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es
rupy1014 f66fe445bf Initial commit: Novel Agent setup
-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351 lines
11 KiB
Markdown

서란은 대기실에서 우화 의식의 시작을 기다렸다.
올 한 해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살아생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인계의 풍경을 마지막으로나마 뇌리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물론 유나라 중부의 고향에도 들렀다.
다만 류씨 가문을 방문하지는 않았다.
가까운 친족은 대부분 영면에 들었고, 남은 건 면식조차 없는 이들뿐이었던 탓이다.
나중에 위장용 신분의 부고 소식이나 전해 줄 생각이었다.
대기실 내부는 시리도록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는 의식용 예복의 착용을 돕는 하녀들 덕분에 활기가 넘쳤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란 혼자만이 남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침내 우화 의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서란은 차분하게 대기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쭉 뻗은 길이 보였다.
서란은 눈 덮인 길을 묵묵히 걸었다.
서대륙의 역대 우화 예정자들, 즉 모든 화신기 수사들 역시 거쳐간 식순이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
공손히 모아 잡은 손에 들린 기다란 목패.
목패에 적힌 출신지와 이름 석 자.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인파가 보였다.
행로 좌우에 수많은 수도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좌측이 금작파, 우측이 오죽문이었다.
막 수선에 입문한 열 살 무렵의 연기기 수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경하 드립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다분히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일단 인계를 떠나 선계로 비승하고 나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화신기 수사가 되어 비행능력이 생기면 대지를 디딜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란은 수도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계속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주변 수도자들의 연령대는 점점 높아져 갔다.
장선화를, 이아금을, 금영영을, 호혜문을, 그리고 왕 수사를 차례차례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
금교월과 여무진이 외쳤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경하 드립니다!”
제단에 도착한 서란은 홀로 계단을 올랐다.
그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오르막길.
수선의 본질이기도 했다.
서란은 총 125개의 계단을 거쳤다.
연기기 수사와 범인의 한계 수명은 정확히 125년.
범인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계단을 모두 오르자 화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서란은 자신의 명패를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유나라 중부의 류서란’이라는 글귀가 불타올랐다.
오늘, 범인 류서란은 죽는다.
*****
수도문파의 최종 목표는 선계로 비승하는 것이다.
고로 구성원과 기술, 조직도, 의결 기관 등 수도문파의 모든 체계는 오로지 화신기 수사의 배출을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건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란이 제단 꼭대기에 자리를 잡자 오죽문 전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문파 설립 당시부터 주요 건축물 대부분은 진법적인 활용을 염두에 둔 채 배치됐다.
그 건물들을 축으로 삼아 진법이 발동됐다.
거미줄 같은 연결망을 통해서 산맥의 천지영기가 제단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꼭대기에 앉아 있는 서란에게로 향했다.
제단 근처의 영기 농도는 일시적으로나마 선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천지영기를 물에 비유한다면 서란은 범람 직전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쌓아올린 수행이었으니까.
하단전에 위치한 금단.
중단전에 위치한 영근.
상단전에 위치한 원영.
서란의 삼단전이 공명했다.
천지영기는 계속해서 오행법력으로 변환됐다.
적색, 흑색, 청색, 백색, 황색의 빛무리가 서란을 휘감은 채 그 몸집을 점차 불려 갔다.
서란에 의해서 응집된 오행법력은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인력의 근원이 되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인력의 크기는 마침내 특이점을 돌파했다.
이내 우주가 서란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지영기가 폭포수처럼 내리꽂혔다.
의식 장소, 더 나아가 산맥의 상공이 구멍이라도 뚫린 듯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서대륙 전역의 하늘이, 구름이, 바람이, 눈이 서란의 머리 위로 밀어닥쳤다.
해가 떠 있음에도 푸르름을 잃어 버린 천공.
산봉우리를, 구름을, 거목을, 바위를 한순간에 휩쓸어 간 광풍.
갑작스레 종말을 맞이한 것만 같은 세상.
서대륙의 모든 생명이 이변을 감지했다.
노력한다고 숨길 수 있는 혼란이 아니었다.
미약한 영감이라도 지닌 요수나 요괴, 영물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이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광풍은 빠르게 잦아 들었다.
