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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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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주인인 오스만 아르베니아의 앞에,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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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신 대로 디에타 아가씨를 별장으로 모셨습니다. 믿을만한 기사를 보내 별장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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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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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 턱을 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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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시종들에게 지시는 전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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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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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네. 그리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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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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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 그리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핀은 겉보기에는 삼십 대 초중반 즈음의 외모를 가졌으나,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을 오스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핀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곁을 지키던 기사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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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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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 그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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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주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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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령을 내리신 저의를 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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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무례할지도 모를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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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기사가 던졌다면 적당히 웃어넘기거나, 답하지 않았을 질문이나··· 그리핀은 오스만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이자, 오랜 세월 함께한 친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오스만은 기꺼이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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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위험하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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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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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내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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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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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삼남이었던 오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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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경쟁에서 밀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인물. 그러나 결국 공작가의 주인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스만 아르베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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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되는 것을 제거한다. 높게 올라가는 이를 끌어내리고, 한번 끌어내린 이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도록 부러트리고 망가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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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후계 경쟁이 끝나갈 무렵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은 오스만밖에 없었다. 남은 이들은 폐인이 되거나, 의욕을 잃었거나, 어딘가로 도피해버린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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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게 바로 그리핀이었다. 기억을 곱씹으며 그리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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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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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그 아이는 권력가의 자질을 갖췄다.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아이이지. 그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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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은 턱을 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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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시오도, 다른 아이들도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디에타 그 아이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 안타까운 일이야. 내 피를 가장 강하게 이어받은 게, 하필이면 그 아이라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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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아르베니아는 찻잔에 비춘 제 눈동자를 바라봤다. 샛노란 눈동자. 가치를 재단하는 이 눈동자야말로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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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한 말이 맞아. 그 아이의 가치는 이런 한철 장사로 팔아치우기엔 아까운 것이지. 5년의 시간을 더 주면? 그 아이의 상단은 더욱 커지겠지. 공작가조차 쉬이 손을 댈 수 없을 만큼의 규모를 가지게 될 것이야. 필시 그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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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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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그리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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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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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눈동자가 뱀처럼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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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의 가치는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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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찻잔을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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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덩치를 키우면 키울수록 나를 삼키는 뱀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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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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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는,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공작가의 주인 자리를 꿰찬 자신을 닮아 있었다. 그 아이는 언젠가 분명 자신의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고, 공작가를 집어삼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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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확신이었고 신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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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오스만을 동족으로 여겼듯, 오스만 역시 디에타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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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삼킬 수 있을 때 삼켜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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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내 목을 물어뜯을 짐승을 키우는 취미는 없네, 하고 오스만은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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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를 키우려거늘 발톱과 이빨을 뽑아버리고, 기어오르려 할 때마다 매질하여 누가 위에 있는지 각인시켜야 한다. 그리고 오스만은 그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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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물지 못한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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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자라지 못한 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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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아르베니아는 그런 이들을 몇번이고 짓밟고 망가트리며 이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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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짓밟아 다시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꺾어놓도록 하게. 무얼,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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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이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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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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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대의 소녀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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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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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 님께선 함정에 빠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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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에 무릎을 꿇은 채 파시온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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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파시온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건 아르베니아 공작가 내부 사정과, 현재 디에타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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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의 끝에 파시온은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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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을 삼키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상단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뿐, 오스만 공작의 목적은 디에타 님을 짓밟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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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내리는 명령을 파시온은 엿들었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공작은 디에타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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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요소로 여기기에 짓밟아 박살 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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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별장으로 옮겨진 디에타의 신변이 위험하다. 디에타는 조금 더 장기적인 목표를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만 공작의 계획대로라면 그 기회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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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려야 하며, 디에타 님의 손발이 되어줄 인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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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디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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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별장을 드나들며 전서구 역할을 해줄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다해야 할 파시온은 감시하에 있으며, 이런 일을 믿고 맡길만한 실력자 역시 찾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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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편에 서줄 인물인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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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소드 엑스퍼트급 이상의 실력을 갖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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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이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지만,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금화를 쫓는 모험가들이 한가득한 이 도시에선 더더욱. 공작가에 찍힐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이런 일에 뛰어들 만한 인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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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요구임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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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요구이자 위험한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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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여 얻을 이득은 적으며, 짊어져야 할 위험은 너무나도 높다. 그 사실을 파시온은 숨기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지금, 눈앞의 이에겐 진실된 정보를 전하는 것이 도리임을 알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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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감시를 피해 별장에 숨어들어, 연락을 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별장의 지도와 숨겨진 통로의 위치를 제공하긴 할 터지만, 이 의뢰를 수행함으로써 네가 얻는 이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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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설명은 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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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들은 이득과 위험을 저울질하는 이들. 이런 의뢰를 받아들일 리가 없음을 파시온은 안다. 파시온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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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보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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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풀려 디에타가 상단으로 돌아온다면, 보장할 수 있는 이득은 많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풀릴지 파시온으로선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디에타와 함께 도주하는 것까지 그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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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득, 하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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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울에 올릴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득이 아니다. 당장 자신이 올릴 수 있는 거라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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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장할 수 있는 보수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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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이 제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내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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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의 명예와, 내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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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로 맡기는 것은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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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성패 여부를 따지지 않고, 네가 공작가에 몰릴 경우 모든 죄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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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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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파시온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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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는 것은 명예와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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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들었으면, 남은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파시온과 시선을 마주한 채 나진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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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데요? 그 별장이라는 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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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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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냐고요. 별장 위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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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파시온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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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일어서라는 듯이 내민 손. 