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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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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윤지랑 사귄 거 어떻게 알아?”

한 마디가 호텔 방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이것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 내 대응이 달라진다는 걸 큰형은 잘 알고 있겠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심한 큰형의 표정은 여전했다.

“오윤지.”

오윤지의 이름이 입에 익은 듯한 말투가 미묘하게 거슬렸으나 일단은 큰형의 말을 듣는다.

“네가 정말로 그런 애랑 사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

“혹시 몰라서 조사를 좀 해봤다. 그 애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고는 있겠지?”

이렇게까지 열이 확 치솟은 적은 처음이었다. 심장이 격할 정도로 빠르게 두근거림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저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뒷조사까지 했어?”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당연히 필요한 수순이야.”

“이 씨……!”

“화를 내면서도.”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큰형. 시선에는 미약한 혐오감이 차올라 있었다.

“막상 너는 다른 여자를 잘 사귀고 있잖아.”

“…….”

“우진아, 정말로 오윤지가 너한테 그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을까?”

“……!”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 않았고, 내가 오윤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해도 결국에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1학기 이후, 방학 동안 살아있는 송장처럼 지내기만 했던 내 시간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해봤자.

그건 결국 과거로 치부되며 끝날 뿐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은 최대한 너를 건드리지 않을 거다.”

“…….”

“네가 말했지? 지원도 이제부터는 끊을 거다. 기숙사에 원서를 넣었다는데 잘했구나, 밖에서 얼어 죽을 일은 없겠어.”

“씨…….”

뭔가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히는 건 여전했다. 큰형의 무덤덤하고 기계적인 말들은 업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밖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경험해 봐라. 그다음에 네가 정말 우리 가족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꽉 쥐고 있는 주먹은 갈 곳을 잃은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결국 큰형이 하는 말들에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오윤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내 말과 다르게, 행동은 그야말로 헤프기 그지없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윤지…….”

하지만 마지막 발악을 하듯.

나는 큰형을 쳐다보며 호소하듯 한마디 내뱉었다.

“윤지는 어디 있어.”

그건 알고 싶었다.

갑자기 사라진 그녀가 혹시라도 뭔가 잘못되진 않았을까.

나랑 가족들 때문에 어디서 몹쓸 짓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빤히 나를 쳐다보던 큰형은 작게 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놀란 점은.

마지막 한마디는 아까처럼 사무적인 보고의 느낌이 아니라.

정말 동생을 걱정하는 형처럼 보였다.

“김운이랑 같이 사업을 한다고 들었다.”

“작은형이랑 사업을 한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당혹스런 눈으로 큰형을 쳐다봤으나 더 이상 해줄 말은 없다면서 몸을 틀어, 창밖의 풍경을 볼 뿐이었다.

“후, 너 이거 안 먹으면 내가 가져간다.”

대꾸도 안 하는 모습이 짜증 나서 베개를 하나 챙겨 큰형 뒤통수에 던지자 퍽 하고 맞았다.

“……김우진.”

“폼 잡지 마! 잣 같으니까!”

“하아, 언제 철이 들 건지.”

“너나 잘해! 나이가 몇인데 주변에 여자가 하나 없냐!”

“……방금 나간 여자가 네 형수 될 사람이다.”

뭐?

“어머니도 알고 계시고.”

“시발?”

저분이 진짜 형수님이었다고?

“얼른 가. 괜히 너랑 있으면 말이 많아져.”

짜증내며 손짓하는 큰형에게 나는 씩씩거리면서 카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과 눈이 딱 맞았기에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안녕하세요.”

“또 인사를 하시네요?”

설마 저 형이 여자를 사귈 줄이야. 미모의 여성이긴 했으나 그래도 형을 함락시키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저기요, 옷 좀 잘 추스르세요. 괜히 편하게 입고 다니지 마시고.”

이전 일들이 떠올라서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하자 비서는 방긋 웃는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회장 아들이자 부회장 동생이 아니라.

그냥 형수한테 충고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모양.

“도련님께서 어떤 반응일까 궁금했거든요. 정말로 아무 여자한테나 지조 없이 구는 건가 싶어서요. 그래도 그건 아니시더라고요.”

“칭찬이죠?”

“그럼요. 저분께서 말을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도련님을 지지해요. 대학생인데 여러 여자랑 해보고 해야죠.”

“뭐야, 형수님 그랬어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형수님은 키득거리면서 대꾸한다.

“저 사람이 그랬거든요.”

“시발 놈이?!”

그러면서 나한테 뭐라 한 거야?

“큰형은 여자한테 별로 관심 없었을 텐데요?”

“여자가 저분한테 관심이 많았죠.”

“허, 쟤 때리고 싶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내 말에 형수님은 웃으면서 말을 이어간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여러 경험을 해보면서 좋은 여자를 찾는 것도 나름 방법이에요.”

“…….”

“저 사람이 마지막에는 저를 선택한 것처럼.”

본인이 좋은 여자라는 걸 어필하고 있는 형수를 보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렀다.

확실히 여자는 잘 만난 모양.

알겠다고 끄덕이며 가기 전, 나는 형수를 보며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그, 형 좀 잘 부탁해요.”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멍하니 쳐다보던 형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 새끼 나한테 삐진 게 분명해.”

1007호에서 돌아오고 얼마나 됐다고 다시 불린 김우진.

치즈 술안주를 가져가면서 씩씩거리는 뒷모습을 보니 유아린은 뭔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이인가?

1007호에 끌려갔다 온 김우진은 평소랑 다른 느낌이었다. 거리를 두는 느낌이 강해졌다고 할까.

객실에서 또 룸서비스를 시킨 건 의외였으나 이번에는 따라가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김우진에 대해서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었는데.

“야, 이리 와봐!”

