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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카멜롯에 저녁이 찾아왔다.
그러나, 어둠은 찾아오지 않는다.
해가 저묾과 동시에 거리의 조명들이 차례로 켜졌다. 가게마다 걸어둔 마석등이 반짝이고, 가게에서 새어나온 빛들이 거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낮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황도.
그런 황도를 걸어 나진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확실히 제국의 수도가 다르긴 다르네요.’
나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지하도시에선 물론이고,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나 다른 귀족의 영지에서도 본 적 없는 양식의 건물들이다. 다른 곳보다 최소 수십 년 정도 기술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나진은 문득 생각했다.
-마탑이 있잖아.
‘예?’
-마법사가 머무르는 곳은 기본적으로 발전이 빨라. 마탑이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여기엔 마탑이 일곱 채나 있잖아?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멀린은 묘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마법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마법사만큼이나 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직종이 또 없거든.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면······.
‘마법사와 기술 발전의 상관관계’ 라는 주제로 멀린이 대뜸 강의를 시작한 가운데, 나진은 급속도로 흥미를 잃었다.
멀린과 함께 지낸 지 어언 반년.
하루 24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종일 멀린과 붙어있는 나진이었기에 ‘멀린의 모든 말이 귀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진은 적당히 멀린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진짜 대단한 사람인 건 맞긴 한데.’
천년을 넘게 살아온 대마법사.
11개의 별을 가진 대성좌.
숱한 마법사들이 멀린의 목소리를 한번 듣기 위해 저 하늘의 별을 향해 기도한다곤 하지만, 멀린과 반년 정도 붙어있다 보면 그 생각이 좀 바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또, 내가 처음으로 마탑을 건설했을 때를 빠트릴 수가 없는데······.
멀린은 기본적으로 수다쟁이였고.
자기 자랑이 많았으며.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다가도 이곳저곳으로 화두가 튀어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곤 했다. 대개 그 마무리는 자신의 경험으로 귀결되는 편이었고.
‘이런 대화법을 뭐라 하더라.’
나 때는 말야, 로 귀결되는 대화법.
세간에서 이런 대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뭐라 부르는지 떠올려본 나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멀린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 않은가. 은인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한 일이다······.
-나 때는 말야.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와 정말요.’
적당히 멀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잘 정비된 도로를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옷을 진열해둔 옷가게. 그 앞에 걸터앉아있던 디에타가 나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늦었습니까?”
“아뇨. 딱 맞춰왔어요.”
디에타가 나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요.”
“식당을 하나 예약해놨는데, 거긴 드레스코드가 있거든요. 그러니 깔끔하게 옷 한 벌 맞추고 가도록 해요.”
“옷 말입니까?”
“네, 당신 그거 말고 다른 옷 없잖아요? 이번 기회에 한 벌 맞춰두도록 해요. 앞으로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를 자주 가게 될 테니까요.”
앞으로 자주?
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디에타가 가게를 돌아 다니는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 짧은 대화와 함께 백금화 몇 닢을 쥐여주자 직원이 재빨리 어디론가 튀어 나갔다.
그리곤 잠시 뒤.
따로 마련된 귀빈실로 안내받은 나진은 직원이 한가득 들고온 옷으로 환복을 시작했다. 일전에 무도회에서 입었던 복장과 비슷하면서도,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복장이었다.
‘이건 어깨에 걸치는 건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어찌저찌 환복을 마친 나진이 탈의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디에타가 나진을 보고선 살짝 입술을 벌렸다. 잠깐의 침묵 후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귀족가 사생아 맞죠?”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농담이에요. 확실히, 비율이 좋아서 아무거나 입혀놔도 잘 어울리네요.”
디에타가 나진에게 다가와 넥타이와 옷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본래 직원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건 남겨놔라’ 라고 몰래 지시했던 디에타다.
“······.”
시선을 내리면 디에타의 정수리가 보였기에 나진은 괜스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옷매무새 정리를 마친 디에타가 의자를 가리켰다.
“저쪽 가서 앉아보실래요?”
“그렇게 하죠.”
나진이 의자에 앉자, 디에타는 나진이 제 머리칼을 묶어둔 낡은 머리끈을 풀었다. 그리곤 디에타 상단의 문양이 새겨진 고리로 나진의 머리를 다시 묶었다.
“응, 다 됐다.”
만족스럽다는 듯 나진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 디에타는, 잠깐 기다려달라며 탈의실로 들어섰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탈의실에서 나온 디에타의 인상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풀어해쳤던 머리칼은 깔끔하게 한 갈래로 묶어 정리했으며, 상단의 제복은 드레스로 뒤바뀌어 있었다.
나진과 같은 방식으로 묶어 내린 머리칼, 그리고 나진의 어깨를 가린 것과 같은 디자인의 숄. 그걸 알아봐 달라는 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 디에타가 나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잘 어울리나요?”
“잘 어울립니다.”
그녀가 만족스레 웃었다.
디에타가 나진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진은 이젠 익숙해진 동작으로 디에타를 에스코트했다.
“너무 능숙해진 거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요.”
“그런데, 이건 주인을 모시는 에스코트지 파트너의 에스코트가 아닌 거 알아요?”
파트너는 이렇게.
디에타가 나진과 팔짱을 꼈다. 나진의 옆에 딱 달라붙은 디에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리는 연갈색의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서 가요.”
데이트. 커플룩. 팔짱.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에 디에타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자꾸만 쿵쾅대는 심장에 찬물을 들이 부으며 디에타는 심호흡을 했다. 정말이지, 이래서야 진전이 없지 않은가.
힐끗.