그 손을 바라보던 파시온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나진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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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받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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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는 아니고, 부탁을 받는 걸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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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에 놓인 기사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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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의 검을 주워 들며 나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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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맹세와 부탁을 받았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남은 일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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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공작가와 척질 수도 있는 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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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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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입은 전문 분야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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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던 나진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맹세 하나 지키겠다고 세상 전체와 척질 각오를 했던 제 스승이 떠오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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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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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온의 검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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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을 다시 파시온에게 건네며 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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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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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아야 할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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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빚을 갚겠다고 디에타와 약속을 했던 나진이다. 그 약속을 나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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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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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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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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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입 경로와 별장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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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장의 위치까지 모조리 전달받은 나진은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출발하기에 앞서 계획 정도는 세워둬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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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에 잠입한다라, 미친 짓인 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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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저택이 아니라 별장이라고 하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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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이든, 별채든, 공작가의 마구간이든··· 공작가와 척질만한 일이야. 그거 모르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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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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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진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명분을 앞세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작정한다면 굴러다니는 모험가 하나를 목 잘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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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와 공작가 사이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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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지하도시의 주민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 사이에 놓인 간극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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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할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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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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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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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요. 약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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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잘 안 간다는 멀린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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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응에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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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도 알죠? 제가 딱히 정의에 목 매는 것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고 목숨을 거는 성격도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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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서 살아온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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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숱한 사람을 죽였고, 필요에 따라선 악행도 서슴치 않았다. 엑스칼리버를 뽑고 지하도시를 빠져나왔다 해서,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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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자신을 포장할 생각이 없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모순되게 행동할 생각도, 남에게 제 가치관을 설파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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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을 저지르든 말든 그게 내 알바는 아니다. 그걸 바로잡을 생각도 없다. 내게 위해를 가한 게 아니라면,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처벌하고, 그들에게 정의를 강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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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가 그리 깨끗한 사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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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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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딱 하나 용납이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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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제 검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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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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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를 지키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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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하도시에서 보았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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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란 작위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기사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기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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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꿈이 더럽혀지는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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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시에서 꿈꾸던 별과 기사들의 모습은 저렇지 않았으니까. 이는 어쩌면 모든 것을 놓아도, 제 꿈만은 놓치지 못한 소년의 고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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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담은 말은 지킨다. 맹세와 약속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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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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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되고 싶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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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걸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약속한 걸 지켜볼 생각입니다. 뭣보다, 그 아르베니아 공작가가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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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좀 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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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진은 말했다. 멀린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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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미련해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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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위도 없는 놈이, 기사의 계율을 지켜보겠다고 이렇게 행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하물며 같은 기사들 사이에서도 계율을 지키는 이를 ‘미련하다’라고 부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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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가 없는 것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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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독백을 엿듣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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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지키려 든다. 지켜서 얻는 것이 없음에도, 그것을 목숨 걸고 지키려 든다. 그래, 네 말마따나 그건 미련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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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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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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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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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셨던 왕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었단 거 말야. 지금 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건 인물은 우인(愚人)이라 불리던, 미련한 기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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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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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확인하고자 한 건 네 행동의 옳고 그름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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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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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알고서도 그렇게 선택했는가. 위험을 알고서도, 네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는가. 그 부분이었지. 그걸 확인했으니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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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내뱉은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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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멀린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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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원하는 대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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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것은 네 몫이고, 최악을 대비하는 것은 길잡이의 역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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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피식 웃었다. 파시온에게 건네받은 로브를 두르고, 얼굴을 가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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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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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망가트리는 법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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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디에타는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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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멍하니 제 발목을 바라봤다. 별장으로 들이자마자 기사들이 자신에게 한 짓을 떠올린 디에타는, 이젠 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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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들은 돌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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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소리를 내며 별장의 문이 닫힌 순간 기사들은 디에타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무릎 꿇리고, 입에 수건을 물리고선 검기를 뽑아낸 검으로 그녀의 발목을 그었다. 힘줄을 끊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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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과 사제만 있다면 얼마든 회복할 수 있는 부상. 하지만, 디에타 혼자의 힘으론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이다. 이 감옥 같은 별장에서 나오기 전까지 디에타는 남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조차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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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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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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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의 입가가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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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덮어쓰고,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무장했다고 생각했거늘 발목이 그어지는 순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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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점부터 디에타는 깨달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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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철저하게 자신을 짓밟고, 꺾어버리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새의 날개를 부러트리기 위한 새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곳에서 디에타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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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신거리는 발목 탓에 방해받는 숙면. 뭘 탄지 모를 음식. 시종들의 괴롭힘과 햇빛조차 쐬지 못하게 못 박힌 창문. 아무것도 없는 방은 디에타의 정신을 천천히 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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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망가트리는 건,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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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 한들 디에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소녀에 불과하다. 숱한 고문에 대비한 훈련을 거친 기사가 아닐뿐더러, 고통에 대한 내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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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한다면 망가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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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싶었다. 그녀의 가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쓸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들었다. 새로운 수단을 갈구해야 함을 알고는 있지만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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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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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타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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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독실에서, 그녀는 다만 벗겨지려는 가면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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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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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의 바로 뒷편에 위치한 작은 숲속에서 불길이 피어오름을. 난데없이 발생한 불길을 꺼트리고자 시종들이 뛰쳐나가고 있단 사실을. 그리고, 소란 속에서 움직이는 모험가 하나가 있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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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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