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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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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가 등을 돌리며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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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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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 그녀가 옷을 벗은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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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녀의 등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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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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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이라, 요즘 귀족 영애들은 과격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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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그런 게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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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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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헛기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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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신호였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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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각인이에요. 그것도 좀 지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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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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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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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말이죠, 사부님. 부모가 없어요. 말 그대로, 고아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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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었고, 이한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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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옷은 벗고 난리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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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다. 사부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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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놈의 우등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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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이라고 생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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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는 오늘 유독 말을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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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이토록 타인 앞에서 망설임이나 떨림 없이 말을 잘 하던 경우는 처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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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주눅이 들어 있던 그녀지만,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그를 상대로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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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레비는 더욱 거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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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노예에요. 약 5년 전 폴트 가로 팔려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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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자 비밀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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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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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없이 고요한 시선으로 자신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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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가 노예인 게 무슨 상관인가 싶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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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레비를 ‘노예’로 보는 게 아니라, ‘제자’이자 한 명의 ‘소녀’로만 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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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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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정말이지, 저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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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한 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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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같았으면 대경실색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텐데, …나에겐 정말 과분할 정도로 좋은 스승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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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는 다시금 울컥하려는 것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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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건 지금껏 숨겨왔던 모든 걸 밝히고 울어도 늦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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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드래건 출신이 아니라, 브리튼 출신이에요. 뭐 출신이라고 해도 노예에게 출신성분이 뭐가 중요한가 싶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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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원래부터 전쟁 고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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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은 오래 전부터 제국을 비롯한 팬드래건에게도 시비를 걸며 무수한 전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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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인지 브리튼에서 전쟁고아란 시궁쥐보다 흔한 것이었으며, 레비 또한 어느 순간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된 케이스라 보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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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레비는 ‘노예 상단’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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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상단이란 것이 대부분 금지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노예 상단이 여전히 존재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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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딱히 레비가 납치당하여 노예가 되는 것조차 그다지 특별히 불행하거나 가혹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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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없고, 힘도 없는 아이의 삶이란 대부분 이러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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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 고아치고 미색이 고왔고, 머리색조차 귀족들처럼 희소한 색을 가지고 있었죠. 덕분에 ‘최상품’으로 분류가 되었고, 전 상당한 교육을 받았어요. 고급 노예를 원하는 이들은, 상당히…. 아니 넘쳐난다는 게 당시 상인의 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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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르겠으나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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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쁜 여인은 ‘수요’가 있다는 노예 상인의 말이었고, 노예 상인은 그녀에게 글 쓰는 법을 비롯하여 귀족들의 예절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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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대한 소질은 나쁘지 않았고, 머리가 영특하단 사실마저 알게 되자 노예 상인은 더욱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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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비싸게 팔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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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노예 상인이 자신에게 말버릇처럼 한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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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쁘지 않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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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가 고급 노예로 교육 받던 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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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드래건과 브리튼이 전쟁이 나기 시작했고, 노예 상인은 재수없게 전쟁에 휘말려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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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노예 상인에겐 불행이겠지만 그녀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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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갈 기회를 얻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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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필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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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죠, 설마 고급 노예이기에 문제가 생길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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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의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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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등 뒤에 새겨진 노예 각인의 정체였고, 노예 상인이 위법 마법사를 찾아가 그녀에게 직접 새긴 각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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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인은 일종의 주술과 같은 것이었고, 웬만한 수단으론 절대 지울 수 없는 악몽과 같은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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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노예가 도망칠 수 없도록 노예 상인 나름 노력한 결과물이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시금 노예 상인의 조직을 흡수한 어느 상인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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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상인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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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드래건에 팔아넘겼어요. 전쟁 중이었으니 돈으로 환전할 수 있는 건 다 팔아버린 거지요. 저 또한 싼값에 팔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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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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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그녀의 몸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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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가 팔린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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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트 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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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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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너를 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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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빌린 게 아닐까 싶어요. 예측이지만 투자의 개념이었겠지요, 그 남자는 아마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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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되팔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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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오늘부터 우리의 딸이다. 레비 폴트, 이 이름을 주도록 하마.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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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려온 그날, 폴트 가는 그녀에게 이름과 성을 주고 자신들의 가족으로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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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에 불과한 자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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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레비는 감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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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드디어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동화 속에 나오는 기적적인 행운이 저에게도 찾아왔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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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말이지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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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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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왜 이렇게 성장이 느린 거냐! 제발 빨리 좀 크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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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놀 폴트가 노예를 딸로 삼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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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아먹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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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귀족, 혹은 돈 많은 상단에게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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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자신을 보고 투자 가치를 느꼈기에 구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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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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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문은 정말이지 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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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기사 가문으로서 재기할 것을 꿈꾸며, 후계자가 될 딸만큼은 귀하게 키우되, 시집을 보낼…. 돈을 뽑아낼 ‘제물’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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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다른 방식으로, 혹은 노력하여 재기하려고 하지 않는 답도 없는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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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망령(亡靈)의 일족이 아닐 수 없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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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는 저들의 광기를, 무능을 마주하며 도망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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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론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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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느 정도 기회를 엿보며 도망갈 기회를, 혹은 신고를 넣을 기회를 엿봤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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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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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 복종의 각인으로 인하여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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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종속되어 있는 존재였으며,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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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받은 명령은 크게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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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자신이 노예임을 타인에 발설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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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폴트 가의 피해가 가는 행위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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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폴트 가의 사람에게 순종적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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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명령이 그녀에게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기에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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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역겨워도, 그들에게 순종적으로 굴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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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그를 희롱하였던 길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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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드원이 어머니와 동생을 걸고 협박했을 때, 갑작스레 협조적으로 변한 이유조차 미운 정이 들거나, 혹은 그들 모녀가 자신에게 잘 대해줘서 그런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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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녀에게도 순종적이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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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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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인생에 자유란 건 존재하지 않았고, 억압되고도 끔찍한 인생만이 항상 그녀의 곁에 붙어 다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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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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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그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가족이란 게 생긴 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말이…, 죠. 정말,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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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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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이 맹목적이라 표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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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노력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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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통해, 정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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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빛낼 만한 업적을 세우고, 성과를 내다보면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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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족으로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정말 철부지 소녀 같은 ‘환상’을 꿈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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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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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저 정말, 어리석고 멍청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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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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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저의 어리석음에 질려 표정이 굳었으리라 여기며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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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나올 답을 듣는 것조차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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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너무 대견해서, …고생했다고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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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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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구나, 정말…. 고생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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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변치 않은 다정한 시선을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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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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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대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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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든 시간을 이겨낸 그녀가 기특하단 마음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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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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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는 잠시 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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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그동안 자신의 비밀을 밝히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자신을 혹 경멸하지 않을까 항상 초조했던 삶만 살았던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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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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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고, 레비는 온몸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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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아저씨가 안아주는 게 좋지도 않을 테지만, 헛소리로 생각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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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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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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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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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울어라. 품 정도는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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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윽! 허어어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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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게 우는 거지. 그래야 속이 풀리는 거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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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는 있는 힘껏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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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며 동시에 그가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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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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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필요할 때, 그토록 필요할 때 왜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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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고도 고단했던 19년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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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난,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줄 줄 아는 ‘가족’을 마주하며 레비는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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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과 달리, 마냥 조용하지 않은 큰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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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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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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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그런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거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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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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