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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드래건과 전쟁을 치른 적국들 중 트리스탄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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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백 인의 기사로 구성된 적혈수리 때문에 트리스탄을 기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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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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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넘게 이어져온 전통 있는 가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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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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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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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할! 뭐 저런 끔찍한 활잡이가 다 있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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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의 궁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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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궁이나 신궁이라고 불리며, 때론 [마탄의 저격수]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역대 가주들이 전장의 설 때마다 그들은 항상 기사단조차 압도하는 무훈을 쌓아 올리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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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의 지휘관은 항상 트리스탄의 화살에 의해 죽었고, 절대로 그들의 화살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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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방어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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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를 대동하며 방패를 들고 다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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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멀리 도망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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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노력을 했지만, 트리스탄의 화살은 그 모든 것을 농락하며 기어이 지휘관을 비롯한 적장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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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누군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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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의 가주들은 모두 [신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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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투기법을 익힌다 한들, 신비도 없이 절대 저런 신기(神技)와 같은 궁술을 선보이는 게 말이 안 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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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트리스탄의 역대 가주들은 조소를 머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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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라, 흐음…. 딱히 없어도 가능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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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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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수련을 통해 저 멀리서 풀잎 떨어지는 소리마저 잡아낼 오감을 키우고. 하루에도 수천 발, 수만 발이 넘는 화살을 쏘며 노력한다면 누구나 명사수가 될 수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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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노력’과 ‘약간의 재능’만 있다면 [신비]와 같은 재주를 누구나 익힐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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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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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줘도 해내는 놈들이 없을 뿐이라서, 내 말을 안 믿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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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만을 내뱉었거늘, 믿어주는 사람이 없어 아쉬울 뿐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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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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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것은 대체 어찌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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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의 활을 상대했던 적들이 항상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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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미아는 자신이 쏘아낸 ‘탄환’을 신묘, …아니, 기괴한 수단으로 막아낸 기사를 보며 눈을 끔뻑거렸고,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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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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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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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으로 안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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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로, 정확히는 입의 힘으로 제니미아의 일격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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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합력(咬合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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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무는 힘만으로 정확히 탄환을 잡아낸 그의 모습을 확인하며 놀라고야 마는 제니미아였고,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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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으로 안 되는 게 아니라, 노력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것뿐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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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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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이 타인에게 하던 말을 상대에게 듣고 있자니,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끼는 제니미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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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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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씨. 진짜 겨우 잡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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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몸이 욱신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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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앞에선 배짱을 부렸지만, 사실 이한은 절대 저 탄환을 이로 막아낼 마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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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회피하거나 손도끼로 막아낼 생각이었는데, 피하거나 튕겨낼 타이밍을 놓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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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음궁시(無音弓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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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으며, 그저 쏘아지는 과정만이 존재할 뿐인 화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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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위기감지 능력으로 운 좋게 막아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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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내지 못했더라면 아주 처참한 끝을 맞이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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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네, 이거…. 이 나라는 왜 대귀족들이 다 괴물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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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만난 대공이나 공작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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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귀족 놈들이 기사들보다 더 끔찍하고, 상대하다가 자칫 골로 가버릴 상대뿐이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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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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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등을 적셔오는 식은땀을 식힐 새도 없이 강제로라도 긴장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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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게 근육이 조금이라도 경직되어 있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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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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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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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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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피할 새도 없이 맞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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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의 탄환이 다시금 그를 향해 격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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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피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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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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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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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입으로 막는 재주가 여간 신기했던 것인지 쉴 틈도 없이 활시위를 당겼고, 그때마다 눈으로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격발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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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눈보다 빠르다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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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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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 연발 속도가 거의 총의 장전 속도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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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거대한 각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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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한 각궁을 무슨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을 보면 장력(張力)에서만큼은 자신 못지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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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저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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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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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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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맞혔군. 한데 몸 단련을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웬만해선 뼈도 부러트리는데, …나도 늙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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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정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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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을 가까스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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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금강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필시 살갗이 찢어지거나 뼈에 금이 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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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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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긍정적인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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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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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에 가까운, 아니 신비나 마법에 뒤지지 않는 궁술을 그는 회피하고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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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발의 연격을 겪으며 그는 어느 순간부터 막거나 피하고, 혹은 튕겨내는 게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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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슬슬 반응속도가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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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제 후작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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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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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군, 분명 온몸이 너덜너덜하거늘.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감각과 신기한 기술을 통해 내 기술에 반응하고 있다니, 이 나이 즈음 되면 웬만한 신비나 기술도 다 보았다 자부하는데, 아무래도 나도 애송이었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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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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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반격이 아닌 뒤로 물러서며 숨을 몰아쉴 시간을 가지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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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르겠지만, 더 다가갔다간 그의 숨통이 끊겼으리란 확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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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좋군. 그래, 이런 잔재주를 이긴 것 가지고 기뻐하면 안 될 노릇이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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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잔재주 이제 얼마나 남았는지 좀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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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잔재주는 이 정도뿐이네. 