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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서예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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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처녀막이라는 벽을 깨서 뭔가 달라졌다는 건 알겠으나 저돌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적극적이지 않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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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걸음질 치면서 도망치려고 해도 어느새 창가에 등이 툭 닿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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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선 서예린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얼굴 표정부터 하얀 피부, 똘망한 눈동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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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받아 훤히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확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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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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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 쬐는 달빛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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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으로 신경이 흐르지 않고 오롯이 서예린이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는 나는, 그녀를 보면서 솔직한 감탄사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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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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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곤 했으나, 이렇게 집중해서 보니 서예린이 어째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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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매력적인 외형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배려하는 성격과 친절한 말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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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69라는 과히 독특한 모습을 유일하게 내게 보여준다는 게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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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우월감이 되어 내 가슴에 만족감으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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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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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은 서예린. 아까까지 보여주던 강압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손길 자체는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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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말 무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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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했다고? 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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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서예린이 하는 말을 무시했던 기억은 없기에 무슨 소리냐고 답하자, 입술을 살짝 내밀면서 한 걸음 더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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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과 가슴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 서예린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진심이냐고 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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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내가 글 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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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숲에 쓰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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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하는 마음으로 묻자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거야 평소에 하던 섹무새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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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야 원래 익명69로 하던 거니까 크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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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하던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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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 네가 나를 알잖아. 그,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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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x하고 싶다 라는 게시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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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하나의 메시지이자 시그널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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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평소 도배하던 걸 나한테 말하고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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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쓰는 건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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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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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얹어졌던 손이 슬며시 내 어깨로 올라온다. 목에 손을 두르며 깍지를 끼고는 찰싹 달라붙어 오는 서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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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예린이 풍기고 있는 체취, 고혹적으로 나를 유혹하는 눈빛, 가슴에 닿는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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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당장 밀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본능은 얼른 그녀를 탐하라고 속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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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비싼 술에 취하기도 했고 분위기가 야릇하게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섞게 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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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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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이라는 여인에게 내가 거나하게 취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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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지난번 비싼 술보다 훨씬 중독성이 강하고, 야릇하며, 사람을 충동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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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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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입술을 내미는 서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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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화답하듯 고개를 살짝 숙이려고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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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창밖에서 불어온 찬 바람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다시금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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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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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하게 목을 세우며 머리를 뒤로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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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이런 건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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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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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발을 들고, 목에 두른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긴 서예린이 입을 맞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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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친 입술에는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으며, 혀를 얽혀오는 건 다소 서툴렀고, 아이스티를 마셨는지 입에선 복숭아 향을 풍기고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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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이 담긴 키스 속에서도 서예린은 눈을 꼭 감은 채 오롯이 이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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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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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도 잊고 있었다는 듯 입술을 뗀 서예린은 가쁘게 호흡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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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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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해진 입가를 닦으며 내가 한마디 하려고 했으나 듣기 싫다면서 다시 달라붙는 서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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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뻣뻣하니 굳은 혀는 억척스럽게 나와 얽히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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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뜬 서예린. 눈동자가 취한 것처럼 몽롱하니 풀려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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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맞추고 있는 와중 점점 힘이 들어가는 하반신에 서예린의 손길이 툭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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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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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그녀의 양쪽 허벅지를 밑에서 받치며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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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들어서 옆에 있는 책상에 걸터앉게 만들자, 이제 됐다 생각했는지 서예린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고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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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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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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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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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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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음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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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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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속삭이며 나를 더욱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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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넘어봤던 선이었기에 두 번을 넘기란 어렵지 않았다. 