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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워터파크에서 보냈던 다소 자극적인 시간.
자리를 비운 룸메이트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내가 약한 와인까지.
다소 인위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신기하다면서 와인을 검색해 보고 있는 서예린을 빤히 쳐다봤으나 이내 생각을 그만뒀다.
아무리 그래도 서예린이 이런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건 다소 억지가 아닐까 싶었으니까.
‘…….’
근데도 마음속 한구석에 묘하게 녀석을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
내 안에서 서예린이라는 여자의 이미지가 어떤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우진아 이거 별로 안 비싸다. 5만 원 정도밖에 안 하는데?”
“그래?”
겉으로 보기엔 꽤 비싸 보였는데 막상 그렇진 않았던 모양이다.
설렁설렁 답하면서 핸드폰의 룸메이트 단톡을 확인한다.
꽤나 쌓여있는 톡들.
워터파크에 있는 동안 확인하지를 못했는데 아무래도 다 같이 시내로 나간 모양이었다.
‘이런.’
톡을 보니까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 같은데 통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다들 밖에서 술 마시고 있나 봐.”
내가 어색하게 상황을 설명하자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서예린은 뭐가 문제냐면서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안주들을 꺼낸다.
“그럼 우리끼리 마시지 뭐. 남으면 냉장고에 넣어두면 되니까.”
그건 그렇다.
치익!
능숙하게 맥주를 딴 서예린.
문득, 탁자 앞에 있는 와인에 눈이 갔는데 서예린도 내 시선을 읽었는지 턱짓으로 가리킨다.
“저거 마시려고?”
“아니, 그건 아닌데.”
“남의 건데 마시는 건 좀 그렇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얘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하지.’
아까까지 와인을 보면서 느끼던 떨떠름하던 감각이 이제는 좀 잦아들었다.
서예린이랑 처음 했을 때도 그랬고, 최이서랑 했을 때도 와인이 같이 껴 있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걸 걱정했었는데.
‘쪽팔리게 호들갑은.’
너무 혼자서 호들갑 떨었다 생각하며 와인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짠.”
맥주를 내미는 서예린.
나도 캔을 내밀면서 작게 웃었다.
“짠.”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였다 보니 술이 좀 들어갈 필요가 있긴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맥주를 마시고 취하지도 않고, 속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정신을 놓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쨌든 서예린은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주었으니.
안주로 사 온 육포를 질겅질겅 물면서, 어느새 나는 그녀에게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정말 윤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나 방학 때 진짜 힘들었는데.”
“…….”
“하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존나 나쁜 새끼라는 것밖에 모르겠어. 뭔가 딱 감정이 정리되면 참 좋을 텐데 그것도 안 되고 말이야.”
나도 내 행실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당장에 서예린이나 최이서랑 잤고, 유아린에게는 고백을 받았으니까.
서예린은 그냥 섹프니까 크게 무게를 두지 말라고 했어도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더 마신다.
어느새 맥주를 벌써 3캔이나 비웠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묵묵하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서예린을 두고 화장실을 잠시 다녀온다.
원래 이렇게까지 많이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말을 털어놓다 보니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오자 서예린은 상념에 잠긴 채로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새벽 감성이 물씬 들어간 화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우진아.”
내가 화장실에 가 있던 동안 본인이 할 말을 정리했던 걸까.
꺼져 있는 TV 화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나랑 한 게 그렇게 부담스러웠어?”
“…….”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서예린에게는 첫 경험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나름의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섹프라는 다소 기형적인 관계를 받아들였던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어…….”
찌푸려진 인상은 펴지지 못했고, 친절한 거짓말을 선택할 수 없었다.
나의 잔인한 대답에도 서예린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네가 말했지. 사귀는 것도 아니고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말라고. 그런데 그게 안 돼. 애초에…….”
관계를 가졌던 여자를, 도대체 누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네 탓이 아니야. 내가 너무 우유부단한 게 문제야.”
최이서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단순히 그녀가 매력적이니까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런데 큰형의 말이 계속 가슴에 박혀 있다.
‘너는 오윤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딱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 나라는 사람의 근간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었다.
서예린 그리고 최이서와의 하룻밤.
유아린과의 관계 등.
모든 게, 내가 오윤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증거처럼 느껴져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미안해.”
솔직한 사과를 건넨다.
무례하면서도 이기적인 사람이라 미안했다.
묵묵하니 입을 다물고 있던 서예린의 시선이 어느새 내게로 향해 있었다.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읽을 수 없었고, 알아채는 게 무서웠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면서 서예린이 도대체 어떤 말을 할지 너무 겁이 났다.
“나랑 잤고, 이서랑도 잤어. 그리고 아린이한테는 고백도 받았어. 그런데 너는 윤지 하나 때문에 우리랑 지냈던 모든 시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
정확하게 정리된 나의 감정.
이렇게 말로 들으니 더욱 쓰레기 같은 스스로가 미워졌다.
저렇게 죄책감을 느낄 거면.
처음부터 밀어내야 했다.
그걸 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 싫었다.
“우진아.”
뺨이라도 맞는 게 아닐까.
어느새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내 고개가 천천히 들린다.
서예린과 눈이 맞는 순간, 그녀는 맥주를 한 캔 더 마시더니 갑자기.
“나는 성욕이 좀 강한 편이야.”
“……응?”
뜬금없는 고백을 시작했다.
“좀 하드한 야동도 많이 봐. SM플레이 같은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S도 가능하고 M도 가능해.”
“…….”
“섹x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게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라 성욕을 풀려는 의미도 있는 것 같아.”
“…….”
