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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금영영은 외출 채비를 했다.

오늘은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금영영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일찍 일어났더니 되게 피곤하네...”

서란과 담청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안 늦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금영영이 하도 안 일어난 탓이었다.

제 발 저린 금영영은 황급히 법용술을 운용했다.

팔찌의 쇠구슬이 번쩍이더니 방패 법기가 됐다.

보호자 삼인방은 방패 위에 올라탔다.

마침내 도착한 글방.

복도에서부터 학생들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셋은 교실 뒷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그러다가 먼저 온 학부모들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눈인사가 오고 간 이후, 서란 일행은 학부모 무리에 합류했다.

참관 수업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호혜문이 먼저 경전의 글귀를 읽으면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뜻풀이가 끝나면 간단한 문제도 냈다.

호혜문이 말했다.

“답을 아는 학생?”

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손을 들었다.

서란은 연출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깐 했다.

때묻은 어른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났다.

자녀의 대견한 모습을 지켜본 학부모들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용돈을 잔뜩 받은 학생들도 기뻐했다.

식산대붕도 마찬가지였다.

보호자 삼인방 중 서란이 대표로 말했다.

“대붕아, 너무 펑펑 쓰면 안된다?”

“네.”

“그래, 친구들이랑 잘 놀고.”

식산대붕은 인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갔다.

꼬마들 사이에 커다란 오목눈이가 끼어 있는, 뭔가 굉장히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래도 자기들끼리는 마냥 즐거운 듯 보였다.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누던 호혜문이 삼인방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참관 수업은 어떠셨나요? 혹시 건의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공적인 자리라서 그런지 평소처럼 친근한 말투는 아니었다.

담청과 금영영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면학 분위기가 참 좋구나.”

“학생들의 학구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혜문과 담청, 금영영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직 대답하지 않은 서란에게 쏠렸다.

서란은 거짓말쟁이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혜문 선생님의 글방에 대붕이를 입학시킨 건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건의 사항은 딱히 없습니다.”

담청의 탐정안이 번뜩였다.

진실, 그리고 거짓.

서란은 건의하고 싶은 게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담청이 물었다.

“서란, 사실은 건의 사항이 있었던 것 아니냐?”

“어떻게 아셨어요?”

“음, 그건... 너와 내 사이 아니더냐.”

서란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담청 님은 속일 수 없군요...”

“어떤 건의 사항이었길래 그러느냐?”

“그게...”

서란은 계속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금영영도 거들었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마침내 서란은 시커먼 속내를 털어놨다.

“사실, 학생들 권장 도서 목록에 인형술 입문서를 추가해 달라고 건의하려다가 말았어...”

금영영이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하면 혹시나 다음 세대에는 인형술이 비주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아...”

서란은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왜 일영근자에게는 수도문파 운영에 관한 의결권이 없을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인형술을 필수 교육 과정에 넣었을 텐데... 왜 다들 이 좋은 인형술을 안 배우려고 하는 걸까?”

금영영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오죽문과 금작파가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집단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삼환문 꼴은 안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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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아이들은 개울가로 향했다.

용돈은 벌써 다 쓴 지 오래였다.

애들이란 원래 그런 법이었다.

식산대붕과 여자애들은 소꿉놀이를, 남자애들은 나무 타기를 하며 놀았다.

여자애 한 명이 치맛자락을 걷어올리고 개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왔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약간만 가미되면 돌멩이도 물고기가 될 수 있었다.

어부 겸 아빠 역할인 소녀가 말했다.

“여보, 나 왔어요.”

마찬가지로 어부 겸 엄마 역할인 소녀가 말했다.

“다녀 오셨어요? 힘드실 텐데 어서 옷 갈아 입고 쉬세요. 저녁 차려 드릴게요.”

“항상 고마워요.”

“뭘요.”

뒤이어 자식 역할의 소녀들과 식산대붕이 줄줄이 집으로 돌아왔다.

저마다 손에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부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도 모두 어부라는 설정이었다.

물고기(돌멩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은 일가족은 일제히 수행을 시작했다.

어부가 웬 수행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수도문파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다른 가족들도 으레 그렇게 사는 줄 아니까.

여자애들이 굉장히 그럴싸한 무술 동작을 선보이고 있을 무렵, 남자애들은 열매를 따고 있었다.

일부는 나무 위에서 열매를 던지고, 일부는 아래에서 열매를 받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열매를 받던 소년 중 한 명이 물었다.

“형, 이거 덜 익은 거 아니에요?”

나무 위에 있던 소년이 대답했다.

“아니야, 그거 다 익은 거야.”

“얘만 색이 녹색인데요?”

“한 입만 먹어 봐. 달다니까?”

