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389 lines
18 KiB
Markdown
389 lines
18 KiB
Markdown
|
||
눈앞에서 어머니가 목매달아 죽었다.
|
||
|
||
일곱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였다.
|
||
|
||
창녀의 딸, 버려진 자식, 더러운 피, 시종들의 속삭임과 언니오빠들의 비웃음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식탁에서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차가운 음식을 먹었다.
|
||
|
||
여덟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다.
|
||
|
||
시종들의 괴롭힘. 오빠의 거짓말. 언니들의 증언.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하여금 방에 갇혔다. 창문 너머로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
||
|
||
열한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다.
|
||
|
||
아무도.
|
||
|
||
열둘.
|
||
|
||
찾아오지 않는.
|
||
|
||
열셋.
|
||
|
||
모함, 거짓말, 저지르지도 않은 일, 괴롭힘, 차가운 음식, 비웃음, 조롱, 창녀의 딸. 버려진 자식. 조롱만이 가득한 하루.
|
||
|
||
열넷.
|
||
|
||
독방에서 디에타는 거울을 마주한 채 미소 지었다.
|
||
|
||
열넷.
|
||
|
||
가면이 완성됐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도 더는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게 됐다. 모든 것들을 다만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
그렇게 열다섯 번째 생일날.
|
||
|
||
디에타는 가문을 떠났다.
|
||
|
||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너희들을 모두 집어삼켜 버리겠노라는 맹세를 다지고서.
|
||
|
||
2.
|
||
|
||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독방.
|
||
|
||
무릎을 끌어안은 채 디에타는 몸을 웅크렸다.
|
||
|
||
발목이 아팠다. 지난 사흘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까닭에 자꾸만 눈이 감겨왔으나, 욱신거리는 발목이 잠을 깨웠다.
|
||
|
||
수면 부족. 고통. 그리고 굶주림.
|
||
|
||
약물 냄새가 진동하는 식사. 숨길 생각도 없이 건네는 희뿌연 물. 무엇을 탔는지, 무슨 짓을 해놨는지 알 수 없기에 쉽사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별장에 있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
||
|
||
이곳에 아군은 없다.
|
||
|
||
모든 게 적이었고 모든 게 함정이었다.
|
||
|
||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은 피로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피로함을 해소할 방법이 지금의 디에타에겐 없다. 지난 사흘간 갉아 먹힌 정신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면은 흔들렸고, 둔탁해진 사고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
||
|
||
‘계획. 빠져나갈 방법. 쓸 수 있는 수단.’
|
||
|
||
평상시의 그녀라면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계에 내몰린 지금 이 순간마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생각이 정상적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
||
|
||
이윽고 디에타는 한계를 맞이한다.
|
||
|
||
결국에 그녀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벗겨졌다.
|
||
|
||
금화를 삼키는 뱀, 기회의 도시에 성공 신화를 써 내린 젊은 거상, 투자의 귀재, 대상인의 자질을 갖춘 천재 중의 천재······.
|
||
|
||
디에타 아르베니아를 장식하던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이 하나둘 벗겨지기 시작했다. 가면이, 상단주의 제복이, 값비싼 액세서리가, 그녀가 제 가치를 불리기 위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
||
|
||
모든 게 발가벗겨지고 남은 것은.
|
||
|
||
금화를 삼키는 뱀도.
|
||
|
||
아르베니아의 버려진 자식도.
|
||
|
||
디에타 아르베니아도 아니다.
|
||
|
||
그곳에 남아있는 건, 한껏 몸을 웅크린 한 명의 소녀일 뿐이다. 상처 입고, 망가지고, 곪아버린, 그리고 그것들을 가리고자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해 온 소녀가 그곳에 있다.
|
||
|
||
디에타는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
||
|
||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
||
|
||
입술이 떨리고 눈가가 경련했다. 이윽고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거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
||
|
||
가면으로 눌러둔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웃어넘기고,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넘겼던 일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계기를 맞이해 범람하고 말았다. 어깨를 얕게 떨며 디에타는 이를 악물었다.
|
||
|
||
가면은 벗겨졌다.
|
||
|
||
새로운 가면이 필요했다.
|
||
|
||
더 단단하고, 더 정교하고, 다시는 벗겨지지 않을 가면이 필요했다. 궁지에 몰린 디에타는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을 계획한 오스만의 의도였으나··· 오스만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
||
|
||
망가진 인간이 꼭 포기하란 법은 없다.
