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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서가 떠났다.
당연한 거였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좀 있긴 했다.
오랜만에 봐서 즐거웠던 마음이 컸으니, 잠깐이긴 해도 헤어질 때 아쉬운 마음도 큰 거겠지.
“최이서 가슴 못 만져서 분한 김우진이면 개추. 일단 나부터.”
“나 김우진인데, 개추 눌렀다.”
“…….”
그런 심란한 내 마음에 대한 배려는 한 톨만큼도 없는 서예린과 유아린.
같이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나를 놀리는 데 여념이 없다.
“나 진짜 김우진인데, 하나도 안 아쉽다.”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으면서 애써 부정했음에도 둘의 따가운 눈초리는 여전하다.
“오늘 새벽 대나무숲에 보기 어색해진 여자애랑 인사하는 법 질문한 김우진이면 개추.”
“커헑!?”
“……진짜 개추하네.”
갑작스런 서예린의 기습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면서 기침하자 유아린이 혐오스럽다며 인상을 쓴다.
“어, 어떻게 알았어?! 새벽에 잠깐 쓰고 지운 건데?”
“후후, 나 대숲 지박령이야.”
어차피 여기 두 사람은 내가 관리자인 걸 알고 있고, 서예린은 유아린이 관리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딱 하나.
“예린이는 대숲 번호가 뭔데?”
유아린만 서예린의 정체를 모른다.
“…….”
“…….”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유아린한테 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 서예린의 눈치를 살피는데.
‘얼씨구.’
사색이 되어서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걸 보니 절대로 말해선 안 될 듯했다.
“익명 커뮤니티인데 그걸 왜 알려고 해.”
“뭐지, 그 조금도 설득력 없는 설득은.”
의아해하는 유아린.
“애초에 예린이도 네가 관리자인 거 알았으면 이제 대숲 관리인 2호로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관리자의 정체를 알았을 때만 관리인이 된다는 조건으로 유아린이 1호가 된 거니까.
지난번에 서예린도 관리인 2호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그걸 받아들이면 서예린이 익명69인 걸 유아린이 알게 되니까.
“아냐, 그건 그냥 너 끌어들이려고 했던 거고. 굳이 관리자 정체 안다고 강제로 시키진 않아.”
“이 자식이.”
유아린이 떽떽거리기 시작했으나 나는 나름대로 변명도 해본다.
“너 말고도 내가 관리자인 거 아는 사람 꽤 있어.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라. 애초에 지금 관리인 더 필요하지도 않잖아.”
사실 알아봤자 익명69인 서예린.
익명90인 물치과 화석 이은우 그리고 이제는 졸업한 나한테 관리자를 넘겨준 선배 정도밖에 없다.
그래도 과장해서 말하자 유아린은 콧소리를 내면서 설렁설렁 넘어간다.
분위기가 별로 원치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인 모양.
“뭐, 11처럼 시비 걸어대거나 69처럼 섹무새 짓만 안 하면 돼.”
바로 뜨끔해서는 몸을 움츠리는 서예린.
저건 숨기겠다는 의지가 있는 걸까?
꾹꾹.
식탁 아래에서 내 다리를 꾹꾹 밟으면서 도와달라고 적신호를 켜는 서예린.
그렇다면.
나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택하기로 했다.
“익명243이야.”
“243? 그게 누구지?”
아무리 유아린이라도 번호로 된 걸 전부 기억할 수는 없다.
“애니좌.”
“아, 오타쿠!”
식탁을 탁 치면서 유아린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다.
납득이 된 모양.
“나 애니 안 보는데.”
근데 서예린이 납득하지 못했다.
‘이년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니까 애니좌는 또 싫다고 한다.
서예린을 노려보고, 서예린은 내 눈을 피하는 형국이었는데.
“뭔 소리야. 퇴근하면 매일 애니 보는 애가.”
뭔 소리냐면서 유아린이 바로 카운터를 때렸다.
“숙소에서 애니 엄청 보잖아.”
“…….”
입을 꾹 다문 서예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마디 해준다.
“숨길 거면 일단 생각 좀 하면서 말하면 안 되냐?”
“애니 말고 다른 것도 많이 봐.”
“그건 맞아. 예린이는 드라마랑 영화도 엄청 보긴 해.”
전형적인 집순이구만.
서예린답다면 다웠다.
저렇게 집에서 음란함을 키워왔기에 최종적으로 섹x좌가 된 거겠지.
“근데 왜 얘기가 이쪽으로 간 거야?! 우진이 놀리는 거 아니었어?”
정신을 차렸는지 서예린이 다급하게 주제를 돌린다.
아까 최이서 관련해서 얘기하던 중이었던 걸 이야기를 잘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이서랑 인사는 했어? 잘 가라고?”
“……했지.”
조심해서 가라고 아침에 나와서 배웅해 줬다.
괜스레 어색해하는 나한테 최이서가 웃으면서 방학 끝나고 보자고 말해줬다.
“이서 오랜만에 봤는데 예쁘더라.”
“머리 기른 건 좀…… 괜찮더라.”
서예린과 유아린이 자연스럽게 최이서에 대해서 칭찬하기 시작했다.
약간 짧았던 머리가 이제는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왔을 뿐인데 분위기가 좀 다르긴 했다.
건강미 있는 육체 덕분에 우아함까지 갖췄다고 할까.
“예쁘긴 하더라.”