하니, 이제 좀 진지하게 가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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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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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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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류가, 아니 주변의 모든 흐름이 후작에게 집약하듯 모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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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바람이 빨려들어 가듯 한 점으로 모이며 자그마한 태풍의 눈을 형성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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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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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자칫 자신마저 빨려 들어갈까 싶어 있는 힘껏 땅에 발을 박으며 후작이 내뿜는 와류의 흐름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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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이게 사람 새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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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할 말은 아니란 자각은 있지만, 저 인간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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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引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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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은 지금 저 자그마한 몸으로 인력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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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인간이 보일만한 재주가 아니었으며, 이게 마법이나 신비가 아니란 사실이 도리어 더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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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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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양반, 딱 한 걸음이 부족한 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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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사람의 형상을 한 재앙 [오러 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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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지 앞까지 다가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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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걸음이 부족하기에, 어떠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못했기에 올라서지 못했을 뿐, 후작은 초인의 경지를 앞둔 사람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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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한은 헛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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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온몸이 너덜너덜한 상태이며, 체력도 언제 한계를 맞이할지 모를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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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정상이어도 이길지 말지 가늠이 안 가는 상대인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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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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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것에 덤빈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와 다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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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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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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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내가 이 기술을 꺼냈을 때 반응은 둘 중 하나더군. 하나는 공포에 미쳐 살려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도망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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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것들이네. 나도 지금 딱 도망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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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런 사람이 도망가지 않고 내 앞에 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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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후회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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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자신에게 스며드는 절망감을 발을 구르는 것으로 단숨에 털어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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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은 눈을 빛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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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의 눈 안에서 감도는 전의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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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인정해도 된다. 강자 앞에서 겁을 먹은 것은,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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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내 삶의 지론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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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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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하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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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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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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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아니면 그의 얘기 정도는 가볍게 듣고 흘려버릴 50년 묵은 노괴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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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속에 쌓여 있던, 진솔함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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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미 변명뿐인 삶을 살았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이게 현실이니 포기만 하고 살았다. 항상 변명만 하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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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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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런 못난 놈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고, 더는 변명하지 않는 삶을 살자고 약속했다. 이제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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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당장 기사단도 그만두고 은퇴하고 싶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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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하여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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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건 명예건, 그리고 기사조차 그에겐 큰 의미가 없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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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바보 같다 할지라도 전생과 다른 좋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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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렇다고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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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게, 변명하면서 사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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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거지, 비겁한 삶을 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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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전생을 반복할 거면 환생이란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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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고개 숙이며, 내 사람의 불행을 방관하며 속 답답한 삶을 살고 싶어 힘을 기른 게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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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있는 힘껏 소리치며 자신의 각오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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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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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비겁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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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는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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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 싸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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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산 트롤과 싸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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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후작가와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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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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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빌어먹게 멋지게 살다 갈 거다. 일말의 후회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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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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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매화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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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든 유일한 손도끼에서 피어난 매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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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매화(血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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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세가, 그가 흘리는 피를 제물 삼아 피어낸 매화의 꽃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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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만개(梅花滿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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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의 꽃잎은 후작가의 하늘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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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군, 참으로 강해! 이렇게 강한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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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미아는 제 생애서 이토록 타인을 찬사한 것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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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매화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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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뱉은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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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각오는 충분히 찬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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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진정으로 저리, 하루를 평생처럼 사는 사람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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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왕’조차 저렇게 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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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이다. 이 한 발을 막아낸다면 내 패배를 인정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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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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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는 게 아니야. 