|
||
|
||
디에타는 독종 중의 독종이다.
|
||
|
||
망가트릴 순 있어도, 꺾어버리진 못한다.
|
||
|
||
이를 악문 디에타는 독백한다.
|
||
|
||
이젠 누구도 믿지 않겠다.
|
||
|
||
오늘 밤, 남은 감정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새로운 가면을 쓰게 된다면··· 다시는 이 가면을 벗을 일은 없으리라.
|
||
|
||
정략결혼으로 자신을 팔아넘기겠다고? 마지막까지 가치를 뽑겠다고? 그리해라. 얼마든지 그리해봐라.
|
||
|
||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아치우겠다. 쓸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전부 쓰겠다. 이 몸을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음을 기약한다. 반드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너희 모두를 집어삼키리라.
|
||
|
||
···고난과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법이다. 디에타의 샛노란 눈동자에서 새까만 불길이 피어올랐다.
|
||
|
||
다시 말하지만.
|
||
|
||
디에타 아르베니아는 천재다.
|
||
|
||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 돈의 흐름과 가치를 재단하며 금화를 움켜쥐는 그녀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상로를 움켜쥐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를 대상인의 자질과, 사람을 휘어잡는 권력가의 자질을 갖췄다.
|
||
|
||
그러나 완성되기 위해서 버리지 못했을 뿐.
|
||
|
||
무엇을?
|
||
|
||
인간성을. 가면 뒤에 있는 디에타란 존재를.
|
||
|
||
실패를 경험한 천재는 실패로부터 배운다.
|
||
|
||
죽이지 못한 고통은 더 강하게 만들 뿐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호위 기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디에타는 여기서 스스로의 삶을 끊는다느니, 좌절하여 망가진다느니 같은 미련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
||
|
||
더 철저해지리라.
|
||
|
||
더 완벽해지리라.
|
||
|
||
더 악착같아지리라.
|
||
|
||
그러나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디에타’로서의 죽음이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디에타라는 소녀는 온데간데없으리라. 금화를 삼키는 뱀만이 이 자리에 남아있겠지.
|
||
|
||
‘그래도, 하룻밤 정도는 괜찮겠지.’
|
||
|
||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독방에 찾아온 밤은 길고도 길다. 아직 허물을 벗지 못한 뱀은, 디에타로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자 제 감정을 털어냈다.
|
||
|
||
꼴사납게 울고, 어깨를 떨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막힌 숨소리를 토해냈다.
|
||
|
||
그때였다.
|
||
|
||
후두둑.
|
||
|
||
디에타의 머리 위로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
||
|
||
천천히 디에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독방. 그러나, 천장에 새하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
|
||
그리곤, 스걱.
|
||
|
||
빛이 움직였다. 사각형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 빛과 함께 천장의 일부분이 뜯어져 나갔다. 그제서야, 디에타는 빛나는 것이 검기였음을 깨달았다.
|
||
|
||
탁.
|
||
|
||
도려진 천장의 구멍 사이로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인물은 어둠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인기척만이 느껴질 뿐. 겁에 질린 디에타가 숨을 헛삼킨 순간이다.
|
||
|
||
화악.
|
||
|
||
정체불명의 인물이 품속에서 등 하나를 꺼냈다. 노을빛의 광석이 어스름하게 방안을 밝혔다.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디에타는 침입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
||
|
||
“···이반?”
|
||
|
||
회색빛의 머리칼과 노을빛의 눈동자.
|
||
|
||
상상치 못한 인물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
||
|
||
3.
|
||
|
||
디에타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
||
|
||
자신이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
||
|
||
왜 여기에 저 사람이 있는 거지? 이곳에 찾아올 이유도, 찾아올 수도 없었을 텐데?
|
||
|
||
“당신의 호위 기사, 파시온이 부탁했습니다.”
|
||
|
||
그렇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디에타에게 나진이 입을 열었다. 나진은 광석등을 디에타 앞에 내려두곤, 무릎을 굽혀 디에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
||
|
||
“당신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도록, 전서구가 되어달라고. 그 역할을 하려고 찾아오긴 했는데···.”