책임 없이 그저 쾌락만을 추구하려는 우리가 다시 입을 맞추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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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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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들 찾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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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불이 켜지고, 문이 열리면서 훤칠한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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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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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뷔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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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역할이 달라졌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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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내가 목격자 역할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목격당한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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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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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들어온 한강 선배는 나와 서예린을 보면서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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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급히 입을 뗀 나였으나, 서예린은 오히려 놓기 싫다는 듯 이빨로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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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허해 그헤 아히하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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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그게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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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이 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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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예린을 떼어내고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혹시 찢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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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해서는 멍하니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한강 선배에게 일단 설명해 보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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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서 일어난 서예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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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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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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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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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서 촬영하던 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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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호 혼자 나오는 장면이었기에 다른 배우들은 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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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온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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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가 있냐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며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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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최이서도 말했지만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게 맞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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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죄책감이 느껴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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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최이서를 힐끔 보고 다시 책상에 엎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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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최이서를 보고 있자니 계속 가슴에 응어리가 커지는 게 내가 몹쓸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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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아 거기서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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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냥. 앉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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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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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은 아까부터 내가 본인을 들고 걸터앉혔던 책상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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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게 계속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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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이랑 떠들고 있는 서예린 쪽을 슬쩍 본 다음 거북이가 껍질로 숨듯이 또 엎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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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내게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 아직도 모르겠으며, 유혹에 져버린 스스로를 때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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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디 아파? 아니면 촬영이 너무 길어져서 지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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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아줘. 스스로가 미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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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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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면서 한숨을 내쉰 최이서가 슬쩍 손을 뻗어 내 귀를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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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대봐 신기한 거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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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귀를 계속 잡아당기는 최이서 때문에 슬쩍 고개를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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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귀 주변을 가린 최이서가 슬쩍 뺨에 입을 맞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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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소리가 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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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촉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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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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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퍼뜩 놀라서 최이서 쪽을 쳐다보자, 얼굴을 확 붉힌 채로 시선을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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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안현호와 주희 선배 쪽을 보면서 최이서가 한마디 툭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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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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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신기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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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갑자기 하는 게 효과가 좋다고 민지가 알려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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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랑 시선을 조금도 못 맞추고 있는 게, 풋풋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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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과 겉모습은 시크한 느낌이었는데 어떻게 이리 청순하게 썸을 탈 수 있는 걸까. 최이서라는 여자가 참 신비로우면서도 매력적이게 느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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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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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이랑 농밀하게 입을 맞췄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풋풋한 뽀뽀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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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둘 다 격하게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건 똑같았다. 사람에겐 각자의 매력이 있다던데 그걸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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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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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린으로 혼란스럽고 혼탁해졌던 마음이 최이서로 정화된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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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로 치면 서예린은 서큐버스고 최이서는 성녀 같은 포지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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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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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아래에서 팔이 감기며 내 머리를 낚아채는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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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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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앞자리로 와서는 어쭙잖은 레슬링 기술을 시전한 유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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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방금 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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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곤 우쭐거리면서 말하는데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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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촬영 안 하냐? 보면 계속 놀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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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한테 딴지 걸며 말하자 저쪽에서도 발끈했는지 바로 책상을 탕 내리치면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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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임.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거의 주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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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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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린은 우리 영화의 최종흑막으로 나오게 됐다. 게스트나 다름없어서 비중이 큰 배역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원래도 그냥 발랄한 여주인공 친구 역할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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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최종흑막 역할이던 주희 선배가 촬영부터 통솔까지 너무 일이 많아서 이쪽에 관심이 많은 유아린이 큰 배역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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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한강 선배 어디 갔음? 아까 너 찾으러 간다고 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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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서 집에 간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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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선배는 그대로 집으로 가셨다. 가기 전에 나한테 아주 쌍욕을 박으시면서 가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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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서예린까지 합류하고 자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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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모여라. 단체 장면 촬영하고 집에 가자. 나도 나와야 해서 우진이가 촬영 좀 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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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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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는 주희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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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쪽에서 촬영한다고 해서 냉큼 나가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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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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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엔 답지 않게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치마를 입고 있는 주희 선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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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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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유아린이 맡았던 그냥 분위기 환기용인 생기발랄한 캐릭터를 맡게 된 주희 선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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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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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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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에 슬라이스 치즈를 얹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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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좀 그러니까 칭찬이라도 억지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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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 어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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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 찢어지기 싫으면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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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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