갑자기 부르는 이찬송 부장.

부르는 말투에서 벌써 기분 더럽다고 투덜거리며 유아린이 부장에게 다가가자 거기엔 기묘한 각서 같은 게 있었다.

“여기에 사인해.”

“이게 뭐예요? 각서?”

“아, 그냥 해. 틀린 건 없으니까.”

멍하니 유아린이 읽다가 순간 인상을 구겼다.

“뭐야, 부장님이랑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성적 발언 같은 것도 없다?”

“각서라고! 너희가 괜히 알바 끝나고 개짓거리할 수 있으니까 미리 받아놓는 거야.”

“허.”

어이가 없다 못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게 정말로 법적으로 효력이 있으니까 시키는 거겠지?

“고소 같은 거 안 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괜히 부장님한테 시간 쓸 일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인하라고.”

“아, 당당하시면 이런 거 받을 필요도 없는 거 아니에요?!”

“하아, 요즘 애들이 왜 이렇게 답답하지?”

이찬송 부장이 짜증 내는 와중.

뚜벅뚜벅.

밖에서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

김우진이 돌아왔구나 싶어서 유아린은 냉큼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유아린 양?”

큰 키.

머리를 뒤로 전부 넘기고 있으나, 촌스럽다기보다는 나이에 맞지 않은 묵직함과 중후함을 풍기고 있었으며.

낮게 깔리는 저음은 전신을 긴장되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닮았네?

김우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른 건 유아린이지만 반응은 옆에서 튀어나왔다.

“부, 부, 부회장님!”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90도로 인사하는 이찬송 부장.

‘부회장?

지금 호텔 전체가 비상에 걸리게 만든 원흉이지 않은가. 아직 이런 경험이 익숙하지 않은 유아린은 멍하니 부회장을 쳐다봤으나.

정작 부회장의 눈길은 책상에 있는 기괴한 각서 쪽으로 가 있었다.

“흠.”

그걸 전부 읽고는 아무 말 없이 챙겨 든 부회장.

이찬송 부장은 아찔함을 느끼며 입술을 꾹 깨물었으나, 부회장은 그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아린을 불렀다.

“잠시 얘기 좀 할까.”

“저, 저요?”

“그래.”

그리 말하고 밖으로 나가는 부회장. 표정이 아예 퍼렇게 질려버린 부장을 내버려둔 채로 유아린은 그대로 그를 따라갔다.

아예 호텔 건물 밖으로 나갔는데 걸음이 좀 빠른 걸 보면 누구한테 걸릴까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호텔 밖에 있는 벤치 앞..

아직 새벽이라 사람이 거의 없기도 했고, 어두웠기에 부회장을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이야기도 금발 끝날 화제인지 따로 앉거나 하진 않았다.

“김우진 알지?”

“아, 알죠?”

“사귀고 있지?”

“네? 아닌데요?!”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격하게 부정해 버렸는데 오히려 부회장 김재운이 더 곤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럼?”

“친구죠, 지금은.”

“흐음, 지금은?”

미간을 찌푸린 김재운은 묘한 눈으로 유아린을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김우진이랑 관계를 맺었나?”

“……관계요?”

“성관계를 했냐고.”

“아, 아뇨…… 아직.”

스스로 말해놓고 뺨이 살짝 달아올랐으나 김재운은 무뚝뚝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회장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말을 해보겠니? 아무거나.”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근데?”

"맞는데."

유아린이 다소 특이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보니 김재운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김우진이랑 통화할 때 옆에서 신음 흘렸던 게 너 아니었니?”

“…….”

도대체 부회장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고민하던 유아린은.

“아아아아악?! 큰형이랑 통화한다고 했을 때!”

이제야 PC방에서 김우진이 큰형이랑 통화할 때 신음을 내면서 장난쳤던 걸 기억해 냈다.

잠깐.

그렇다면.

“……우, 우진이 큰형이세요?”

당황하면서 묻는 유아린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허, 당황스럽네.”

뺨을 긁적인 유아린은 멍하니 김재운을 보다 꾸벅 숙여서 다시 인사한다.

“유아린입니다. 김우진 친구예요.”

“김재운. 김우진 큰형이다.”

“와, 김우진 다이어 수저였어요? 미친놈이네. 그걸 숨겨? 그러면서 아까 편의점에서 초코몽 사주는 걸로 생색 오지게 냈네. 심지어 어제는 내가 사줬는데!”

헛웃음을 흘리는 유아린의 모습에서 김재운은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싶었다.

자신에게 다가왔던 여성들의 대부분은 기업과 재산에 관심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탐욕이 그득한 눈에 대해서 김재운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유아린은 그런 부분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아직 대학생이라 체감이 잘 안되는 걸 수도 있고.

“하지만 김우진이 따로 물려받을 건 없다. 전부 포기하기도 했으니까. 생활비도 이제 본인이 낼 거고.”

혹시 몰라 김재운이 대놓고 말했으나.

“어헠! 그걸 포기하네 김우진 등신!”

오히려 좋다면서 박수 치고 웃어대는 게 아닌가.

‘오윤지도 그렇고…….

좋은 여자들을 만났구나 싶어 김재운은 옅은 미소를 흘리면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내가 너를 찾아온 건 별거 아니다.”

“네?”

“너희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우진이 잘 부탁한다.”

“아하!”

그 말에 유아린은 방긋 웃으면서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 자식이 주변에 여자가 많아서 좀 고민이긴 한데, 잘해줄 겁니다.”

여자가 많다.

잠시 고민한 김재운은 이미 한 발 먼저 움직이고 있는.

“너는 미리 알아두는 게 좋겠지.”

“네?”

“오윤지라고 알고 있나?”

오윤지에 대한 이야기를 유아린에게 풀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