|
||
|
||
디에타를 바라보던 나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
|
||
며칠 사이에 앙상해진 모습과, 힘줄이 잘린 발목이 시선에 들어온 까닭이다. 길게 숨을 내뱉은 나진이 마저 말을 이었다.
|
||
|
||
“부탁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
||
|
||
“어떻게······.”
|
||
|
||
디에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
갑작스레 제 앞에 나타난 남자.
|
||
|
||
나진의 모습에 디에타는 적잖게 당황했다. 파시온의 부탁이라고? 전서구 역할이 되어주겠다고? 나진이 내뱉은 말을 곱씹던 디에타가 눈을 깜빡였다.
|
||
|
||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
||
|
||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건, 금화를 삼키는 뱀이 아닌 그냥 디에타였으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소녀는 따라가지 못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자신을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테지만······.
|
||
|
||
“왜···.”
|
||
|
||
소녀는 문득 중얼거리고 말았다.
|
||
|
||
“왜, 의뢰를 받았어요?”
|
||
|
||
눈앞의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었을까,
|
||
|
||
혹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던 까닭이었을까, 캄브리아에서 저 남자와 함께했던 시간이 제법 즐거운 까닭이었을까.
|
||
|
||
아니면 그 모두였을까.
|
||
|
||
디에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
||
|
||
“당신에게 이득이 전혀 없는··· 일이잖아요. 위험해요. 공작가와 엮이면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
||
|
||
그럴 수밖에 없었다.
|
||
|
||
자신을 찾아왔단 사실에 느낀 기쁨도 잠시,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 엮여선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
||
|
||
“왜···?”
|
||
|
||
디에타는 안다.
|
||
|
||
이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 안다. 아르베니아 공작가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일이며,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
||
|
||
기회를 놓치지 않는 상인이 아닌.
|
||
|
||
그저 인간으로서의 디에타는.
|
||
|
||
이 상황에 저 남자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만다. 자신과 엮이면 저 남자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저 남자가 추락하는 걸 디에타는 바라지 않았다.
|
||
|
||
무엇보다도 낯설었다.
|
||
|
||
그녀는 이런 호의를, 형편 좋은 이야기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디에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질문을 던지고 마는 것이다.
|
||
|
||
어째서 그랬냐고.
|
||
|
||
그 이유를 묻고야 만다.
|
||
|
||
“왜라뇨.”
|
||
|
||
그리고 그 질문에 나진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답할 뿐이었다.
|
||
|
||
“지난번에 약속한 거 있잖습니까.”
|
||
|
||
“···약속, 이요?”
|
||
|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번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
||
|
||
그런 적이 있었다.
|
||
|
||
딱히 계약서를 쓰지도 않았고, 무언가로 흔적을 남기지도 않은, 노을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던 기억만이 유일한 증거인 약속.
|
||
|
||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
||
|
||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그저 몇 마디에 불과한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이런 일을?
|
||
|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는 디에타를 향해, 나진은 말을 이었다.
|
||
|
||
“그러니까.”
|
||
|
||
“당신도 앞뒤 따지지 말고 그냥 말하면 됩니다. 왜, 어째서,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고.”
|
||
|
||
도와달라고.
|
||
|
||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
||
|
||
“그럼, 도와드리겠습니다.”
|
||
|
||
대가고, 리스크고, 위험이고, 아르베니아 공작가고 나발이고 도와주겠다고. 내가 그리 정했으니까 당신은 말만 하면 된다고.
|
||
|
||
너무나도 속 편한 이야기다.
|
||
|
||
너무나도, 편의주의적인 이야기다.
|
||
|
||
그러나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디에타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남아 엉망이 된 얼굴로 디에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새어 나온 것은 소녀의 본심이다.
|
||
|
||
“이곳에서···.”
|
||
|
||
디에타가 말했다.
|
||
|
||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
||
|
||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진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은 있냐, 나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방법은 있냐···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나진은 그저 짧게 답했다.
|
||
|
||
“그렇게 하죠.”
|
||
|
||
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
광석등을 탁, 하고 꺼트려 품에 집어넣자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한순간에 다시 어두워진 독방에 디에타가 눈을 깜빡인 순간이다.
|
||
|
||
콰아아아아앙!
|
||
|
||
벽이 뒤흔들렸다.
