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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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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까지 마나를 끌어다 쓴 반동이었고, 이제 막 심상의 편린을 붙잡은 주제에 닥치는 대로 휘둘러 댄 대가였다. 수면 아래로 몸이 가라앉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나진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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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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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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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소리가 들려오는, 햇빛이 아주 잘 드는 침대 위에서 나진은 눈을 떴다. 방을 청소하던 시종이 나진과 눈을 마주치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곤, 방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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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기사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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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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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후작가의 기사단장 울프힐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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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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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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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정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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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번 더 눈을 깜빡인 나진이 제 팔을 들어 올려봤다.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있었고, 몸에 남아있던 자잘한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엑스칼리버의 재생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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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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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는 제 주인이 나진의 회복을 돕기 위해 영지의 사제들과 의원을 불러 모았음을, 그리고 은혜를 베풀었음을 짧게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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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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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내가 아니라 후작님께 직접 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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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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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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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가 만족스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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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웃다 말고, 그가 문득 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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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자네 회복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더군? 자네를 살피던 의원과 사제들이 당황했어. 응급처치만 했을 뿐인데 상처가 아물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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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의 중얼거림에 나진은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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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회복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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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열흘은 앓아누울 부상이라던데, 하루 만에 멀쩡히 눈을 뜨다니. 확실히 놀랍긴 해.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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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래 몸이 좀 튼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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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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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이내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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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특이 체질이란 거겠지. 내가 캐물을 만한 일은 아니군. 나도 나름 특이체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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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눈가를 툭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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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렇듯 세상에는 특이 체질을 타고난 이가 있다. 그렇기에 나진의 비정상적인 회복력 역시 ‘그런 거로’ 생각하겠다고 울프힐드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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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자네의 상태를 보고 간 이들은 입단속 시켰으니 걱정하지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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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감사한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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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후작님의 손님이니 이는 당연한 대우지. 트레바체는 손님에게 해가 될 일은 결코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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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에 새겨진 트레바체의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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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자랑스레 가리키며 울프힐드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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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가눌 수 있게 되면 후작님께 가보도록. 시종들이 안내해 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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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고 울프힐드가 짧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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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꼭 해야겠다는 양 그가 제 입 앞에 손바닥을 세운 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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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레이디는 바로 옆 객실에 있으니, 가서 얼굴이나 좀 비추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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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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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었나? 사이가 제법 각별해 보이기에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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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그런 사이는 또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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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울프힐드는 ‘디에타 아가씨가 고생 좀 하시겠군.’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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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디에타 아가씨가 자네 걱정을 많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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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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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 자네가 쓰러지고 나서 어찌나 서럽게 우시던지. 죽지 마요, 죽지 마요, 하고 자네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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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가 멋쩍은 듯 제 목덜미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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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대고 그냥 의식을 잃은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기가 분위기상 좀 그렇잖나? 우리도 진땀을 빼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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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아가씨가 또 뭐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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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다.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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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디에타가 서 있었다. 마치, 문 너머에서 이야기를 엿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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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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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떨리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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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디에타가 원망 어린 눈초리로 울프힐드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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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비밀로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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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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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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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이야기를 방해해선 안 되는 법이겠지요.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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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디에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오른 소녀의 눈초리가 매섭다곤 하나, 소드 시커급의 경지에 오른 기사의 움직임을 쫓아갈 순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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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보면 방안에는 나진과 디에타만이 남아 있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기를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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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뼛거리며 나진의 곁에 다가온 디에타가 털썩, 하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귓가는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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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은, 좀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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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디에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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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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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데도 지장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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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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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좀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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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디에타의 발목을 힐끗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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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에 감겨있지만 아까 보였던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웠던 걸 보면, 어느 정도 회복을 마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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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걸어 다닐만해요. 길어도 일주일 정도면 흉터도 안 남을 거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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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다행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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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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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나진의 미소를 마주한 디에타의 귀가 조금 더 붉게 물들었다. 도통 눈을 마주치질 못하겠다는 양 디에타의 시선은 엄한 곳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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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힐드 경에게 들은 이야기 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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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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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부끄러움을 참은 채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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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잊어요. 잊어버려요.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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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뭘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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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했다던 말 있잖아요. 그거 잊어버리라구요. 빨리. 부끄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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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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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또 왜 얼굴이 저렇게 새빨갛고? 영문을 모르겠지만 나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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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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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의 접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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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후작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방 안으로 들어서면, 그곳에서 나진과 디에타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은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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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의 주인, 에델마르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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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영주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근 십여 년 만에 트레바체의 명성을 더욱 견고하게 다진 뛰어난 정치가이자 권력가. 그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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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네, 디에타 양. 그리고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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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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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손짓하며 에델마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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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과 울프힐드 경을 통해 대략적인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이 어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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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홀짝이며 에델마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공작가의 막무가내식 합병에 화를 내려는 것일까, 혹은 탄식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디에타가 에델마르의 반응을 살피고 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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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이야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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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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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고, 반사적으로 되물을 뻔한 것을 디에타는 간신히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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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에 납치당한 여인을 구하고자 단신으로 별장에 숨어들어 펼친 화려한 구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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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과장된 손짓과 함께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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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수 없게 된 아가씨에게 필시 등을 빌려주었을 테지. 