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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씩 덤비실 필요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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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오셔야 균형이 좀 맞을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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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입에 담은 것은 명백한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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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발에 반응한 것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던 기사, 필레온이다. 그는 일전에 나진에게 걷어차여 벽에 처박혔던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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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의 앞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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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욕을 필레온은 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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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자신의 방심이 허용한 일격이다. 다시 붙으면 그 결과는 다를 것이다. 검을 들고, 제대로 된 장소에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그리 허무하게 당하진 않는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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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감내하는 것이 아닌 부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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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함으로써 제 자존심을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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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필레온이 선택한 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오답 중의 오답이다. 물론 필레온에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단서가 여럿 주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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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나진의 마나 운용 속도가 이상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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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그 육체 능력이 기이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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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아르베니아의 기사단장과 맞부딪치고도 나진이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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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레온은 자신이 보았던 것은 부정했고, 들려온 소문은 헛소문이라며 흘려넘겼으며, 짚고 넘어갈 수 있었던 정보들을 외면했다. 기사로서의 자존심과 고집이 만들어낸 실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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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지기 짝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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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이 표정을 구긴 채 나진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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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는 검을 쥐었고, 검기를 뽑아냈으며 육체에 마나를 순환시켰다. 나진의 건방진 도발에 눈을 부릅뜬 제 동료들을 뒤로하고 그가 선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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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의 기사가 아주 물로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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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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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의 말을 끊으며, 나진이 검을 공중에 던졌다. 검기를 뽑아든 상대의 앞에서 검을 놓아버리는 기행. 그 행동의 의미를 필레온이 추측하는 것보다 먼저, 나진이 앞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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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돌고 있는 롱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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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내디딘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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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나진에게 들이민 필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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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은 나진의 기행을 이해하는 것보다, 다가오는 나진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필레온이 나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결투인 만큼 죽이진 않겠지만 검에 피를 묻혀도 비난할 자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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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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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이 검을 휘둘렀다. 제국의 검술.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롱소드는 나진의 어깻죽지를 노렸다. 검을 들지도 않은 채 접근하는 무방비한 상대를 베어 가르기엔 충분한 일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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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필레온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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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내가 아닌 부정.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외면. 그리하여 골라낸 오답. 오답 중의 오답. 당연하게도 결투에서 오답을 고른 대가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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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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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궤적을 그리던 검이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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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가볍게 뻗은 왼손에, 롱소드의 칼자루를 움켜쥔 필레온의 두 손이 붙잡힌 까닭이다. 눈을 부릅뜬 필레온이 팔을 움직이려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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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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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양손이 비명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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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발을 들어 올려 나진을 걷어차 거리를 벌리고자 생각한 순간, 나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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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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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필레온의 무릎을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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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 소리를 내며 필레온의 무릎이 안으로 꺾였다. 필레온의 눈에 불똥이 튀어 오르고 더는 서 있을 수 없게 된 그가 무릎 꿇었다. 자세는 낮아졌고 자연스레 필레온이 나진을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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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양손. 꿇려진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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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방비해진 것은 나진이 아닌 자신이었다. 그 사실을 필레온이 깨달은 순간이다. 그의 시야에 다시 한번 불똥이 튀었다. 이번에 고통이 느껴진 것은 무릎이 아닌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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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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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어린 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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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 오르는 핏물. 피가 터져나오는 곳은 코였다. 콧잔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과 함께 필레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필레온은 뒤늦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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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으로 제 양손을 붙잡아 내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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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제 얼굴을 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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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 쩌억, 쩍······ 필레온의 시야가 몇 번이고 점멸했다. 그 고개가 연신 뒤로 젖혀졌다가 앞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나진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필레온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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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던 기사들이 눈을 크게 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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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온의 주인인 아게시오가 숨을 헛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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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진이 보이는 것은 결투가 아니었다. 검투(劍鬪)는 더더욱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행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진은 필레온의 양손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지만, 필레온은 검을 휘두를 생각을 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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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눈동자는 탁하게 풀려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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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진은 주먹을 멈추고, 필레온의 머리채를 붙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미리 던져놨던 나진의 롱소드가 공중에서 돌다가 내려와 땅에 콱, 하고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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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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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결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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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기 전에, 결투는 끝나지 않는다. 나진의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필레온은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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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결투의 시작과 동시에 위로 검을 던진 것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단지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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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는 검을 쓸 필요도 없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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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에 필레온은 굴욕을 느낀다. 그러나 굴욕보다 더한 것은 공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진의 눈동자에서 필레온은 섬뜩함을 느꼈다. 필레온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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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의 시종들이 필레온을 끌고 가길 내버려둔 나진은, 말없이 필레온과 그 호위 기사들을 바라봤다. 나진은 시선으로 말하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냐고. 여전히 한 명씩 덤빌 거라면 말리진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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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은 저울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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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존심과 아르베니아의 명성을 바로잡기 위한 보복. 무엇이 중요한가? 아르베니아에 충을 바친 이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남은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제야 나진은 땅에 꽂힌 검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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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든 검 위로 새하얀 검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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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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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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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의 편린을 깨우친 무인과, 그렇지 못한 무인간의 차이는 극명하다고. 