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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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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기사는 종업식을 빠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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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막나가는 그라 할지언정, 종업식을 빠지면 또 다시 학장에게 불려갈 우려가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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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 금방 만나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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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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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찬스 덕에 불려갈 우려는 없을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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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니미아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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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이한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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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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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복수라도 하러 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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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허, 어울리지도 않은 존대는 그만두게. 영 낯간지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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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나야 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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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방지긴, 허허! 근데 이상하게 듣기 좋구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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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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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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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스리슬쩍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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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근한 척 다가오는 후작을 보고 있자니, 괜히 뻘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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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에는 사자 못지않게 용맹하기 그지없더니, 지금은 또 얌전하기 그지없군, 흘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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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래도 경우를 아는 놈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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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를 아는 자가 그토록 내 기사들을 다 두들겨 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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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놈들 없으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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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은 얄밉기 그지없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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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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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조차 마음에 드는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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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이한이란 기사가 마음에 든 후작은 그의 행동이나 언행이 어떠하건 트집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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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자의 오만은 꼴불견이지만, 실력 있는 강자의 오만은 자신감이 맞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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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후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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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니 하는 건 그다지 관심 없네. 아, 우리 기사단은 모르겠군, 다친 몸을 이끌고 벌써부터 수련하는 녀석들이 많아서 말일세. 아마 다음엔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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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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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마음에 드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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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는 게 아니라, 설욕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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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확실히 기쁜 소식이 맞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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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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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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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마아 후작의 입에서 다음으로 나오는 발언에 의해 이한은 벌렸던 거리를 확 줄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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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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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나 자네나 말이 긴 건 취향이 아니지 않나? 하여 결론만 말하지. 나에게 시집오기로 한 여아 말이야. ─그냥 내 딸로 삼기로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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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중간과정이 빠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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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든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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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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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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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후작에게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내고야 마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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