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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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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어머니가 목매달아 죽었다.

일곱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였다.

창녀의 딸, 버려진 자식, 더러운 피, 시종들의 속삭임과 언니오빠들의 비웃음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식탁에서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차가운 음식을 먹었다.

여덟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다.

시종들의 괴롭힘. 오빠의 거짓말. 언니들의 증언.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하여금 방에 갇혔다. 창문 너머로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열한 번째 생일날의 이야기다.

아무도.

열둘.

찾아오지 않는.

열셋.

모함, 거짓말, 저지르지도 않은 일, 괴롭힘, 차가운 음식, 비웃음, 조롱, 창녀의 딸. 버려진 자식. 조롱만이 가득한 하루.

열넷.

독방에서 디에타는 거울을 마주한 채 미소 지었다.

열넷.

가면이 완성됐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도 더는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게 됐다. 모든 것들을 다만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열다섯 번째 생일날.

디에타는 가문을 떠났다.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너희들을 모두 집어삼켜 버리겠노라는 맹세를 다지고서.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독방.

무릎을 끌어안은 채 디에타는 몸을 웅크렸다.

발목이 아팠다. 지난 사흘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까닭에 자꾸만 눈이 감겨왔으나, 욱신거리는 발목이 잠을 깨웠다.

수면 부족. 고통. 그리고 굶주림.

약물 냄새가 진동하는 식사. 숨길 생각도 없이 건네는 희뿌연 물. 무엇을 탔는지, 무슨 짓을 해놨는지 알 수 없기에 쉽사리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별장에 있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이곳에 아군은 없다.

모든 게 적이었고 모든 게 함정이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은 피로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피로함을 해소할 방법이 지금의 디에타에겐 없다. 지난 사흘간 갉아 먹힌 정신은 이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면은 흔들렸고, 둔탁해진 사고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계획. 빠져나갈 방법. 쓸 수 있는 수단.

평상시의 그녀라면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계에 내몰린 지금 이 순간마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생각이 정상적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이윽고 디에타는 한계를 맞이한다.

결국에 그녀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벗겨졌다.

금화를 삼키는 뱀, 기회의 도시에 성공 신화를 써 내린 젊은 거상, 투자의 귀재, 대상인의 자질을 갖춘 천재 중의 천재······.

디에타 아르베니아를 장식하던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이 하나둘 벗겨지기 시작했다. 가면이, 상단주의 제복이, 값비싼 액세서리가, 그녀가 제 가치를 불리기 위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간다.

모든 게 발가벗겨지고 남은 것은.

금화를 삼키는 뱀도.

아르베니아의 버려진 자식도.

디에타 아르베니아도 아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한껏 몸을 웅크린 한 명의 소녀일 뿐이다. 상처 입고, 망가지고, 곪아버린, 그리고 그것들을 가리고자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해 온 소녀가 그곳에 있다.

디에타는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입술이 떨리고 눈가가 경련했다. 이윽고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거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면으로 눌러둔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웃어넘기고,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넘겼던 일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계기를 맞이해 범람하고 말았다. 어깨를 얕게 떨며 디에타는 이를 악물었다.

가면은 벗겨졌다.

새로운 가면이 필요했다.

더 단단하고, 더 정교하고, 다시는 벗겨지지 않을 가면이 필요했다. 궁지에 몰린 디에타는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을 계획한 오스만의 의도였으나··· 오스만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다.

망가진 인간이 꼭 포기하란 법은 없다.

디에타는 독종 중의 독종이다.

망가트릴 순 있어도, 꺾어버리진 못한다.

이를 악문 디에타는 독백한다.

이젠 누구도 믿지 않겠다.

오늘 밤, 남은 감정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새로운 가면을 쓰게 된다면··· 다시는 이 가면을 벗을 일은 없으리라.

정략결혼으로 자신을 팔아넘기겠다고? 마지막까지 가치를 뽑겠다고? 그리해라. 얼마든지 그리해봐라.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아치우겠다. 쓸 수 있는 수단이란 수단은 전부 쓰겠다. 이 몸을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음을 기약한다. 반드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너희 모두를 집어삼키리라.

···고난과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법이다. 디에타의 샛노란 눈동자에서 새까만 불길이 피어올랐다.

다시 말하지만.