하늘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지상에는 뿌리째 뽑힌 아름드리나무의 흔적과 바위가 있던 구덩이, 무너진 산봉우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그 시각, 우화 의식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란을 중심으로 팽창과 수축을 급격히 반복하던 오행법력의 구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던 오방색 빛무리는 서서히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오색 운무가 되어 서란의 중단전에 스며들었다.
삼라만상의 기운을 품은 안개.
즉, 혼원법력이었다.
선계에서 원영기 다음 경지를 운무기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서란은 감고 있던 눈을 반개했다.
동공 안쪽, 오색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천기를 읽는 영안, 관천안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복잡다단한 천체의 흐름 너머로 인계와 선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밝은 궤적이 보였다.
분명 저 빛을 따라 비승하는 것이리라.
서란은 다시금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했다.
중단전에는 혼원법력 이외에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자라난 상태였다.
여섯 번째 영근, 풍영근이었다.
화신기 수사가 지닌 비행능력의 근원이며 선계로 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서란은 풍영근과 혼원법력을 공명시켰다.
그러자 한 줄기 실바람이 작은 육체를 휘감았다.
두 다리가 점차 대지의 속박을 벗어던졌다.
유나라 중부의 류서란.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소녀.
타의로 고향을 등진 공녀.
인연이 닿아 수도문파에 입문한 일영근자.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수도자.
그저 사랑만을 바랐던 아이.
깨달음을 얻어 축기에 성공했다.
용과의 만남을 계기로 금단을 형성했다.
대적자를 쓰러뜨리고 원영을 응집했다.
그리고 오늘, 하늘에게 스스로를 증명했다.
범인으로서 죽고 영물로서 다시 태어났다.
비로소 화신기 수사가 되었다.
수도자들의 함성이 산맥을 뒤흔들었다.
*****
오죽문과 금작파는 공동으로 화신기를 배출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수도문파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셈이었다.
축제가 안 열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수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
축기기 수사만 되어도 술에 취하지 않을 뿐더러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강했다.
그래서 의식처럼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사용했다.
수선계 축제에서 술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였다.
그 대신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마셨다.
맹물, 꿀차, 꽃차, 그냥 차, 과즙 음료, 탄산수, 발효 음료, 식초 음료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신제품 개발은 보통 연단술사들의 몫이었다.
이아금이 큰 잔을 하나 내밀며 말했다.
“언니, 내용물 확인하지 말고 한 모금만 마셔 봐.”
“뜬금없이?”
“아아아, 빨리이이.”
가족끼리 갑자기 웬 애교인가 싶었다.
축기기 수사니까 술에 취했을 리는 없었다.
그냥 축제 분위기에 들뜬 모양이었다.
서란은 정체불명의 액체를 음미하다가 말했다.
“이거 곰탕 국물 아니야?”
“틀렸습니다! 내용물을 확인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곰탕 맛이었는데...?”
서란은 반쯤 빈 잔을 들여다봤다.
곰탕하면 떠오르는 뽀얀 국물은 없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맹물이었다.
서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와, 진짜 신기하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이아금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매에서 잘 접힌 종이를 꺼냈다.
종이 안에는 회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이아금은 가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맹물에다가 이 가루를 탄 거야.”
“이게 한 잔 분량이야?”
“아니, 커다란 물통 하나에 한 꼬집이야.”
서란은 전생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합성 착향료 전문가가 쓴 책이었다.
미후각이 얼마나 속이기 쉬운지 적혀 있었다.
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서란은 다른 음식도 재현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아금은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친구들이랑 놀러갔다.
서란은 바람이나 쐴 겸 한적한 장소로 갔다.
그러다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에 도착했다.
의식이 끝나고 내리던 눈은 그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흩날렸다.
별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담청이었다.
“서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느냐?”
“바람을 좀 쐬고 있었습니다. 담청 님은 축제 잘 즐기셨나요?”
“만끽하고 있다.”
서란은 고개를 돌려 담청을 바라봤다.
담청의 두 손에는 군것질거리가 잔뜩 들려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여의주를 되찾고 떠나려던 소용녀.
이름을 지어 달라는 갑작스러운 부탁.
담청과 함께 보낸 수십 년의 세월.
서란은 돌연 질문했다.
“담청 님, 이름은 마음에 드시나요?”
“이름? 당연하지, 누가 지어 준 이름인데.”
“그러시다면 다행이네요.”
연일 계속되던 축제가 끝날 무렵,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