기사들의 추격에도 굴하지 않고 달밤을 배경 삼아 펼치는 도주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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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장된 말투와 몸짓은 마치 연극을 소개하는 배우와도 같았다. 그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디에타와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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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주한 마지막 시련. 목숨을 건 결투와 끝내 굽히지 않은 의지. 그러나 결국 쓰러져버린 주인공과 눈물을 흘리는 여인. 비극으로 마무리 될 뻔한 이야기였으나, 정말 다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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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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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맺지는 않겠군.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네, 이반. 디에타 양 역시 마찬가지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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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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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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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예를 갖춰 말했고, 디에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디에타의 모습에 에델마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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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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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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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얼추 알고 있네. 아르베니아 공작가에서 강제로 디에타 상단을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디에타 양의 신원을 확보하려 했다는 사실 모두 확인을 마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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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을 보내 정보를 확인한 에델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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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당하지 않은 일이지. 부당한 일이야. 물론, 세상에는 권력과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부당한 일이 숱하게 일어난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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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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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에선 일어나선 안 될 일이야. 위대하신 아서왕께서 그 여정을 시작한 도시에서만큼은, 공정과 평등이 보장되어야 하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캄브리아 재단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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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 재단의 중심에 위치한 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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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강한 발언권을 지닌 가문인 트레바체 가(家)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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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에델마르 개인과 캄브리아 재단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어. 만일 상단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공작가의 힘을 빌렸다면 명분은 존재할 터나, 디에타 양이 그리하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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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버려진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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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가 남긴 공작가의 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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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오명들을 짊어진 채 처음부터 상단을 쌓아 올린 인물이 바로 디에타 아르베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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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네가 내 영지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나서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자네가 이곳에 있는 한 명분은 이쪽에 있지. 상단을 되찾는 것을 돕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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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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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필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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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감사 인사에 후작은 담백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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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행해야 할 의무니까. 의무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에 감사를 받아서야 세상이 너무 각박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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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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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잠시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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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연극을 즐겨보지만, 난 도무지가 비극이란 게 입맛에 맞지는 않더군. 고난과 역경, 시련을 뛰어넘은 등장인물들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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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즐겨보는 후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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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나진과 디에타의 도주극을 ‘연극’에 빗대어 설명했었다. 후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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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이 끝났을 때 그대들이 웃을 수 있음 좋겠군. 간만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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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뒤, 에델마르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시선은 디에타에서 나진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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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양,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따로 이반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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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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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자리를 비우고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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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가 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모습에는 연극처럼 과장된 몸짓도, 말투도 없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목소리. 후작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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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의 기사,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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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기사 토벌전에서 나진이 마주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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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사이자, 내 말동무였던 그 친구의 최후를 함께해주었다 했지. 길버트의 유지(遺志)를 지켜주었다고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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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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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의 유언을 듣고 악마 기사를 추격했고, 끝내 나진은 악마 기사를 베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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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묻고 싶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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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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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는 마지막까지 기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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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기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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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기사왕이 남긴, 기사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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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역시 결국 사람이기에 매 순간 고결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명예와 긍지를 따라 행동할 수는 없다. 기사는 매 순간 선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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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나는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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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순간에, 그대가 무엇을 선택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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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본능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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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긍지와 명예를 따라 움직이는 기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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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그대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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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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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최후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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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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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마지막까지 기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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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을 떠올린 나진은, 죽어가면서도 손끝으로 악마 기사가 도망친 곳을 가리키던 길버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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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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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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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길버트 경께선 기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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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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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이 아릿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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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마지막 순간 웃을 수 있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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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숨을 뱉은 후작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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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네. 길버트의 마지막을 함께한 게 명예와 긍지를 아는 자네라서, 나는 감사함을 느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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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한 말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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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멋쩍은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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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명예를 모릅니다. 가지지 못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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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는 가졌다는 뜻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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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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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이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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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말하는 명예와 긍지는, 남들이 입에 담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것 같군. 그렇지. 본래 그것은 쉬이 입에 담아선 안 될 무거운 것이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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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가벼워지고 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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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을 무겁게 여기고자 하는 이가 눈앞에 있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기사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에 후작은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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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빠진 레이디를 돕는다. 약속을 지킨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행한다. 명예로운 이의 유언을 존중하고, 악한 것에 검을 휘두르며··· 목숨을 걸고 맹세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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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이라는 청년에 대해 들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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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보들을 곱씹으며 후작은 박수를 쳤다. 조롱이 아닌 경의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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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이미 훌륭한 기사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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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서임을 받지 못했을 뿐, 이미 훌륭한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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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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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대가 충성을 바칠 주인을 만나 훌륭한 기사가 되길 바라네. 혹은 기사의 규율을 수호하는 자유 기사가 되기를 바라. 진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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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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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려는 나진을 에델마르가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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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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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예법이 아닌 평범하게 내민 손. 그것은 친목의 의미다. 격식을 중요히 여기는 에델마르이지만, 눈앞의 청년은 그 중요함을 한수 뒤로 무를 만큼의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고 판단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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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레 나진이 그 손을 붙잡자, 위아래로 크게 손을 흔든 에델마르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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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은 편히 쉬다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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