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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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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목욕을 한 뒤로 며칠이 경과했다.
주양강은 이후에도 꼬박꼬박 서란을 만나러 왔다.
서란도 구태여 밀어내지는 않았다.
슬슬 주양강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힐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붉은 꽃을 건네받으며, 서란이 물었다.
“주양 진군, 평소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낮잠을 잔다.”
“그리고요?”
주양강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예, 계속 낮잠만 주무시진 않을 거 아니에요.”
“가끔은 일어나서 산책도 한다.”
산책할 때 말고는 쭉 잔다는 뜻이었다.
서란은 단 한 번의 질문으로 핵심에 도달했다.
주양강의 행동에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단지 사람 간의 거리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이었다.
서란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전송술 같은 고계 법술도 턱턱 쓰는 진선이 대인 관계 능력 부족이라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대인 관계 능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기술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훈련이 필요했다.
안 그러면 영원히 못할 테니까.
서란은 주양강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조언할 것인가.
가만히 놔둘 것인가.
원래 같았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남한테 충고나 조언 같은 거 안 하는 성격이니까.
개방성이나 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 굳게 다짐해도 사흘을 채 못 가는데 타인이 한마디 보탰다고 결과가 바뀔 리 없었다.
결국, 충고든 조언이든 백날 해 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라는 게 서란의 평소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주양강은 총 한 방이면 너도나도 공평하게 죽는 지구인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대멸종 두세 번 정도는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절대자에게 사교성이 전무하다니, 핵탄두 일가족이 도심을 걸어다녀도 이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을 터였다.
서란은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한번 얘기나 해 보기로.
서란은 슬쩍 운을 뗐다.
“주양 진군,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래? 물어보거라.”
“매번 찾아와서 꽃을 주시는 건 진군께서 제 호감을 사고자 하시기 때문이지요?”
주양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그렇다면 방식을 다소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방식을 바꿔? 어째서 그래야 하는 것이냐?”
서란은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말했다.
“일방적으로 호의를 쏟는다고 친분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그냥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도 아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역효과가 나기도 하거든요.”
주양강이 물었다.
“역효과라고?”
“예,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좋은 뜻으로 그런 건데 불쾌하다고?”
서란이 말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진군 주변에 있는 벌레를 대신 잡아 준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십니까?”
“그야 고맙겠지.”
“그러면 옷 안에 들어간 벌레를 잡아 주겠다며 가슴팍에 손을 쑥 넣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주양강은 교차한 양팔로 제 가슴팍을 가렸다.
“음,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그건 좀 그렇구나.”
“그쵸? 그쵸? 그게 바로 거리감이란 겁니다. 진군께서 제 숙소에서 튀어나오시거나, 대뜸 같이 목욕하자고 하셨을 때 제가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내 딴에는 보다 친밀해지고 싶어서 그랬건만, 네가 그런 기분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안하구나.”
주양강은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자 오히려 말을 꺼낸 서란이 당황했다.
자칭 무패의 논객답게 이번에도 박박 우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주양강이 물었다.
“혹시 내가 고쳤으면 하는 점이 더 있느냐?”
“어... 법원에 있을 때는 안 찾아오셨으면 하네요. 저한테도 사회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알겠다. 그렇다면 꽃은 어떠냐?”
서란은 생각에 잠겼다.
매번 꺾어 오는 꽃 한 송이, 과연 괜찮은가.
여기가 21세기 지구였다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선계 기준으로는 아슬아슬하게 OK였다.
서란이 말했다.
“한 송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꽃다발도 아니니까요.”
“역시...!”
“그런데 왜 굳이 꽃인가요?”
주양강이 대답했다.
“내가 받았을 때 가장 기뻤으니까.”
“누구한테 받으셨는데요?”
“구은랍이다.”
서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첨천답층진군께서요? 꽃을?”
“나를 만나러 올 때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매번 다른 꽃을 들고 왔었지. 그 마음이 기뻐서, 어릴 적 나는 구은랍이 방문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혹시 수선도 첨천답층진군께 배우셨나요.”
주양강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어디 그 뿐이겠느냐? 몸을 씻는 법도, 머리를 빗는 법도, 단장하는 법도, 모두 그에게 배웠지.”
“정말요?”
“그래.”
첨천답층진군 구은랍(인간 남성)을 향한 서란의 호감도가 소폭 감소했다.
*****
2년 뒤, 비승 41년.
서란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수많은 도시, 수많은 재판을 거쳤다.
물론 주양강도 함께였다.
