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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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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할 때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출근이 늦진 않았다.
이제는 비슷한 이름의 메뉴들도 헷갈리지 않고, 같이 나가는 반찬이나 사이드 메뉴들도 크게 어렵지 않아 정말 별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경지.
보통이라면 대리님들이랑 간단하게 잡담이나 떨거나, 유아린이랑 티격태격 거리면서 시간을 보냈겠으나.
하필이면 오늘 당직이 이찬송 부장.
아까 노래방에서 이서아에게 듣기로는 어제 또 부장이랑 과장이 싸웠다던데.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가 조금이라도 쉬거나 설렁설렁 일하려고 하면 아주 쥐 잡듯이 닦달해 왔다.
덕분에 우리는 이미 차고 넘치는 냅킨이나 접으면서 있을 뿐.
심지어는 앉아 있지도 말라고 해서 일어서서 일하는 중이었다.
“처음 왔을 때나 FM대로 하는 거지 지금은 괜찮은 거 아냐?”
투덜거리는 유아린의 말대로였다. 처음에는 우리도 다 서서 일을 했었다.
초장부터 우리가 너무 느슨해지면 안 되니까 그랬었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대리님들도 이제 우리가 잘하는 걸 인정해 줬고 특히나 새벽처럼 널널한 시간대에는 다소 풀어주는 경향이 있었음에도.
이찬송 부장은 망설임이 없었다.
어찌 보면 줏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최근 선배들 예민한 거 알잖아. 부장님도 당연히 예민하겠지.”
“그걸 왜 우리한테 푸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어깨만 으쓱거리며 유아린의 투정을 받아줄 뿐이었다.
그때.
“야, 주문 들어왔다.”
“야?”
다소 거친 언행의 이찬송 부장을 노려보며 유아린이 대꾸했으나, 그는 이쪽은 쳐다보지 않은 채로 빌지를 건네준다.
주방 쪽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이 우리는 카트를 세팅하면서 어디서 주문이 들어왔는지 확인한다.
“1007호?”
“음? 1007호?”
뭔가 익숙한 숫자라서 되뇌고 있자니 미간을 팍 찌푸린 유아린이 생각났다면서 내 어깨를 툭 친다.
“지난번 금발 여자분이잖아.”
“아, 그분.”
솔직히 볼 때마다 이것저것 썰 풀 거리가 생기는 건 좋다. 지난번에 속옷 차림을 본 걸 숙소에서 풀자 나는 영웅이 됐으니까.
하지만 볼 때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개인적으론 그닥 반갑지 않은 객실이었다.
“따라갈 거야.”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앙칼지게 노려보는 유아린.
“따라오긴 어딜 따라와.”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유아린은 강경했다. 단순히 나를 감시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방금 막말했던 이찬송 부장을 골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 보였다.
“들키면 너 엄청 혼나.”
“뭔 상관이야. 어차피 잠깐 있다 오는 거라서 모를 거야. 그냥 화장실 다녀왔다고 하면 됨.”
“…….”
내가 빤히 쳐다보자 결국 유아린은 팔짱을 낀 채로 노려본다.
“부장이랑 같이 있으면 은근슬쩍 이것저것 묻는단 말이야.”
“엥?”
“아, 몰라. 네가 괜히 걱정할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나 말고 서아랑 봄이한테도 그런다고 들었어.”
이건 그냥 넘어가기 좀 그런데.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유아린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별건 아니고. 그냥 미묘한 성희롱 같은 거 있잖아? 요즘 애들은 발육이 좋다느니, 골드원 유니폼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 어울린다…… 이런 거?”
“왜 말 안 했어. 계속 그래?”
지금 유아린의 반응을 봤을 때 그나마 가장 수위가 약한 것들로만 고르고 골라서 말했다는 게 뻔히 눈에 보였다.
“야, 나는 듣자마자 바로 그거 성희롱이니까 하지 말라고 짜증 냈지. 그래서 쟤가 나 더 싫어하잖아.”
“그건 잘했네.”
“이제 나한테는 안 하는데 그래도 둘만 같이 있는 거 좀 기분 나빠서.”
“하아.”
쓰라린 숨이 흘렀다. 애들이 이찬송 부장을 특별히 더 싫어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아챈 스스로가 좀 싫어졌다.
“그래도 애들 말로는 이번에 고소 사건 터진 덕분에 좀 잠잠하다고 듣긴 했어.”
그렇다 해도 찝찝하기 그지없는 정보였다.
“같이 가자.”
결국 나는 유아린의 동행을 허용했다. 여기 둔다고 해도 큰일은 안 생기겠지만 불편해하는 사람이랑 같이 두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유아린이랑 같이 도착한 10층.
평소에는 자주 못 올라오는 곳이다 보니 유아린은 여전히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흥얼거린다.
“근데 진짜로 깡패 같은 사람들 많아?”
“몸에 문신한 사람들은 엄청 많이 보긴 했지.”
“흐아, 보니까 호텔 근처는 싹 다 전당포더라. 시계, 금, 차키 같은 거 다 받는데.”
“괜히 카지노겠니. 나도 험악한 사람들 있으면 눈 괜히 안 마주치려고 깔아.”
“진짜로 여자 직원이 올라오면 끌고 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
그럴 일이 절대로 없을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사례가 있었다고 듣기도 했으니까.
똑똑.
“룸서비스.”
