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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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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후작가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사건은 일단락됐고, 이다음부턴 자신의 무대가 아니었으니까. 디에타를 이곳까지 데려다줌으로써 제 역할이 끝났음을 나진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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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에 이어질 것은 정치와 명분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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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복잡한 제국법의 조항을 뒤적이며, 상대에게 비수를 찔러넣는··· 세 치 혀와 몇 개의 글줄로 싸우는 정치가들의 싸움이다. 그런 부분에 나진은 무지했으므로 딱히 나설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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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전문가는 따로 있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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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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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냉철한 상인으로 돌아온 그녀는 에델마르 후작의 도움을 받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단을 되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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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세요. 여긴 제 무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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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로 돌아가면 꼭 사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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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붙이를 휘두르고 피를 봐야만 싸움이 아니다. 디에타에겐 디에타 나름의 전장이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디에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나진은 후작가의 영지를 산책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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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건넨 훈장을 가지고 있는 한 어딜 가든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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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산책을 하다말고 벤치에 걸터앉은 나진은 문득 눈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높게 자란 나무가 있었다. 비록 눈앞에 놓인 것이 가시나무는 아니었지만, 높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며칠 전의 전투가 떠오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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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시나무의 검기를 휘두르던 그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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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운 강자였고,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던 상대였다. 나진에게 소드 시커란 무엇인지 똑똑히 각인해준 기사이기도 했고. 소드 시커, 심상, 내면의 풍경. 그런 단어들을 나진은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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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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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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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제 내면에 집중하노라면, 그곳엔 그리핀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싹을 틔운 자신의 심상이 존재했다. 아직은 몇 걸음의 폭에 불과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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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공간에 자리 잡은 지하도시 아트만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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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두 개의 별이 각각 하늘과 땅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어느 소녀가 담장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진은 제 내면에 자리 잡은 풍경을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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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다시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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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나진을 바라봤다.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청백색의 머리칼.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싯푸른 눈동자. 나진과 눈을 마주치자 그녀의 눈꼬리가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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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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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마법사, 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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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내면에 자리 잡은 그녀가 나진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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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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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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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긴 하네. 한 넉 달 만인가? 석 달 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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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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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손바닥으로 탁탁, 제 옆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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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담장을 기어올라 멀린의 곁에 앉았다. 하늘에 높게 뜬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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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식으로 마주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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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지만, 네가 눈을 감고 집중하면 가능은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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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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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식체는 네 심상에 자리 잡고 있고, 네가 그리는 심상이 선명하고 구체적이게 될수록 뚜렷해질 거야. 아직은 조금 흐릿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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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진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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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아직은 수면에 비춘 것처럼 멀린의 모습이 흐릿하긴 했다. 그녀의 성역(星域)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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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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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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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자리 잡고 있는 나진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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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자리 잡은 풍경을 둘러보며 그녀는 짧게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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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풍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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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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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숲도 안 보이고, 호수도 없고,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어두컴컴하고 칙칙하네. 이게 네가 살았다던 지하도시의 풍경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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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죠. 사실 이것보단 조금 더 밝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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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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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주점의 앞에는 노을빛 광석등이 많이 매달려있습니다. 이폴리 누나가 매일 같이 나와서 간판을 닦고, 광석등을 점검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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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하고 주점의 주변에 광석등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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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노을빛이 그 주위에 얕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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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은 창구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기까진 아직 그려지지 않은 모양인데··· 저 길 너머에는 조금 더 화려해요. 지하도시에서 가장 밝은 곳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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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이어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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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저 너머까진 아직 구현하지 못했지만, 새어 나오는 빛 정도는 떠올려 볼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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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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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리고 저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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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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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사람들은 윗동네를 그리워하니까요. 조금이라도 윗동네와 닮은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던 거겠죠. 잘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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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진은 풍경을 둘러봤다. 캄캄하기만 했던 도시에는 크고 작은 등불들이 걸려 조금 더 정교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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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진이 조금만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아직 심상에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것들이니까. 나진은 씁쓸하고, 조금은 그리운 듯한 감정을 느끼며 제 내면에 자리 잡은 풍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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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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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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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같은 곳이라 생각했는데,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한 곳인데, 이렇게 보고 있자니 조금 그리운 듯한 기분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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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향이란 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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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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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이 거지 같은 곳이긴 했어도, 마녀한테 불타 재가 되어버린 다음엔 좀 그립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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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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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종종 머릿속으로 심상을 가다듬는 게 좋을 거야. 네가 계속 의식하지 않는다면 심상은 조금씩 깎여나가다가 바스러지고 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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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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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망각이고 마모야. 그러니 네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이 풍경을 소중히 간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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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턱을 괸 채 아련한 눈동자로 지하도시 아트만의 정경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떠올리는듯한 눈동자였고, 무언갈 추억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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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고 나선 후회할 수도 없거든. 떠오르지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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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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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기억력하곤 다른 이야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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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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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있거든. 심상을 더럽히려는 놈들이. 기억을 망가트리고, 머릿속을 손가락으로 휘저어대는 거지 같은 놈들이 있어. 그러니까 조심하란 이야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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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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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르지. 가까운 이야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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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하고 멀린이 담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지하도시 아트만의 거리를 거닐으며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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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풍경도 나쁘지 않네. 아늑한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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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뒷짐을 진 채 나진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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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이면 호수도 하나 있음 좋겠는데, 언제 하나 만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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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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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하고 웃으며 나진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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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의 풍경은 사라지고 후작가 정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높이 솟아있는 나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나진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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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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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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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에게 보고를 올리던 기사단장, 울프힐드는 마지막으로 제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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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하기에, 소드 시커에 근접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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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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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객관적인 기준에서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그리핀 경은 강자입니다. 