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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말이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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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순회 재판을 진행하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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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은 무전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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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범이라서 죄질이 굉장히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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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릴 재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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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회로 영상도 확보했고, 증인도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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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봉 좀 두드리고 투옥시키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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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여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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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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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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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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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새하얀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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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색 사슴뿔과 청자색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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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법정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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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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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순회 판사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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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여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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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구은랍의 사생아라도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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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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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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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순회 판사한테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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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은랍은 또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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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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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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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의 여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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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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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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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무전취식 피해 점주들) 숫자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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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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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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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좀 해 달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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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순회 판사이니, 아예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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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앞의 여인을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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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색도 난색도 아닌 중성색의 뿔과 용안, 반인반룡만의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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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격차는 가늠조차 안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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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굉장히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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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진선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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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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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봉의 무게를 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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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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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등선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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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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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진군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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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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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이 성이고 강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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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복성이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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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나저나 너, 구은랍과는 무슨 관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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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 도대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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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알을 대굴대굴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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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대호법 손달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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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손달은 서기용으로 구비되어 있던 공책에 뭔가를 적어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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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의 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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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주양 진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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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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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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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첨천답층진군의 이름이 구은랍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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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의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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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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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과 비속불박진군, 둘 다 선계에 단 일곱 명뿐인 지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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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대자들 사이의 일은 모르는 게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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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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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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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첨천답층진군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생아라니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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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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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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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확신에 찬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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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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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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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게서 구은랍 그 녀석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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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류 법관한테서는 첨천답층진군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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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조심스레 귀를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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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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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팔뚝을 킁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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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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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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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꼬박 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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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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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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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취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냄새는 영혼이나 혈통 같은, 좀 더 근원적인 무언가니까. 이래도 네가 구은랍의 혈육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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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하계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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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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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라, 자기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이들이 항상 내뱉는 소리지. 참 성의 없게도 둘러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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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관청에 가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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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도 당연히 위조했겠지. 구은랍 그 녀석은 기록보관소의 수장이니 어렵지 않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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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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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답답함, 정말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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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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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꿍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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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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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허리춤에 손을 턱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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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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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밉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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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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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발뺌해도 내 후각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만 포기하고 인정하거라. 무엇보다, 지선의 조력이 아니었더라면 네가 그 어린 나이에 태성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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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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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반응, 당황했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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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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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있던 손달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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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사실은 첨천답층진군의 숨겨진 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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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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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이 680세에 태성기 수사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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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 등록도, 선골 검사 결과지도 모두 위조 문서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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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전부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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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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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선계 태생이라는 가설은 금죽문에서 관찰한 사실 관계와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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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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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도 서란과 주양강의 설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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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누가 패배하게 될지는 자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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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쟁의 승패란 본디 논리력보다는 지구력으로 결판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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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이 항복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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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죠, 제가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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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정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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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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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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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면 썩 괜찮았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테니까.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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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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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말고, 이 몸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무패의 논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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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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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득 억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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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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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원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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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서란의 태도 또한 불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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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양 진군께서는 첨천답층진군께 관심이 무척 많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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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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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냄새가 어쩌니, 사생아가 어쩌니 하시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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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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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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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방어적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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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도 아까와는 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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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럭저럭 친분이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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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속 이름으로 부르셨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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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도원향도 만든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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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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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도원향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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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와 구은랍 둘이서 창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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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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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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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사적으로 손달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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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손달은 또 공책에 뭔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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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란에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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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재는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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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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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굳이 탈퇴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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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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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 꼴보기 싫어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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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어떤 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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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낯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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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방금 지어낸 핑곗거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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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막고 있던 귀를 슬그머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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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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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 담긴 의미는 대동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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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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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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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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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설마 진짜로 치정 문제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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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이 첨천답층진군과 함께 도원향을 창설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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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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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만든 도원향에서 탈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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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보기 껄끄러운 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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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 첨천답층진군의 사생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물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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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신경 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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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제각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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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만 같았던 약속, 유혹과 배신, 혹은 일방적인 연심과 절절한 고백, 그리고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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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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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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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지선끼리의 치정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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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서라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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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사건의 전말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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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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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과 마찬가지로 전조 없는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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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궁금하겠지만 무전취식 상습범은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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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유 도시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자기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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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은 법원에서 먹고 씻고 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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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 만큼은 좀 편하게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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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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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호법,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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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말씀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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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선 분들도 비속불박진군처럼, 어... 호탕하시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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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냐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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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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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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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만 저런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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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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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그런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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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저런 엉뚱함 또한 천재의 일면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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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일면? 하긴, 지선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정도면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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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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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고작 3000년 만에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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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요? 비속불박진군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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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혹시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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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만에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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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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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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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5대 요소는 영근, 선골, 오성, 공법, 자원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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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개 정도 없어도 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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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난생처음으로 다른 수도자들이 자신을 보며 느낀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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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불공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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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은 또다시 법원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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