문을 두드리며 춤을 출 준비를 하자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본다.
“그거 진짜 재미없는 거 알지?”
“크흠, 나름 괜찮지 않나?”
어색하게 긁적이면서 손님을 기다린다. 유아린은 일부러 문 옆에 서서 손님에게 안 보이도록 빠져 있는다.
끼익.
문이 열리고.
“들어오세요.”
‘잉?
오늘은 좀 특이하게도.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어서 몸을 단단히 보호하고 계신 누님. 헤픈 몸가짐이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어디로 봐도 유능한 커리어우먼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계시다.
‘뭐야.
내가 야간근무 중이라는 것도 잊게 만들 정도로 그녀는 당장이라도 출근할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를 안으로 들이더니 냉큼 문을 닫아버린다.
“엇?”
유아린의 작은 탄성이 문틈 사이로 들려왔으나 그 이상 이어지진 못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방금 유아린이랑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안으로 잡혀 들어가는 이야기가 실제로 있는 거냐고.
설마 여직원이 아니라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안으로.”
방긋 웃으면서 나를 이끄는 금발녀. 등을 떠밀어 그대로 안으로 잡혀간 나는 이대로 잡아먹히는 건가 싶었다.
만약 정말 잡아먹힌다면, 유아린이 조금 늦게 신고해 주길 바라면서 오늘 팬티 뭐 입었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 씨발.”
안에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고,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큰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큰형.
그래.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큰형, 김재운.
양복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주 기분이 더러웠기에.
“에이 씨.”
나는 카트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챙겨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내가 이거 한번 먹어보고 싶었거든.”
근데 우리는 시켜 먹을 수가 없으니까 좀 아쉬웠는데 큰형이 시킨 거면 차라리 잘됐다.
스테이크를 썰어서 한 입 먹고 있자니 뒤에 있는 금발 누님께서 당혹스러워하며 중얼거린다.
“그, 부회장님 동생다우시네요.”
“그거 칭찬 아니거든요?”
내가 짜증 내면서 대꾸하자 바로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 답한다.
아까까지는 여유로움이 몸에 한껏 배어있었는데 내가 스테이크를 써는 걸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 새벽에 무슨 스테이크를 시키냐. 주방 고생하게.”
아예 침대에 걸터앉아서 궁시렁거리자 큰형은 무뚝뚝하니 대꾸했다.
“네가 좋아할 만한 메뉴라서 시킨 거다.”
“……에이 씨.”
그러니까 내가 먹을 걸 알고 이걸로 시켰다는 소리.
큰형 생각대로 행동했다는 게 기분 더러워졌기에 카트를 옆으로 밀면서 쳐다본다.
“왜 왔어. 지금 형 눈치 본다고 직원들 엄청 고생하고 있는 거 알지?”
모기업 부회장님께서 오셨다고 아주 지랄 발광을 하고 있는데.
원흉이 내 앞에 있으니 솔직하게 투정을 부려본다.
하지만 형은 담담하니 대꾸해 왔다.
“너 때문에 온 거다. 네가 이쪽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들었으니까.”
“…….”
“방학 때 정말 안 올 생각인 모양인데. 어머니 아버지랑 통화라도 해라.”
“엄마랑은 통화했어.”
“음?”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형에게 나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진짜야. 엄마한테 물어보든가. 그리고 뭔 어머니야. 형이 엄마엄마하면서 따라다니던 게 몇 년이나 됐다고.”
뒤에서 금발 누님께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형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하더니 턱짓으로 나가라 지시했다.
“밖에 있는 애한테 걱정 말고 그냥 내려가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유아린이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신고할 수도 있으니 얼른 나가서 얘기할 필요가 있었다.
“무, 문 열렸다! 우진아! 김우진! 괜찮아?”
“어! 나 괜찮아! 누님 말하시는 대로 해!”
“뭐?!”
“안녕하세요?”
방안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자 그나마 좀 안심했는지 유아린의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뒷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문이 닫힌 덕분에 묻혀서 버렸다.
“비서야?”
내가 휙 돌아보며 묻자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알바로 있는 거 보니까 가족관계를 별로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 건 아닌데.
굳이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알릴 필요가 없어서 알리지 않은 거뿐이다.
“일부러 비서한테 혼자 방을 잡게 하고 며칠 있다가 내가 들어온 거다.”
“혹시 비서랑 사귀는 거야?”
“후우,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사귀는 거 아니면 사귀라고 하는 말이야. 형 때문에 작은형이 장가 못 가고 있잖아.”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 눈살을 찌푸리는 큰형.
큰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는 거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말했을 뿐이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뭔가 할 말이 있으시니까 찾아오신 거겠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솔직히 오윤지에 대해서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은 부분이 있었으나 일단 큰형이 찾아온 이유부터 들을 생각이었다.
족칠 거면 저쪽에서 할 말 다 듣고 족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의외로.
“없다.”
큰형은 당차게도 대꾸했다.
“음?”
“없어. 네가 잘 지내나 그거 하나 확인하러 온 거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니까.”
“…….”
미묘한 분위기.
큰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나를 무뚝뚝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미안한데 그런 말해도 안 봐줄 거야.”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큰형에게 따지고 들었다.
“내가 오윤지랑 사귄 거 어떻게 알아?”
해명이든 혹은 변명이든.
뭐가 됐든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내 앞에 나타난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