원래 궁수는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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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로 승부를 보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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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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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후작이 활시위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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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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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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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온몸을 찢어발기려는 듯한 후작의 일격에 침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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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소리마저 삼키는 거대한 압력이 덮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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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뚫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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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마치, 거인에게 짓눌려지는 벌레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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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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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피워내며 체력은 이미 다 떨어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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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흐릿했으며, 금방이라도 의식이 꺼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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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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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제 죽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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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죽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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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는 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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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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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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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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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게 돌아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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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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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박한 시녀님은 자신이 올때까지 그 자리에서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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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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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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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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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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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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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이 기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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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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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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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허리는 약간 굽히며 왼쪽 발을 앞으로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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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보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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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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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비슷하지만, 지금 지금 사용할 권법의 굳이 예시를 찾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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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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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결을 읽어내면 누구나 간단히 할 수 있는 수법이다. 주문쟁이 녀석들이 즐겨 쓰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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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처음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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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武)의 세계에는 끝이 없는 법. 노력하다 보면 주문쟁이들 수법쯤은 간단히 할 수 있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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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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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
||
|
||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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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울리지도 않게 교관으로 부임하기 전, 그 양반과 대련을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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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결을 보고 그걸 베어내는 묘기를 선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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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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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그다지 큰 힘은 별로 필요 없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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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힘은 필요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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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양반은 무척이나 가벼운 손놀림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가 펼친 전심전력의 몸통박치기마저 손쉽게 튕겨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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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지금, 이한은 그때 봤던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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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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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체력이란 게 남아나지 않은, 너덜너덜한 상태이기에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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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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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볍지만 무겁고, 무겁지만 자유로우면서도 경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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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마치 부처의 자비로운 주먹질과 같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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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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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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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름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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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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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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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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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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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는 여전히 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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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 자면 될 것임에도 시녀는 들어갈 맘이 없는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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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의 주위로 다람쥐나 참새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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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나 늑대 등도 나타났는데, 먹이사슬의 관계가 모여 있음에도 웬일인지 그들은 도망가지도 잡아먹으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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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녀를 지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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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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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화 속의 광경과 같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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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동화와 달리 동물들의 보호를 받는 시녀가 기다리는 건 그녀에게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혀주거나, 왕관을 씌어줄 왕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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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가, 레이라 윈터가 기다리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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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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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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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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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지만,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따스한 사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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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꾸벅꾸벅 잠들었냐는 듯, 레이라 윈터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사내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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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골은 엉망이었고, 이곳저곳 붕대를 대충 휘감으며 귀가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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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정말 최선을 다한 그를 향해 레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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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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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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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웃으며 안아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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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저분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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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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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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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쓰게 웃었고, 레이라는 눈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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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켜준 것이 기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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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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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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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성격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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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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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니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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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나 제대로 받고 갈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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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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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하며 대화나 해보고 싶었거늘, 무정하게 떠나버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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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미아는 사내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확인하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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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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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르 경이 재밌는 자를 찾았구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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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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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격은 분명 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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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완전히 비슷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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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상 얻어맞으며 제 것으로 만든 순박한 맛이 있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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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제자는 키우지 않지만, 알아서 배워가는 건 막지 않는다, 라. 특이한 사내들끼리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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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 유쾌하게, 또한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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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마찬가지로 선왕이 죽은 후 모든 의욕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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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만 재미를 보고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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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복부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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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도 않고, 상처 하나 없는 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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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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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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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기운이, ‘의지’가 그의 복부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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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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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참으로 간만이라며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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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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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원한 공기보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상쾌하기까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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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보람찬 ‘패배’가 아닐 수 없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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