주양강과 동행하는 것도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성향 자체가 수더분해서 그런지 원영기에 불과한 보좌관들과도 데면데면하게나마 지냈다.
아직도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했다.
그래도 지적하면 대부분은 고쳐졌다.
가만 생각해 보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법정에서 정숙하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기는 했었다.
그 대신에 낮잠을 자서 문제였지.
현재, 일행은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전 도시와 다음 도시 사이에 있는 무인도였다.
특이하게도 섬 전체가 꽃밭이었다.
서란의 머리를 빗겨 주던 주양강이 물었다.
“아프지는 않느냐?”
“많이 아프네요.”
“힘 조절이 영 힘들구나.”
그때, 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란은 소매에서 자기 단말기를 꺼냈다.
통신 엽서가 한 장 도착해 있었다.
놀랍게도 발신자는 등백월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서란은 편지함을 열었다.
주양강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궁금했지만 예전처럼 훔쳐보지는 않았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그 대신에 직접 물어봤다.
“누가 보낸 것이냐?”
“아, 지인이 이영근 조화에 성공했다고 하네요.”
“오채지심 수행 말이구나. 몇 년 정도 걸렸다고 하더냐?”
서란은 잠깐 고민하다가 당사자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상관없다는 등백월의 답신을 받았다.
하기야 75년 태성기도 있는데 이영근 조화 40년 정도가 뭐 그리 대수겠냐 싶었다.
서란이 말했다.
“40년 걸렸대요.”
“꽤나 괜찮은 선골을 지닌 모양이구나.”
“그런가 봐요.”
이번에는 손달의 단말기가 울렸다.
손달은 단말기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주양강이 잽싸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아뇨, 대출 광고였습니다.”
“그렇구나.”
이번에는 다시 서란의 단말기가 울렸다.
등백월인가 싶어서 얼른 확인해 봤다.
법원이 보낸 통신 엽서였다.
서란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응?”
“왜 그러느냐?”
“다음번 도시가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네요. 순회 재판 순서를 하나 건너뛰고 다다음 도시로 가라는 법원의 공문이에요. 사유는 딱히 안 적혀 있네요.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떠나야겠어요.”
일행은 곧장 무인도를 떠났다.
*****
그 해 연말, 서란의 순회 판사 임기가 종료됐다.
세상에는 별의별 범죄가 다 있다는 걸 배웠다.
정말 유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일행은 금죽문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었다.
서란은 골머리를 앓았다.
따라오겠다고 하면 어찌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고민은 의외로 싱겁게 해결됐다.
주양강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 도시에서 헤어지는 편이 좋겠구나.”
“진심이세요?”
“그래, 아무래도 내가 틀렸던 모양이야. 너를 보고 구은랍의 사생아 운운했던 얘기 말이다. 첫 대면부터 너무 무례했었지. 그것도 사과하고 싶구나.”
사생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따지고 보면 그 도시를 떠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 화제를 기피한 탓이었다.
서란이 물었다.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쯤 직감했다. 냄새가 똑같기는 하다만 단지 그뿐이었지. 너와 구은랍은 본질적인 부분이 다르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여태 억지를 부린 게지.”
“이제 와서 솔직해지신 이유는요?”
주양강이 홀가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이니까 그런 거다.”
“저희가 돌아가니까요?”
“그래, 순회 도중이라면 몰라도 어물쩍 뭉개고 문파까지 따라가는 건 여러모로 민폐일 테니까. 이게 바로 적절한 거리감이라는 거겠지.”
주양강의 결심은 확고한 듯했다.
서란은 눈치를 보다가 농담을 던졌다.
“그 말씀은 패배를 인정하시는 거죠? 전승 기록이 깨졌으니 더는 무패의 논객이 아니게 됐네요?”
“사실 논쟁 같은 거 해 본 적 없다.”
“아, 거짓말이었군요...”
주양강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벌써요?”
“시간 끌어 봤자 헤어지기만 힘들 것 같구나.”
서란이 말했다.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왜 그러느냐?”
“여태 받기만 했잖아요. 마지막인데 저도 선물 하나쯤은 드려야죠.”
서란은 잽싸게 상점가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손에 단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서란이 단말기를 건네며 말했다.
“제 연락처 등록해 놨어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말벗 정도는 되어 드릴 수 있어요.”
주양강은 단말기를 받으며 대답했다.
“그리하도록 하마.”
서란과 비속불박진군은 그렇게 작별했다.
*****
이후, 서란은 주양강의 통신 엽서 폭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