디에타가 나진을 올려다봤다.
팔짱을 낀 채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나진은 디에타와 달리 평온해 보였다. 그 점이 디에타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달라붙으면 조금이라도 당황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부드럽게 풀어져 있는 나진의 얼굴.
남들의 앞에서가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나진의 얼굴을 보며 디에타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진전이 아주 없지는 않네.
나진이 인간 관계에 서툴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진의 배경에 대해 듣게 됐으며, 마음을 터놓고 친구라는 관계를 맺게 됐다.
당장에야 나진이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곤 하나··· 사람이란 익숙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되는 욕망의 동물이다. 친구라는 관계에 익숙해지면 그다음을 갈망하게 되지 않겠는가.
‘천천히 쌓아올리는 거야.’
경쟁자는 없으며, 훗날 경쟁자가 생긴다 한들 첫 번째 친구라는 타이틀은 자신이 지니고 있다. 이 이점을 디에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독점.’
금화를 삼키는 뱀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러나 확실하게. 그렇게 디에타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비하려 한 순간이다.
“디에타.”
“딸꾹.”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 나진의 목소리 한번에 디에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표백됐다. 디에타가 반사적으로 나진에게 멀어지려 했으나, 끼고 있는 팔짱 탓에 그리하지도 못했다.
“디에타?”
“네, 네에. 무슨 일이에요?”
“불러도 대답을 안 하길래.”
나진이 디에타에게 건물을 가리켰다.
어느덧 식당 앞에 도착해있었다. 디에타가 화끈하게 달아오른 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상대는 불시에,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치고 들어오는 수준급의 검사다. 심지어 ‘친구’라는 관계로 나아간 탓에 그 공격은 더욱 예리해졌다. 갑작스레 미소를 흘리질 않나, 편한 표정을 짓지를 않나, 디에타, 하고 풀린 목소리로 속삭이질 않나······.
‘어, 이것만 해도 괜찮지 않나?’
허억, 하고 디에타가 숨을 헛삼켰다.
순간 만족할뻔했다. 짝, 하고 제 뺨을 찰싹이며 디에타가 정신을 바로잡았다. 제 목표는 여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지 않은가. 자신은 고작 친구 관계에 만족할 만큼 욕망 없는 여인이 아니지 않은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내며, 나진의 마음을 흔들게 할만한 반격을 밀어 넣는다. 그리 다짐하며 디에타는 전장에 향하는 마음가짐으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라.”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식사는 끝나있고, 디저트와 찻잔 따위가 테이블에 놓이고 있다. 디에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식당으로 들어왔던 것 같은데, 중간부턴 그냥 즐긴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는 나진의 말에 신나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다음에는 또 어쨌더라?
뭔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디에타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찻잔을 홀짝인 나진이 입을 열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즐거웠습니다.”
“네?”
“새로운 것도 경험해보고, 이런 음식들도 다 먹어보고, 덕분에 피곤함이 좀 풀린 느낌이네요.”
나진은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다.
디에타 덕분에 경계심을 좀 풀고, 오늘 하루만큼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안개가 껴있던 것 같은 머리도 좀 맑아졌고.
“고마워요. 디에타.”
“···음, 으음.”
디에타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을 내뱉은 디에타는 쓰게 웃었다.
“제가 생각한 건 뭔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습니까?”
“그래도, 저도 즐거웠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네요.”
계획도 잊어버리고 신 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먹은 음식의 맛이야 말 할 것도 없었고.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즐거웠고.
같이 식사를 지낸 지 만족스러웠다.
인관관계에 통달한 것처럼 굴지만, 사실 디에타 역시 친구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친구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행위 자체가 제법 큰 충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디에타는 수긍했다.
“친구라는 거, 좋네요.”
“동감입니다.”
디에타와 나진이 서로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푹 쉬었으니······.”
디에타가 홀짝인 찻잔을 내려두었다.
“일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그러니까, 습격자들에 대비할 방법에 대해서 말이에요.”
대사제 오를랑은 명단을 확인했다.
소드 시커 넷.
5 서클 마법사 하나.
소드 엑스퍼트 열다섯.
교단의 위세를 빌리지 않고, 오를랑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사냥개들. 일개 개인이 가지기엔 과분한 전력이기도 했다. 교단의 이름을 빌리면 더욱 많은 이들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지.’
교단의 세력은 완전히 통제 가능하단 확신이 없으며, 변수가 많다. 그에 비해 이 명단에 적힌 이들은 오를랑의 손짓 한 번에 바닥을 구르고 흙탕물을 핥을만한 이들이다. 그만한 약점을 붙잡고 있으니.
오를랑은 그들 전부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험가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반’이란 인물이, 그날 놓쳐버린 엑스칼리버의 찬탈자임은 확정된 상황이다. 카프만의 사건을 거치며 확신하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이것저것 따질 것 없다.
인력을 아낄 필요 역시 없다.
부릴 수 있는 사냥개 전원을 동시에 투입해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게 옳았다.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검사 하나를 잡기엔 과분한 전력이었으나, 부족한 것보다는 과한 게 옳지 않겠는가.
‘궁지에 몰아넣어.’
오를랑이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엑스칼리버를 뽑게 한다면.’
그걸로 상황은 끝이 난다.
엑스칼리버. 별의 검.
소년이 가져선 안 될 빛을, 소년이 바깥으로 꺼내 보인 순간 소년은 파멸한다. 그것을 위해 쳐둔 그물이 있으니까. 준비한 몇 가지 수를 곱씹으며 오를랑은 웃었다.
여신의 근심을 덜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 사실에 오를랑은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