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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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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편의점 좀 들렀다 갈게.”
“아린아 뭐 사갈 거 있어?”
“아니, 없어.”
버스를 타고 도착한 숙소.
C동 호텔은 지하에 편의점이 있었기에 이서아와 한봄은 그대로 편의점으로 가버렸다.
“…….”
슬그머니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유아린.
아까 고백 이후로 머리가 정리되지 않아서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간다.
나는 801호, 유아린은 403호.
8층과 4층을 같이 누르고 괜히 고개를 숙인 채로 유아린이 내리길 기다렸는데.
“왜 안 내리냐?”
4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벽에 기댄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유아린.
녀석은 내 질문에 당당하니 답해왔다.
“너랑 같이 8층 갈 건데?”
“……왜?”
“내가 있어야 네가 최이서 전화 안 받을 거 아니야.”
“…….”
알고 있었구나.
지금 계속 최이서한테 연락이 오고 있다는 거.
대화를 하다 보니 결국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8층으로 향하게 되었다.
“숙소에 남자들밖에 없어서 오면 안 돼.”
“왜? 혹시 모르지 환영해 주실 수도 있잖아. 찬우도 있다며.”
“그, 건 그런…….”
환영해 주실 수도 있잖아가 아니다.
이 새끼들은 분명히 환영할 거다.
세신강대 듀오인 제갈재민과 민동건은 매일 같이 심심하다고 이상한 짓거리만 하고 있고, 대상 형님은 사람이 착해서 잠깐 놀다 가겠다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겠지.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내가 머뭇거리자 유아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안 따라가, 이 자식아. 최이서랑 통화 잘하고.”
“…….”
왜일까.
방금 그 말 때문에 최이서랑 연락하는 것 자체가 뭔가 몹쓸 짓이 되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잠깐 통화 못 하게 하려고 따라온 거야?”
괜히 말을 덧붙여서 묻자 유아린은 한숨을 내쉬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리곤 답답해서 뒤지겠다는 듯 짜증 내며 나를 쏘아봤다.
“그냥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따라온 거잖아, 병신아.”
“…….”
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4층으로 내려간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덕분에 들키지 않았고.
우웅! 우웅!
계속해서 연락이 오는 최이서의 통화를 이제 받을 수 있었다.
“크흠, 여보세요.”
- 죽을래?
“……아뇨.”
* * *
“후우.”
숙소로 돌아왔어도 뜨겁게 달아오른 유아린의 얼굴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답을 내놓은 건 물론이거니와 속 시원하게 선전포고를 하고 오니 몸이 가볍다 못해 기분마저 후련하니 좋았으나.
“엉? 왔어? 고생했어.”
방금 씻었는지 머리를 말리며 반겨주는 서예린을 보며 유아린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주먹을 쥐었다.
최이서 같은 경우는 대학에서 만나고, 최근에서야 친해진 사이였으니까 별문제 없었으나.
서예린은 좀 달랐다.
그래도 오랜 친구였기에 괜히 사이가 틀어지는 건 싫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네가 말했었지.”
유아린은 성큼성큼 냉장고로 향했다.
“협력하자며.”
민주희한테 줬던 초코몽이 아직 남아있는 걸 보곤 안도감을 느끼며 바로 꺼내서 빨대를 꽂는다.
“…….”
무슨 얘기인지 바로 알아차렸는지 서예린의 표정이 굳었다.
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서 감돌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속에서 유아린은 오랜만의 초코몽을 쫍 마시자 용기가 솟는 느낌이었다.
‘달다.
달콤했다.
그래, 이 달콤함은.
“싫어.”
포기할 수 없었다.
“으음?”
유아린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예린.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유아린은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답했다.
“협력할 생각 없다고. 내가 혼자 가질 거야.”
“안 좋아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구라야.”
“…….”
“최이서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괜히 걔한테 다가가지 마. 내거니까.”
“흐응.”
서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미묘한 섬뜩함과 더불어 스산함마저 연상케 했다.