|
||
|
||
움찔, 하고 몸을 떤 디에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어둠뿐인 독방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
||
|
||
창문에 못 박아둔 목재를 나진은 냅다 발로 걷어차 박살 내버린 것이다. 숫제 시원하기까지 한 행동 앞에 디에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
|
||
새어 들어오는 달빛, 혹은 별빛. 백금색의 빛을 받아 나진의 회색빛 머리칼이 반짝이고 있었다.
|
||
|
||
“목적지는 천천히 정하기로 하고.”
|
||
|
||
일단 갑시다.
|
||
|
||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진이 디에타에게 다가왔다.
|
||
|
||
쿵쿵쿵.
|
||
|
||
나진이 일으킨 소란에 반응하듯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도, 기사들이 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진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릎을 굽혀 디에타를 안아 들었다.
|
||
|
||
발목에 손이 닿지 않게끔 조심스레.
|
||
|
||
그러나, 놓치지는 않을 만큼 확실하게.
|
||
|
||
디에타를 안아 든 나진이 땅을 박차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디에타는 나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보였다.
|
||
|
||
노을빛의 눈동자.
|
||
|
||
디에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나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
||
|
||
4.
|
||
|
||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거냐?”
|
||
|
||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그리핀.
|
||
|
||
별장에 파견했던 기사들을 모두 소집시켜 전날 밤 일어난 사건의 경위를 보고받던 그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
||
|
||
“별장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천장을 도려내고 창문까지 박살 내고 나갔는데 그놈을 본 놈이 한 명도 없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
||
|
||
사용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
|
||
|
||
갑작스레 일어난 화재에 별장은 혼란스러웠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 작정하고 숨어든다면 사용인들이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
||
|
||
하지만, 기사들은 다르다.
|
||
|
||
훈련된 기사란 놈들이 그걸 감지하지 못했단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
||
|
||
“기사가 일곱이나 지키고 있었는데, 침입자를 본 놈이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물었다.”
|
||
|
||
일곱이다. 잘 훈련된 기사가 자그마치 일곱.
|
||
|
||
그들의 눈과 귀를 피해 감금된 공녀를 대놓고 납치해 가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란 말인가. 그리핀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
“비켜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테니.”
|
||
|
||
한숨을 내쉬며 그리핀이 걸음을 옮겼다.
|
||
|
||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 이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으며, 보고를 받은 순간 오스만 역시 눈을 부릅떴다. 그야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
||
|
||
공작가의 별장에 침입해 공녀를 납치하다.
|
||
|
||
이 한 줄의 문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인지, 또 얼마만큼의 파란을 불고 올지 예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는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명성과도 직결된 대사건이었으며,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될 이야기였다.
|
||
|
||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
||
|
||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쥔 채 그리핀은 별장에 남은 흔적을 확인했다. 침입자가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 경로를 확인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
||
|
||
‘소드 엑스퍼트 일곱.’
|
||
|
||
일곱을 상대로 기척조차 내지 않고, 숨어들어 공녀를 납치해 갔다니. 소드 시커인 그리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정면에서 개박살 내며 들어가는 게 훨씬 간단할 테니까.
|
||
|
||
‘레인저인가?’
|
||
|
||
가장 먼저 유추할 수 있는 대상은 레인저.
|
||
|
||
디에타 아르베니아가 부릴 수 있는 족속 중에 레인저가 있었나? 확실히, 캄브리아에는 실력 있는 레인저가 몇 존재하긴 한다.
|
||
|
||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카프만 테오시스다.
|
||
|
||
소드 시커와 동급의 강자라 평가받는, 테첼 산맥의 레인저 카프만 테오시스. 그가 디에타와 협력했다면 확실히 추적은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그 남자가 이런 일에 발을 들일 것 같진 않았다.
|
||
|
||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
||
|
||
그리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
계획은 수틀렸고 상황은 엎어졌다.
|
||
|
||
이런 상황일수록 빠른 판단과 대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얼추 계산한 그리핀은 결정을 내렸다. 제 뒤를 따라오던 기사 하나를 그가 불러세웠다.
|
||
|
||
“오스만 공작님께 전해라.”
|
||
|
||
그가 말했다.
|
||
|
||
“추격대를 편성해 공작가에 잠입한 무뢰배를 추격하겠다고.”
|
||
|
||
그리고.
|
||
|
||
“추격대의 선두는 내가 맡는다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