그것은 단지 검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심상을 깨우친다는 것은 영혼을 확고히 하는 과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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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풍경. 자신만의 색. 자신만의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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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간 인류는 많은 것을 쌓아올렸다. 모든 무술이 결국 무언가의 모방이고, 완전한 새로운 것이 드물어진 시대다. 하지만 심상이란 언제나 새롭고 유일하며 독창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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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 무엇도 모방하지 않은 자신만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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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自身)을 자신(自信)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 확고한 믿음은 육신과 마나의 흐름 그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 영혼에 색이 입혀지고 마나가 특수한 형태와 성질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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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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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의 편린에라도 닿은 무인과, 그렇지 못한 무인의 차이는 극명하다. 본래부터가 소드 엑스퍼트에선 맞상대가 없었던 나진이다. 그런 상황에서 심상의 편린까지 깨우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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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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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윽, 우웨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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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특수한 조건, 선공, 잡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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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배제된 정면의 결투에서도 나진은 다수의 엑스퍼트를 압도할 수 있다. 그 증거가 나진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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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부여잡고 쓰러져있는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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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여버린 손가락과 박살 난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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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도움을 받는다면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이지만, 당장 전투를 속행할만한 부상은 아니었다. 쓰러진 기사들과 달리 나진의 몸에는 자잘한 생채기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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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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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을 지켜본 아게시오 아르베니아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기사 넷을 동시에 상대해 제압할 수 있는 엑스퍼트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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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소드 시커급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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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근래 세간에 떠도는 헛소문이다. 눈앞의 저 모험가가,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을 상대로 버텨냈다는 헛소문. 아게시오는 그것을 과장된 헛소문쯤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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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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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강인한 그리핀 경이 작정했다면 싸움이 성립될 리가 없었으니까. 그리핀이 뒤늦게 도착했거나 처음부터 트레바체의 기사들이 합류했으리라고, 아게시오는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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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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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기사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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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중 하나는 맨손으로 제압당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을 보고 있자면··· 그것을 다만 헛소문으로 일축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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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는 눈앞의 모험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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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역시 아게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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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에서 아게시오는 섬뜩함을 느꼈다. 움찔, 하고 아게시오가 뒷걸음질쳤다. 그런 아게시오를 향해 나진이 한걸음 내디뎠다. 아게시오는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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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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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것은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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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기사들이 모두 쓰러진 이 순간, 자신을 지켜줄 인물이 남아있지 않음을 아게시오는 깨달았다. 그리고 눈앞의 모험가에겐 귀족의 예법을 기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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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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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어 외쳐보지만 나진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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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뒷걸음질치던 아게시오가,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된 그가 나진을 올려다봤다.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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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가 누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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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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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세를 낮춰 아게시오와 시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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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하나 경고하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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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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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짐승의 눈동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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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를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건 당신 같은 사람이 입에 담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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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나진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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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쓰러진 기사들과, 아게시오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아게시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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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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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한낱 모험가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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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해 아게시오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철저하게 패배했고, 또한 실패했음을 깨달아야만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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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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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아게시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디에타가 있었다. 디에타는 무표정하게 아게시오의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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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이 말이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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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아게시오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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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보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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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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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보지 마라. 가문의 버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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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저는 더는 아르베니아 가문의 소속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모욕을 감내할 이유도 없단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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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아게시오의 말을 끊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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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후작가에서 제 가문명을 갈아버리는 작업을 마친 디에타다. 그녀는 이제 디에타 아르베니아가 아닌, 캄브리아의 거상 디에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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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선 제 호위에게, 그리고 제게 결투를 걸어오셨고 패배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이 참 많으니 증인은 따로 필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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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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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지으며 주변을 가리켰다. 본래 나진과 디에타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아게시오가 골랐던 장소는, 이젠 그에게 더한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무대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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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에겐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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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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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에겐 대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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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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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뱀의 눈동자가 반개(半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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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결투이지요. 한낱 상인조차 아는 상식을 위대한 아르베니아의 공자께서 모르실 일은 없으리라고, 저는 확신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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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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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하셔야 할 대가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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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를 하는 것은 기사, 그 결과와 대가를 징수하는 것은 상인이다. 