디에타 아르베니아는 천재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 돈의 흐름과 가치를 재단하며 금화를 움켜쥐는 그녀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상로를 움켜쥐고 가장 높은 곳에 오를 대상인의 자질과, 사람을 휘어잡는 권력가의 자질을 갖췄다.

그러나 완성되기 위해서 버리지 못했을 뿐.

무엇을?

인간성을. 가면 뒤에 있는 디에타란 존재를.

실패를 경험한 천재는 실패로부터 배운다.

죽이지 못한 고통은 더 강하게 만들 뿐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호위 기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디에타는 여기서 스스로의 삶을 끊는다느니, 좌절하여 망가진다느니 같은 미련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더 철저해지리라.

더 완벽해지리라.

더 악착같아지리라.

그러나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디에타’로서의 죽음이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디에타라는 소녀는 온데간데없으리라. 금화를 삼키는 뱀만이 이 자리에 남아있겠지.

‘그래도, 하룻밤 정도는 괜찮겠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독방에 찾아온 밤은 길고도 길다. 아직 허물을 벗지 못한 뱀은, 디에타로서의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자 제 감정을 털어냈다.

꼴사납게 울고, 어깨를 떨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막힌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때였다.

후두둑.

디에타의 머리 위로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천천히 디에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독방. 그러나, 천장에 새하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곤, 스걱.

빛이 움직였다. 사각형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 빛과 함께 천장의 일부분이 뜯어져 나갔다. 그제서야, 디에타는 빛나는 것이 검기였음을 깨달았다.

탁.

도려진 천장의 구멍 사이로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인물은 어둠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인기척만이 느껴질 뿐. 겁에 질린 디에타가 숨을 헛삼킨 순간이다.

화악.

정체불명의 인물이 품속에서 등 하나를 꺼냈다. 노을빛의 광석이 어스름하게 방안을 밝혔다.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디에타는 침입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반?”

회색빛의 머리칼과 노을빛의 눈동자.

상상치 못한 인물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디에타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자신이 환각이라도 보는 걸까.

왜 여기에 저 사람이 있는 거지? 이곳에 찾아올 이유도, 찾아올 수도 없었을 텐데?

“당신의 호위 기사, 파시온이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디에타에게 나진이 입을 열었다. 나진은 광석등을 디에타 앞에 내려두곤, 무릎을 굽혀 디에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신이 외부와 소통할 수 있도록, 전서구가 되어달라고. 그 역할을 하려고 찾아오긴 했는데···.”

디에타를 바라보던 나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며칠 사이에 앙상해진 모습과, 힘줄이 잘린 발목이 시선에 들어온 까닭이다. 길게 숨을 내뱉은 나진이 마저 말을 이었다.

“부탁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어떻게······.”

디에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갑작스레 제 앞에 나타난 남자.

나진의 모습에 디에타는 적잖게 당황했다. 파시온의 부탁이라고? 전서구 역할이 되어주겠다고? 나진이 내뱉은 말을 곱씹던 디에타가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건, 금화를 삼키는 뱀이 아닌 그냥 디에타였으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을 소녀는 따라가지 못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자신을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테지만······.

“왜···.”

소녀는 문득 중얼거리고 말았다.

“왜, 의뢰를 받았어요?”

눈앞의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었을까,

혹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던 까닭이었을까, 캄브리아에서 저 남자와 함께했던 시간이 제법 즐거운 까닭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두였을까.

디에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에게 이득이 전혀 없는··· 일이잖아요. 위험해요. 공작가와 엮이면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찾아왔단 사실에 느낀 기쁨도 잠시,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 엮여선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왜···?”

디에타는 안다.

이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 안다. 아르베니아 공작가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일이며,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상인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의 디에타는.

이 상황에 저 남자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만다. 자신과 엮이면 저 남자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저 남자가 추락하는 걸 디에타는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낯설었다.

그녀는 이런 호의를, 형편 좋은 이야기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디에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질문을 던지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 그랬냐고.

그 이유를 묻고야 만다.

“왜라뇨.”

그리고 그 질문에 나진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답할 뿐이었다.

“지난번에 약속한 거 있잖습니까.”

“···약속, 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번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그런 적이 있었다.

딱히 계약서를 쓰지도 않았고, 무언가로 흔적을 남기지도 않은, 노을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던 기억만이 유일한 증거인 약속.

고작··· 그거 하나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그저 몇 마디에 불과한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이런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는 디에타를 향해, 나진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앞뒤 따지지 말고 그냥 말하면 됩니다. 왜, 어째서,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뤄두고.”

