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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목욕을 한 뒤로 며칠이 경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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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이후에도 꼬박꼬박 서란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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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구태여 밀어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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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주양강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힐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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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을 건네받으며,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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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 평소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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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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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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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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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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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계속 낮잠만 주무시진 않을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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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일어나서 산책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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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 때 말고는 쭉 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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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 한 번의 질문으로 핵심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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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행동에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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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사람 간의 거리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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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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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술 같은 고계 법술도 턱턱 쓰는 진선이 대인 관계 능력 부족이라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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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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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 관계 능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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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어느 정도는 훈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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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영원히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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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주양강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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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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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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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놔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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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같았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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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테 충고나 조언 같은 거 안 하는 성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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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이나 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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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동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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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굳게 다짐해도 사흘을 채 못 가는데 타인이 한마디 보탰다고 결과가 바뀔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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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충고든 조언이든 백날 해 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라는 게 서란의 평소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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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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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총 한 방이면 너도나도 공평하게 죽는 지구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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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대멸종 두세 번 정도는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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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대자에게 사교성이 전무하다니, 핵탄두 일가족이 도심을 걸어다녀도 이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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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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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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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얘기나 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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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슬쩍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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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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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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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찾아와서 꽃을 주시는 건 진군께서 제 호감을 사고자 하시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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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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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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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방식을 다소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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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을 바꿔? 어째서 그래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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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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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호의를 쏟는다고 친분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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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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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도 아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역효과가 나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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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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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효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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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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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뜻으로 그런 건데 불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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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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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진군 주변에 있는 벌레를 대신 잡아 준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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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고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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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옷 안에 들어간 벌레를 잡아 주겠다며 가슴팍에 손을 쑥 넣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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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교차한 양팔로 제 가슴팍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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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그건 좀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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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그쵸? 그게 바로 거리감이란 겁니다. 진군께서 제 숙소에서 튀어나오시거나, 대뜸 같이 목욕하자고 하셨을 때 제가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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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보다 친밀해지고 싶어서 그랬건만, 네가 그런 기분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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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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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오히려 말을 꺼낸 서란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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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무패의 논객답게 이번에도 박박 우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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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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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고쳤으면 하는 점이 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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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법원에 있을 때는 안 찾아오셨으면 하네요. 저한테도 사회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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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그렇다면 꽃은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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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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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꺾어 오는 꽃 한 송이, 과연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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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21세기 지구였다면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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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계 기준으로는 아슬아슬하게 OK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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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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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꽃다발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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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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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굳이 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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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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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았을 때 가장 기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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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받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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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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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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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께서요?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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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러 올 때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매번 다른 꽃을 들고 왔었지. 그 마음이 기뻐서, 어릴 적 나는 구은랍이 방문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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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수선도 첨천답층진군께 배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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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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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겠느냐? 몸을 씻는 법도, 머리를 빗는 법도, 단장하는 법도, 모두 그에게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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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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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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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 구은랍(인간 남성)을 향한 서란의 호감도가 소폭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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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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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비승 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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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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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도시, 수많은 재판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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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양강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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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과 동행하는 것도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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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 자체가 수더분해서 그런지 원영기에 불과한 보좌관들과도 데면데면하게나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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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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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적하면 대부분은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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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법정에서 정숙하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기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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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낮잠을 자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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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행은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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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도시와 다음 도시 사이에 있는 무인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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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섬 전체가 꽃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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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머리를 빗겨 주던 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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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는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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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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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조절이 영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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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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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자기 단말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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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엽서가 한 장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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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발신자는 등백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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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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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편지함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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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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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지만 예전처럼 훔쳐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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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안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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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직접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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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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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인이 이영근 조화에 성공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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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지심 수행 말이구나. 몇 년 정도 걸렸다고 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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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깐 고민하다가 당사자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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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관없다는 등백월의 답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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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75년 태성기도 있는데 이영근 조화 40년 정도가 뭐 그리 대수겠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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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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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걸렸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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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괜찮은 선골을 지닌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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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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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손달의 단말기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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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단말기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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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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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잽싸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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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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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대출 광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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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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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다시 서란의 단말기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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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인가 싶어서 얼른 확인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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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보낸 통신 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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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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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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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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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도시가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네요. 순회 재판 순서를 하나 건너뛰고 다다음 도시로 가라는 법원의 공문이에요. 사유는 딱히 안 적혀 있네요.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떠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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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곧장 무인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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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연말, 서란의 순회 판사 임기가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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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별의별 범죄가 다 있다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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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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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금죽문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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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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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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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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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오겠다고 하면 어찌 해야 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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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민은 의외로 싱겁게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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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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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헤어지는 편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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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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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무래도 내가 틀렸던 모양이야. 너를 보고 구은랍의 사생아 운운했던 얘기 말이다. 첫 대면부터 너무 무례했었지. 그것도 사과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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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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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그 도시를 떠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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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이 화제를 기피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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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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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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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쯤 직감했다. 냄새가 똑같기는 하다만 단지 그뿐이었지. 너와 구은랍은 본질적인 부분이 다르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여태 억지를 부린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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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솔직해지신 이유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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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홀가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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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니까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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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돌아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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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순회 도중이라면 몰라도 어물쩍 뭉개고 문파까지 따라가는 건 여러모로 민폐일 테니까. 이게 바로 적절한 거리감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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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결심은 확고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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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치를 보다가 농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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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은 패배를 인정하시는 거죠? 전승 기록이 깨졌으니 더는 무패의 논객이 아니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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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논쟁 같은 거 해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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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짓말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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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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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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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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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끌어 봤자 헤어지기만 힘들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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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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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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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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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받기만 했잖아요. 마지막인데 저도 선물 하나쯤은 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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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잽싸게 상점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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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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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단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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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단말기를 건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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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연락처 등록해 놨어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말벗 정도는 되어 드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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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단말기를 받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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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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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비속불박진군은 그렇게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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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란은 주양강의 통신 엽서 폭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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