디에타는 눈앞의 호구를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거꾸로 잡고 탈탈 털면 금화가 쏟아질 두둑한 돈주머니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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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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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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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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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몫이죠. 또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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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상단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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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앞에 놓인 두둑한 돈주머니와 온갖 증서들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진에게 디에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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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대가예요. 세상에, 조금만 긁었는데 이것저것 다 뱉어내 주지 뭐예요? 고마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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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에게서 뜯어온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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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하며 디에타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상인으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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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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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다시 자신의 것으로 돌아온··· 그동안 조금이지만 그리웠던 상단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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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네요,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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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곳이 제 고향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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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직원들도 아게시오가 떠나고 디에타가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파시온의 경우는 아주 대성통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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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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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울부짖는 파시온을 진정시키고, 세수하고 오라고 내보내기까지 걸렸던 시간을 떠올리며 디에타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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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이리 주세요. 다 수선해 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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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나진이 입고 있는 외투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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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트롤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라 어지간해선 찢어지지 않겠지만··· 나진이 싸웠던 상대를 떠올리면 엉망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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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천천히 갚아갈 테니 기대해요. 생각도 못 한 것들을 잔뜩 받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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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받으려고 했던 일은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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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요.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는 거. 받기 껄끄러우시다면 투자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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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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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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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호칭이 ‘상단주’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뭔가, 뭔가 조금 섭섭한 느낌이었다. 물론 자신이 상단주로 돌아온 것은 맞지만··· 뭔가 선을 긋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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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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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날 이름으로 부른 적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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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없던 것 같았다. 나진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존대하는 성격이었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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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격이 싫은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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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싫은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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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저 사람한테 이름으로 불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디에타는 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걸 입으로 담자니 부끄러워서 디에타는 묘수를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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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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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둘뿐인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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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나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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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놓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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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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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놓자구요.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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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차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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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가짜 나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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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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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요! 가짜 나이 맞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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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시선을 돌리는 나진의 모습에 디에타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탁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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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싶은데, 저보다 어린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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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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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진짜 저보다 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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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슬찍 시선을 피하는 나진의 모습에 디에타가 와,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진은 18세였고 디에타는 20세였지만 그 사실을 디에타가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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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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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다고 생각하죠 그냥. 여덟 살 정도면 안 나는 거 맞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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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정 끝까지 포기 안 하시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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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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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말 놓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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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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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으로 부르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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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하던 나진은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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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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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 하고 디에타가 어깨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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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놓으라니 놓긴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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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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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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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핑핑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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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 말은 다음에 놓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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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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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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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다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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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조심히 들어가 보세요. 저는 할 일이 많아서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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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디에타.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그렇게 문을 열자 때마침 돌아온 호위기사 파시온과 나진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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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벌써 가려는 건가? 조금 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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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화색 하며 나진에게 말을 붙이려는 순간이다. 그의 시야에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 주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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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말없이 디에타와 나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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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도는 묘한 공기. 묘한 분위기. 파시온이 식은땀을 흘렸다. 파시온은 눈치가 없는 기사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설마’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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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건, 나중에 해도 되겠지. 조심히 들어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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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은 나진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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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여유를 잃은 것 같아 보이는 제 주인에겐 잠깐의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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