나이가 어린 소년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손에 든 열매를 덥썩 베어 물었다.

그리고 오만상을 지었다.

“덜 익어서 떫잖아요!”

형이라 불린 소년은 박장대소했다.

세상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너무 웃어서 복근이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소년은 중심을 잃었다.

위태롭게 허우적거리는 두 손, 당황한 시선, 뒤로 쏠리는 몸.

그다지 높은 나무는 아니었지만 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떫은 열매를 먹었던 소년이 외쳤다.

“혀, 형!”

다급한 외침에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처음에는 나무 밑의 소년, 이내 나무 위의 소년.

식산대붕도 마찬가지였다.

찰나의 순간, 식산대붕은 깨달았다.

나무 위의 소년은 완전히 중심을 잃었다.

홀로 자세를 회복할 가능성은 전무, 남은 건 날개 없는 추락뿐이었다.

운이 아무리 좋아도 최소한 골절이었다.

나무 아래에서 열매를 받던 남자애들은 일제히 추락 예상 지점으로 달렸다.

하지만 소용 없을 터였다.

부상자 숫자만 늘어날 게 분명했다.

식산대붕은 저도 모르게 날개를 펼쳤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친구를 공중에서 받은 뒤, 자기 몸으로 보호하면서 착지할 계획이었다.

서란이 특별 제작한 추진기가 울부짖었다.

아기 새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두려움이라는 족쇄를 부수고 날아올랐다.

하지만 식산대붕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딱 하나 존재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다른 소년이 친구의 팔뚝을 냉큼 붙잡았다.

“괜찮아?”

“고, 고마워...”

“조심 좀 해.”

두 소년이 올라탄 나뭇가지 아래를 식산대붕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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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자신의 제자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헤어진 형제자매를 떠올렸다.

말문이 트이자 마자 어머니와 떨어진 아이들.

나이가 비슷해서 더 그랬다.

호혜문의 아버지는 사소한 실수에도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경전을 암송하다가 잠깐만 버벅거려도, 글씨가 조금만 삐뚤어져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벌을 받았다.

호혜문의 아버지가 직접 매를 든 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병약했으니까.

대신 하인에게 숫자를 불렀다.

대부분은 오십, 가끔은 백.

회초리를 맞을 횟수였다.

하인은 묵묵히 숫자를 세며 회초리를 휘둘렀다.

호혜문도 셀 수 없이 벌을 받았다.

멍이 든 종아리, 눈물로 번진 시야, 매서운 회초리 소리, 순서를 기다리며 떠는 형제자매들, 아버지의 차가운 표정.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만은 선명했다.

호혜문의 아버지는 이십여 년 전에 죽었다.

병약했던 것 치고는 오래 살았고, 온갖 명약을 복용했던 것 치고는 일찍 죽었다.

하지만 호혜문의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거나, 남을 죽였다.

누군가는 독약을 삼키고 자살했다.

누군가는 칩거한 채 무기력하게 메말라갔다.

누군가는 칼을 휘둘러 하인들을 여럿 죽인 뒤에 저택 깊숙이 연금됐다.

한때 더없이 총명했던 소년 소녀들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하던 날개는 오래 전에 꺾였다.

당사자가 죽은 이후에도 아버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형제자매를 얽매고 있었다.

개중에 재녀 호혜문보다 못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특하고 재주가 넘쳤다.

단지 영근을 지닌 호혜문은 열 살에 왕도를 떠났고, 그들은 남았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호혜문은 깨어났다.

책상 가득 보이는 서류 더미.

참관 수업과 관련된 문서 작업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호혜문을 깨운 소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그리고 젊은 사내의 목소리.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호혜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 주변에 폐가 될 테니까.

문을 연 호혜문이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사병을 앓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한때 문제아였던 소년이, 한때 호혜문의 제자였던 학생이, 어느덧 스물 중반이 된 청년이.

오밤중에 옛 선생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와서 제 마음을 고백했다.

과거, 문제아였던 소년을 어째서 포기하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호혜문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꽃이 필지 여부는 물을 주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라고.

길모퉁이에서 그 대화를 엿들었던 그 순간부터 소년은 호혜문을 사랑하게 됐다.

청년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 순간부터 선생님은 제 전부였다고.

제 가슴은 선생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고백을 마친 청년에게, 호혜문은 그가 기억하던 선생님의 얼굴로 대답했다.

“삶이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란다. 그렇기에 남에게 휘둘려서는 안되지. 나는 잊거라, 그 대신에 나의 가르침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스승이란 제자의 디딤돌이니까.”

청년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호혜문이 선생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가르침일 것이라는 사실을.

사내는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호혜문은 나이 든 제자가 무사히 족쇄를 끊고 날아오르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