최대 5m가 넘어가는 검기로 ‘아르타 트리가디언’의 검술을 펼치는 그리핀 경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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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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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거리에서 붙는다면 제 필패일 것이고, 먼 거리에서도 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핀 경에게 공작가의 첫 번째 검이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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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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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막 심상을 깨우친 소드 시커가 아닌, 제 심상을 온전히 다룰 줄 아는 노련한 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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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강자의 검을 그 청년은 받아냈습니다. 하물며 검기의 편린이나마 베어냈죠. 소드 엑스퍼트 수준에서 가능할 리 없는 묘기를 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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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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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에 근접했거나, 심상의 편린을 붙잡은 게 분명합니다. 순간적인 육체 능력은 이미 시커의 경지에 오른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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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과 나진이 맞부딪치는 광경을 지켜본 울프힐드다. 그는 대궁을 다루는 기사였고, 궁사에게 요구되는 관찰력과 통찰력을 십수 년간 갈고닦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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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동자를 후작은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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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했기에 에델마르 후작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후작이 허어, 하고 길게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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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군. 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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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상으론 28세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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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로 쳐도 최연소 소드 시커이지. 검성, 카론 경을 방불케 하는 재능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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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카론 경을 능가하는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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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알려진다면 분명 거센 여파가 불어올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그 청년의 이야기가 캄브리아 안에서만 돌고 있다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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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두각을 드러내겠지. 바깥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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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 안에서 머무를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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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더욱 넓은 무대로 나아가겠지. 저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하나의 무대에 오래 묶여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에델마르 후작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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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재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나 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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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도, 진명도, 진짜 나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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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감춰진 청년이다. 심지어 뒤적여봐도 나오는 정보라곤 하나도 없다. 정말 어디 기록 말살된 가문의 자제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정보가 깔끔하게 지워진 이는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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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은 불명에, 기사도를 중시하고 뛰어난 검의 재능을 지닌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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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보를 곱씹던 후작이 무심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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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인이 소리 내 웃자, 울프힐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후작에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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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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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즘 연극을 너무 즐겨봤나 보네. 어이없는 생각이 떠올라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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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빡이는 제 기사에게 후작은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이없는 망상이지만, 곱씹다 보니 왠지 그럴싸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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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 꼭 아서왕을 보는 듯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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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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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불명.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 기사도를 중시하고, 명예와 긍지를 무겁게 여기지. 뛰어난 검의 재능을 지녔으며··· 젊은 나이에 높은 경지에 올라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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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가진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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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위치가, 바로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야. 이 도시에서 그 여정을 시작하려 하는 게··· 꼭 아서왕의 일대기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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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를 따지고 보면 흔한 이야기지만, 그 모두가 겹치면 보기 드문 이야기가 나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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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이 흘러 기회의 도시에 나타난 아서왕을 닮은 청년. 크으, 이 얼마나 가슴 뛰게 만드는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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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빛나는 눈동자로 제 기사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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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나, 울프힐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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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지만, 연극 감상을 좀 줄이실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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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그런가? 확실히 요 몇 개월간 극단에 밥 먹듯이 들르긴 했지. 줄일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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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에 대한 지원도 조금 줄이실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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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그건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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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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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란 말일세. 극단이 커지면 관광사업으로 트레바체의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테니,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인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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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뭐 어쨌든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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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후작은 제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바라봤다. 캄브리아 중앙 길드에서 보내온 서류. 서류의 최상단에는 [승급 심사 최종 승인]이란 글자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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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은 말없이 심사 내용을 훑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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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모험가가 활동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으나 그 행적은 하나같이 굵직한 것밖에 없으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감독한 승급 시험에서도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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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승급은 확정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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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적색 등급 모험가쯤 되면, 캄브리아에서 보증하는 실력자이기에 재단의 대표에게 의례상 허가를 받는 것이다. 후작은 서류에 적힌 ‘이반’이라는 이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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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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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것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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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위장의 위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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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위험 요소’가 적힌 부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후작은 서류에 제 이름을 사인했다. 그리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쾅, 하고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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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적색 등급 승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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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의 시간이 흘러 사건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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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복잡하고, 질척하고,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더러운 정치판에서 춤을 춘 디에타는 흐느적거리며 침대에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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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건은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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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주 자리로의 복귀도 확정됐고, 하루 이틀쯤 뒤에 캄브리아로 향하면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앞으로 공작가의 견제를 받게 되긴 하겠지만, 그건 잘 헤쳐 나가 봐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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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침대에 뻗어 창밖을 바라보노라면 휘황찬란한 달이 떠 있다. 샛노랗게 반짝이는 달을 바라보며 디에타는 문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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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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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도망치며 보았던 샛노란 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괜스레 머릿속에 단단한 나진의 등판이 떠오르기도 하고, 자신을 안아 들었던 팔이 떠오르기도 해서 디에타는 제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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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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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를 떠나기에 앞서, 후작께서 연회를 열어준다고 하셨던가? 본래 연회나 축제 같은 귀족들의 자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디에타다. 언제나 그곳에선 멸시만을 받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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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연회에선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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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개최하는 연회고, 후작의 손님으로서 나진과 함께 참가하게 될 것이니까. 감히 후작의 앞에서 그 손님을 욕보이는 행동을 하는 이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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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 그러니까···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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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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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외 무도회. 그리고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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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로맨스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는 연인. 연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이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자신을 향해 능글맞게 윙크를 날리던 후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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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꼭 ‘누구랑 춤출지는 알지?’ 하고 외치는 듯했다. 연극을 좋아하는 후작답게 달밤의 도주극을 마무리 지을 무대를 마련해준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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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싫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올라 디에타가 마른 세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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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그러니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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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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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디에타는 괜스레 발로 침대보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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