눈에 총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만 같은 모습은 잡아먹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줄 정도였기에 순간 움찔 떤 유아린이었으나.
“그거 알아 아린아?”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서예린은 두 손을 모으곤 답했다.
“화장실에 주희 선배 있어.”
“흐, 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굳게 닫힌 화장실 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끼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며 씻고 나온 주희 선배가 어색하니 두 사람의 눈치를 본다.
“크, 크흠……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해봤자 어차피 안 믿겠지?”
“아, 아니. 선배…… 그게 아니라.”
삼각관계.
아니, 사실상 사각관계나 다름없는 사이를 공공연하게 밝히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유아린.
하지만 서예린은 방긋 웃으면서 민주희에게 부탁했다.
“선배, 비밀로 해주세요.”
“아, 음…… 그래. 혹시 방 같이 쓰는 거 불편하면 말하고.”
“아뇨, 괜찮아요. 그치 아린아?”
“으응, 괜찮아.”
뭐지.
분명 강하게 나갔던 건 본인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분위기와 주도권 모두 서예린에게 넘어가 있었다.
텁텁한 분위기 속 유아린은 초코몽을 마저 마시며 속을 달랠 뿐이었다.
* * *
곤란하다.
일 때문에 곤란한 건 아니었다.
룸서비스 일은 꽤나 재밌었으며 지금처럼 야간업무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썰 풀 거리들도 많아졌다.
“와, 10층은 그냥 신음 천지인데요? 처음에는 누가 야동이라도 틀어둔 줄 알았어요.”
같이 야간 근무를 서고 계신 대리님에게 그리 말하자 웃으면서 그런 경우가 많다고 답해주셨다.
야간에는 사람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덕분에 콜을 받는 대리님 한 분과, 객실로 카트를 가져가는 나.
그리고 밑에서 음식을 세팅하는 여직원 하나.
“그 정도라고?”
그래, 유아린이다.
묘하게 찰싹 달라붙어 앉은 유아린. 대리님이 눈치가 없는 편이라서 크게 이상하게 여기진 않으셨지만.
허벅지와 어깨가 찰싹 붙었고, 특유의 과일향이 코를 간질이는 게 묘하게 야릇하다.
일부러 붙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괜히 신경 안 쓰는 척하며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심하던데.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복도에서는 들리는데 다른 방에서는 안 들리니까 걱정 마. 우리 호텔이 옆방 방음은 철저하니까.”
저리 말하시는 걸 보면 그동안 관련해서 컴플레인이 딱히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새벽 시간이라 누군가 싶었는데 굉장히 뜬금없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부장님?”
이찬송 부장이 넥타이도 제대로 매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달려온 것.
그는 안에 있는 우리와 대리를 보더니 이를 으득 물고는 말했다.
“애들 놀 게 두지 말고! 일을 시켜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빠졌으니 괜히 감사팀에서 말이 나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감사팀이랑 우리가 뭔 상관이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중얼거리자 이찬송 부장이 쌍심지를 키고 나를 쳐다본다.
다른 사람들은 다 상관없는데 저 사람만 묘하게 나를 싫어했다.
“일 똑바로 하란 말이잖아! 너희가 이따위니까 내가 이 시간에 출근하지!”
“…….”
“나는 잠깐 어디 다녀올 테니까. 제대로 해놔! 특히 지금 당장 객실 위로 가서 밖에 나온 카트들 전부 수거해!”
“넵!”
기분이 더러운 부장 탓에 군기가 바짝 든 대리가 바로 답했다. 이찬송 부장이 떠나가고, 멋쩍은 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올라가서 카트 전부 수거해 오자. 아린이도 같이 올라가서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말에 눈치를 보던 유아린이 활짝 웃는다.
“저도 가도 돼요?”
“객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복도에 나온 카트 수거하는 거니까 별 문제 없을 거야.”
그 말에 바로 기뻐하며 나를 끌고 가는 유아린.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로 우리는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와, 두근거려.”