“능욕물도 보고, 강제로 당하는 거, 강제로 하는 것도 봐. 코스프레도 좋아하지만 막 전대물이나 마법소녀 같은 과하게 화려한 건 싫어해.”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지.
“남녀역전물 알아? 의외로 취향에 맞더라. ntr 같은 건 상황을 좋아하진 않지만 흥분되긴 했어.”
“…….”
“가, 가끔 수인물도 봐. 근데 퍼리는 좀 취향이 아니더라. 촉수도 묘하게 비현실적이라 별로였어.”
얘가 취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서예린의 눈길은 어느 때보다도 총명한 빛을 띤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BL은 유명하다는 거 몇 개 봤는데 생각보다 별로였고, GL은 내가 여자라 그런가 묘하게 감정 이입이 잘 안되더라고.”
“…….”
“역하렘물 보다는 하렘물이 오히려 내 취향이었고. 하렘보다는 솔직히…… 순애가 좋아.”
“잠깐만,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거야?”
분명 내가 품은 감정과 관계에 대해서 정리하는 중이었던 거 같은데.
어느새 갑자기.
서예린 성적 취향 발표회가 된 이 상황이 도저히 머리로 따라가지지 않았다.
“어때?”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서예린은 방긋 웃었다.
“남들한테 말 못 할 그런 취향들까지 나는 너한테 전부 말했어.”
“…….”
“우진아, 우리는 그런 사이야.”
천천히 일어난 서예린이 내게 다가온다.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그녀가 다가옴을 묘하게 반기고 있었다.
“대나무숲이라는 익명을 통해, 가장 깊게 숨겨놓은 비밀로부터 관계가 시작되었어.”
서예린의 본성이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익명69가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
“네가 왜 괴로워하는지.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까?”
사뿐사뿐 다가온 서예린.
내 목에 둘러진 그녀의 손이 강압적으로 나를 당기며 입을 맞춰왔다.
강제적으로 혀가 얽혀오고, 타액이 교환된다.
서예린은 맥주를 마셨음에도, 이상하리만치 달콤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무, 뭐 하는 거야!”
다급하게 서예린을 밀어내자 그녀는 입술에 흐른 침을 닦으면서 웃음을 흘렸다.
“맞아! 너는 나쁜 놈이야, 우진아.”
“…….”
“왜 괴롭냐고? 왜 혼란스러워하냐고? 이유는 딱 하나야. 네가 좋아하니까 그런 거야. 오윤지도, 최이서도, 유아린도…… 그리고 나도.”
말문이 막혔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괴로워하는 이유는.
내가 결국 누구 하나를 정하지 못했다는 소리였고.
오윤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선택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녀들 모두에게 끌리는 스스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진아.”
서예린의 손이 내 멱살을 잡는다.
그리곤 기대오듯 밀었는데, 몸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그녀의 아래에 깔려 버렸다.
“내 비밀을 듣고, 나를 혐오할 거야?”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서예린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단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당연하지만.
“……아니.”
고작 성적 취향이 좀 관대한 것 가지고 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대답에.
“나도.”
서예린은 평소와 다름없는 한없이 해맑은 미소를 지어준다.
“나도, 네가 나쁜 놈이어도 여전히 사랑할 거야.”
“…….”
“다행이야, 우진아. 정말 다행이야. 네가 나 때문에 괴로워해서 정말 다행이야.”
“다, 행이라고?”
왜?
“당연하지. 네가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고민할 정도로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소리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서예린의 입술이 정말로 내가 대답하는 걸 틀어막았다.
“우웁!”
또 다시 격렬하게 혀가 얽혀왔다. 나를 탐해오는 서예린의 볼은 발갛게 떠올라 진심으로 기뻐하는 중이었다.
“푸흐! 처음엔 걱정했어. 이서랑 네가 잔 걸 알고. 이제 내가 있을 곳이 없을 줄 알았거든. 섹x는 내 아이덴티티잖아?”
“자, 잠깐……!”
천천히 자신의 윗옷을 벗어든 서예린. 오늘 하루 종일 내 팔에 비벼오던 흉부가 훤히 눈에 들어왔다.
“근데 반대로 생각하기로 했어.”
“브, 브라까지 벗지 마!”
내 말을 들어준 건지 브래지어는 벗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내 위에 올라탄 서예린이 엉덩이를 살짝 들썩이며 속삭였다.
“반대로 내가, 누구도 주지 못하는 쾌락을 주면 되는 거잖아.”
최이서는 모르는.
오윤지는 주지 못한.
수많은 성적 지식을 알고 있는 서예린이었기에, 자신 있게 선언한 발언.
다시금 서예린이 몸을 낮춰 입을 맞춰왔다.
“자, 잠깐만!”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낸다. 이미 다 넘어온 게 아니었냐고 인상을 찌푸린 서예린이 나를 노려본다.
“뭐야, 분위기 좋았는데.”
좋은 분위기였나?
그것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을 확실히 정리하고 싶었다.
“혹시 오늘 이것까지 노린 거야? 와인이 갑자기 숙소에 있거나, 애들이 놀러 간 거까지?”
찬우 연락처가 있을 테니까 어느 정도 숙소에 공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 말을 들은 서예린은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비웃음을 내걸었다.
“굳이?”
저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으니까, 굳이 그런 공작을 펼칠 필요도 없다는 소리.
“할 말 끝났지?”
내 손을 쳐내며 다시 입술을 포개는 서예린.
경직된 나를 녹여주듯 부드러운 입맞춤과 혀 놀림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만들었다.
아까 치워뒀던 와인이 발끝에 닿았다.
와인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맥주는 많이 마셨지만 취했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예린이라는 여자에게 어느새, 나는 잔뜩 취해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