원래 여자랑 대화할 때는 공감해 주는 게 중요하다.
이건 드물게도 나 역시 진지하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였으니 냉큼 물었는데.
뻐억!
바로 식탁 아래에서 유아린이 종아리를 때려왔고.
아까 내 발을 밟던 서예린의 발끝이 뻗어져 내 고간을 눌렀다.
“……니들이 칭찬하셨잖아요.”
억울해하며 말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다 먹었다면서 먼저 일어난 두 사람.
나 역시 일단 식사를 끝내고 화장실로 가서 양치질하려는데.
우웅!
울려오는 핸드폰.
방금까지 같이 밥을 먹던 서예린의 톡이었다.
- 서예린: 내가 섹x좌인 거 숨겨줄 거지?
아까 얘기하던 게 아직도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만큼이나 다른 사람한테 들키기 싫다는 거겠지.
‘근데 좀 위험하긴 할 텐데.’
유아린은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예전에 익명90 정체를 찾을 때 내가 익명69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었으니까.
유아린이 좀만 기억력이 좋고, 추리력이 좋다면 어렵지 않게 서예린을 알아낼 수 있을 거다.
뭐가 됐든 일단.
- 김우진: 말 안 해.
나는 말할 생각 없으니까 당연한 답을 해줬는데.
저쪽 반응이 묘하다.
-
서예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린이가 한 번 해준다고 하면서 알려 달라고 해도 알려주면 안 돼?
-
김우진: 넌 친구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냐.
서예린이 최근 미친 발언을 많이 하긴 하는데 이건 좀 선 넘은 게 아닌가 싶었다.
-
서예린: 이걸 이용해서 협박하는 거 아냐?
-
서예린: 막 나한테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던가, 수치심을 주거나, 몸을 바치라든가.
-
서예린: 일하면서 노팬티로 하라든가, 같이 섹x 하는 거 영상으로 찍거나, 묶어두고 억지로 보내거나.
-
김우진: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
서예린: 남자들 망상이 다 거기서 거기지! 분명 나의 약점을 잡았으니 이렇고 저렇고 야한 일을 하겠지!
-
김우진: 니 망상이세요.
-
서예린: 그럼 나는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억지로 네가 말하는 걸 들어주다가 점점 타락하는 거야.
-
김우진: 이미 다 타락했는데 어디로 또 떨어지려고.
답장이 없다.
이제 좀 잠잠해졌구나 싶어서 양치질을 하는데 다시 톡이 왔다.
- 서예린: 안 해?
아오, 귀찮게.
-
김우진: 안 한다고.
-
서예린: 왜?
-
김우진: 왜냐니. 굳이 할 이유가 없으니까?
-
서예린: 해줘.
“…….”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앞에 있는 화장실 거울 속 비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짜게 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있었다.
-
서예린: 해야 하는 거 아냐?
-
서예린: (이모티콘)
화난 이모티콘을 보내오는 서예린에게 나는 뭐라고 보내야 얘가 이제 그만할까 고민하다가.
- 김우진: 어차피 벌리라고 하면 그냥 벌리잖아.
나름대로 서예린 취향에 맞춰서 대꾸를 해줬는데.
우웅! 우웅! 우웅!
- 서예린 -
바로 전화가 왔다.
입에 있는 치약을 뱉고, 물로 행군 다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멘트 좋은데 우진아?!
진짜 현기증 나네.
오늘 어지럽다고 조퇴할까.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걸로 말해준 거야.”
- 상황이라는 게 좀 있잖아. 약간 밀어내고, 튕기면서 결국 함락당하는 느낌을 받아보고 싶어.
“여기 그런 가게 아니야.”
무슨 지가 원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건지.
- 에이, 아린이한테는 막 묶어두고 했잖아. 억지로 밀어붙이면서.
“…….”
그냥 입이 꾹 다물어졌다.
확실히 유아린이랑 그런 느낌으로 즐기긴 했었다.
- 다음에 나랑 할 때도 그런 느낌으로 해볼까? 어때?
“그, 건…… 그때 가서 말하자.”
- 그랭! 좋앙! 기대된당!
기분이 좋아졌는지 바로 콧소리를 넣으면서 애교를 섞는 서예린.
“일이나 하러 가라.”
- 알았엉!
그대로 전화를 끊은 서예린.
절로 내쉬어지는 한숨.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걸 상상하자 하반신에 살짝 힘이 들어가긴 했다.
‘차라리…….’
진짜 나중에 한 번 크게 혼내주는 건 어떨까.
서예린이 아예 섹x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걸 꺼려할 정도로 말이다.
‘가능하려나.’
뭐, 그냥 상상만 해봤던 거고.
양치질을 다 했으니 손을 닦은 후, 다시 룸서비스로 일하러 간다.
다음에 점심 먹을 대리님이랑 교대해 드려야 했다.
사무실로 가니 다른 애들이랑 같이 냅킨을 접고 있는 유아린이 있었다.
나는 녀석의 뒤를 지나가면서 아까 종아리를 맞았던 복수와 서예린한테 우리가 했던 걸 말한 복수를 해준다.
찰싹!
“히끅?!”
“대리님! 식사하세요!”
엉덩이를 때리는 찰진 소리와 유아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내 목소리가 컸기에 묻혀버렸다.
“씨잉……!”
씩씩거리면서 본인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나를 노려보는 유아린에게 찰지다면서 엄지를 올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