“막상 올라가면 별거 없어. 그냥 가서 카트 보이는 것만 수거해서 엘리베이터로 옮기면 끝이야.”
가장 꼭대기 층에서 내린 다음 비상구 계단으로 한 층씩 내려가면서 복도에 카트가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이서랑 연락해?”
계단을 내려가면서 심심했는지 민감한 문제를 꺼내 드는 유아린. 나는 녀석을 살짝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몰라.”
“왜 몰라? 응? 왜 몰라?”
“좀 떨어져!”
찰싹 달라붙어 오는 유아린에 나도 모르게 버럭 외쳤으나 녀석은 그게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화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설레냐? 응? 막 두근거려? 호텔 방 하나 잡고 싶어?”
“아, 진짜! 나 혼자 할 테니까 그냥 가주지 않을래?”
“아잉! 알았엉! 장난 안 칠게! 안 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계속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 게 기분이 묘하게 더럽다.
내 감정이 어떤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굴고 있는 게 짜증 난다.
그렇게 다음 층 복도를 확인하려 비상구 문을 연 순간.
하앙!
“…….”
“…….”
여성의 간드러지는 신음에 나와 유아린이 서로를 쳐다봤다.
“아, 10층이다.”
그리곤 유아린이 층수를 확인하더니 납득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도 말했듯 10층에서는 지금 한창 즐기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앙! 하앙!
끄으! 끄으읍!
교차로 들려오는 여성과 남성들의 정열적인 목소리에 우리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하, 씨.
아까는 못 봤는데.
하필이면 10층에 카트가 꽤 많다. 아무래도 야식을 드시고 한 판 더 하시는 것 같았다.
“얼른 옮기자.”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서 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한다.
더, 조, 좀 더!
끄으!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신음은 더욱 과격해진다. 아예 음담패설과 비슷할 정도로 발언 수위도 강해지는 걸 보며 유아린 쪽을 슬쩍 보자.
“…….”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고 있는 모습.
방금까지 공격적으로 굴었으면서 막상 이렇게 노골적인 상황이 펼쳐지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카트 가지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
아무래도 이 이상 여기 있는 건 힘들어할 것 같아서 나름 배려해 준 거였는데 유아린은 주먹을 꽉 쥐더니 콧방귀를 뀐다.
“아직 카트 더 남았잖아. 나도 같이할 거야.”
“너 지금 얼굴 엄청 빨개.”
“…….”
“에휴, 모르겠다. 네가 도와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물러서지 않는다. 같이 다음 카트를 옮기러 가는 와중.
벌컥!
갑자기 열린 객실 문 하나.
거기서 나온 건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지난번에 맨몸에 가운만 입고 있던 금발 누님이셨다.
속옷만 입은 채로 카트를 끌고 밖으로 나오신 누님은 나를 발견하셨음에도 가볍게 눈웃음치시곤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셨다.
“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감탄사.
여기 무슨 미국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능글맞게 구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는데.
콱!
뒤따라오던 유아린이 내 어깨를 낚아채 그대로 본인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곤 나를 노려보더니 손을 하반신에 가져가는 게 아닌가.
“히익?!”
“섰냐?”
서슬 퍼런 눈으로 물어보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그녀. 방금 그거 때문은 아닌데 지금 유아린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다.
방금은 무죄인데 지금은 유죄다.
“이 새끼가 지금 내가 빤히 보고 있는데……!”
부끄러움보다 분노가 커진 녀석이 내 물건을 뽑아버리기 전에 나는 황급히 외쳤다.
“미친년아! 네가 만져서 그런 거잖아!”
“아.”
어색하니 손을 뗀 유아린. 멋쩍은 듯 자신의 손을 보다가 코로 조심스럽게 가져가려는 모습에 나는 황급히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하지 마.”
“아, 아니 무심코 궁금해서 그랬어. 미안.”
“진짜 유아린 죽이고 싶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