도와달라고.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도와드리겠습니다.”

대가고, 리스크고, 위험이고, 아르베니아 공작가고 나발이고 도와주겠다고. 내가 그리 정했으니까 당신은 말만 하면 된다고.

너무나도 속 편한 이야기다.

너무나도, 편의주의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디에타의 입술은 움직이고 있었다. 눈물자국이 남아 엉망이 된 얼굴로 디에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새어 나온 것은 소녀의 본심이다.

“이곳에서···.”

디에타가 말했다.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진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책은 있냐, 나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방법은 있냐···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나진은 그저 짧게 답했다.

“그렇게 하죠.”

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광석등을 탁, 하고 꺼트려 품에 집어넣자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한순간에 다시 어두워진 독방에 디에타가 눈을 깜빡인 순간이다.

콰아아아아앙!

벽이 뒤흔들렸다.

움찔, 하고 몸을 떤 디에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어둠뿐인 독방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창문에 못 박아둔 목재를 나진은 냅다 발로 걷어차 박살 내버린 것이다. 숫제 시원하기까지 한 행동 앞에 디에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새어 들어오는 달빛, 혹은 별빛. 백금색의 빛을 받아 나진의 회색빛 머리칼이 반짝이고 있었다.

“목적지는 천천히 정하기로 하고.”

일단 갑시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진이 디에타에게 다가왔다.

쿵쿵쿵.

나진이 일으킨 소란에 반응하듯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도, 기사들이 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진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릎을 굽혀 디에타를 안아 들었다.

발목에 손이 닿지 않게끔 조심스레.

그러나, 놓치지는 않을 만큼 확실하게.

디에타를 안아 든 나진이 땅을 박차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디에타는 나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보였다.

노을빛의 눈동자.

디에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나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거냐?”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그리핀.

별장에 파견했던 기사들을 모두 소집시켜 전날 밤 일어난 사건의 경위를 보고받던 그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별장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천장을 도려내고 창문까지 박살 내고 나갔는데 그놈을 본 놈이 한 명도 없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사용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

갑작스레 일어난 화재에 별장은 혼란스러웠고,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 작정하고 숨어든다면 사용인들이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기사들은 다르다.

훈련된 기사란 놈들이 그걸 감지하지 못했단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기사가 일곱이나 지키고 있었는데, 침입자를 본 놈이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물었다.”

일곱이다. 잘 훈련된 기사가 자그마치 일곱.

그들의 눈과 귀를 피해 감금된 공녀를 대놓고 납치해 가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란 말인가. 그리핀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켜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테니.”

한숨을 내쉬며 그리핀이 걸음을 옮겼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 이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으며, 보고를 받은 순간 오스만 역시 눈을 부릅떴다. 그야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공작가의 별장에 침입해 공녀를 납치하다.

이 한 줄의 문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인지, 또 얼마만큼의 파란을 불고 올지 예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는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명성과도 직결된 대사건이었으며,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될 이야기였다.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쥔 채 그리핀은 별장에 남은 흔적을 확인했다. 침입자가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 경로를 확인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드 엑스퍼트 일곱.

일곱을 상대로 기척조차 내지 않고, 숨어들어 공녀를 납치해 갔다니. 소드 시커인 그리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정면에서 개박살 내며 들어가는 게 훨씬 간단할 테니까.

‘레인저인가?

가장 먼저 유추할 수 있는 대상은 레인저.

디에타 아르베니아가 부릴 수 있는 족속 중에 레인저가 있었나? 확실히, 캄브리아에는 실력 있는 레인저가 몇 존재하긴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카프만 테오시스다.

소드 시커와 동급의 강자라 평가받는, 테첼 산맥의 레인저 카프만 테오시스. 그가 디에타와 협력했다면 확실히 추적은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그 남자가 이런 일에 발을 들일 것 같진 않았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리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수틀렸고 상황은 엎어졌다.

이런 상황일수록 빠른 판단과 대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얼추 계산한 그리핀은 결정을 내렸다. 제 뒤를 따라오던 기사 하나를 그가 불러세웠다.

“오스만 공작님께 전해라.”

그가 말했다.

“추격대를 편성해 공작가에 잠입한 무뢰배를 추격하겠다고.”

그리고.

“추격대의 선두는 내가 맡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