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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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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베니아 공작가.

공작가의 주인인 오스만 아르베니아의 앞에, 기사 하나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명하신 대로 디에타 아가씨를 별장으로 모셨습니다. 믿을만한 기사를 보내 별장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한가.”

오스만이 턱을 괸 채 말했다.

“기사와 시종들에게 지시는 전달했나?”

“그 또한,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수고했네. 그리핀 경.”

“하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 그리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핀은 겉보기에는 삼십 대 초중반 즈음의 외모를 가졌으나,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을 오스만은 알고 있었다. 그리핀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곁을 지키던 기사였으므로.

아르베니아 공작가의 기사단장.

소드 시커, 그리핀.

그가 제 주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런 명령을 내리신 저의를 묻고자 합니다.”

어찌 보면 무례할지도 모를 질문.

평범한 기사가 던졌다면 적당히 웃어넘기거나, 답하지 않았을 질문이나··· 그리핀은 오스만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이자, 오랜 세월 함께한 친우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오스만은 기꺼이 답해주었다.

“그야, 위험하기 때문이지.”

오스만이 미소 지었다.

“그리핀. 내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문의 삼남이었던 오스만.

후계 경쟁에서 밀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인물. 그러나 결국 공작가의 주인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오스만 아르베니아였다.

방해되는 것을 제거한다. 높게 올라가는 이를 끌어내리고, 한번 끌어내린 이는 다시는 올라갈 수 없도록 부러트리고 망가트린다.

치열했던 후계 경쟁이 끝나갈 무렵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것은 오스만밖에 없었다. 남은 이들은 폐인이 되거나, 의욕을 잃었거나, 어딘가로 도피해버린 까닭이다.

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게 바로 그리핀이었다. 기억을 곱씹으며 그리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곧······.”

“디에타, 그 아이는 권력가의 자질을 갖췄다.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한 재능을 가진 아이이지. 그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아.”

오스만은 턱을 괸 채 말했다.

“아게시오도, 다른 아이들도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디에타 그 아이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 안타까운 일이야. 내 피를 가장 강하게 이어받은 게, 하필이면 그 아이라는 사실이.”

오스만 아르베니아는 찻잔에 비춘 제 눈동자를 바라봤다. 샛노란 눈동자. 가치를 재단하는 이 눈동자야말로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한 말이 맞아. 그 아이의 가치는 이런 한철 장사로 팔아치우기엔 아까운 것이지. 5년의 시간을 더 주면? 그 아이의 상단은 더욱 커지겠지. 공작가조차 쉬이 손을 댈 수 없을 만큼의 규모를 가지게 될 것이야. 필시 그리하겠지.”

“그렇다면······.”

“그래서다, 그리핀 경.”

오스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샛노란 눈동자가 뱀처럼 번들거렸다.

“그 아이의 가치는 높지만.”

그가 찻잔을 툭, 건드렸다.

“그건 내가 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덩치를 키우면 키울수록 나를 삼키는 뱀이 되겠지.”

그 누구보다 자신을 닮은 아이다.

그 눈동자는,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공작가의 주인 자리를 꿰찬 자신을 닮아 있었다. 그 아이는 언젠가 분명 자신의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고, 공작가를 집어삼키리라.

그건 확신이었고 신뢰였다.

디에타가 오스만을 동족으로 여겼듯, 오스만 역시 디에타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삼킬 수 있을 때 삼켜야 하지 않겠나?”

나는 언젠가 내 목을 물어뜯을 짐승을 키우는 취미는 없네, 하고 오스만은 소리 내 웃었다.

맹수를 키우려거늘 발톱과 이빨을 뽑아버리고, 기어오르려 할 때마다 매질하여 누가 위에 있는지 각인시켜야 한다. 그리고 오스만은 그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꽃잎.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맹수.

오스만 아르베니아는 그런 이들을 몇번이고 짓밟고 망가트리며 이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으므로.

“철저하게 짓밟아 다시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꺾어놓도록 하게. 무얼,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오스만이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사람이란 생각보다 쉽게 망가지는 법이거든.”

그 나이대의 소녀라면 더더욱.

“디에타 님께선 함정에 빠지셨다.”

진창에 무릎을 꿇은 채 파시온은 말했다.

나진은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파시온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건 아르베니아 공작가 내부 사정과, 현재 디에타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설명의 끝에 파시온은 결론을 냈다.

“상단을 삼키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상단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뿐, 오스만 공작의 목적은 디에타 님을 짓밟는 데 있다.”

공작이 내리는 명령을 파시온은 엿들었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공작은 디에타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위험 요소로 여기기에 짓밟아 박살 내려 한다.

그렇기에 별장으로 옮겨진 디에타의 신변이 위험하다. 디에타는 조금 더 장기적인 목표를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만 공작의 계획대로라면 그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하며, 디에타 님의 손발이 되어줄 인물이 필요하다.”

고립된 디에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별장을 드나들며 전서구 역할을 해줄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다해야 할 파시온은 감시하에 있으며, 이런 일을 믿고 맡길만한 실력자 역시 찾기 쉽지 않다.

디에타의 편에 서줄 인물인 동시에.

최소 소드 엑스퍼트급 이상의 실력을 갖춘 자.

두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이는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지만,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금화를 쫓는 모험가들이 한가득한 이 도시에선 더더욱. 공작가에 찍힐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이런 일에 뛰어들 만한 인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무리한 요구임은 안다.”

무리한 요구이자 위험한 의뢰.

수행하여 얻을 이득은 적으며, 짊어져야 할 위험은 너무나도 높다. 그 사실을 파시온은 숨기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지금, 눈앞의 이에겐 진실된 정보를 전하는 것이 도리임을 알고 있으므로.

“기사들의 감시를 피해 별장에 숨어들어, 연락을 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별장의 지도와 숨겨진 통로의 위치를 제공하긴 할 터지만, 이 의뢰를 수행함으로써 네가 얻는 이득은······.”

그렇기에 설명은 궁해진다.

모험가들은 이득과 위험을 저울질하는 이들. 이런 의뢰를 받아들일 리가 없음을 파시온은 안다. 파시온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당장은 보장할 수 없다.”

일이 잘 풀려 디에타가 상단으로 돌아온다면, 보장할 수 있는 이득은 많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풀릴지 파시온으로선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디에타와 함께 도주하는 것까지 그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까득, 하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울에 올릴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득이 아니다. 당장 자신이 올릴 수 있는 거라곤 하나.

“내가 보장할 수 있는 보수는 하나.”

파시온이 제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내려두었다.

“내 개인의 명예와, 내 모든 것이다.”

담보로 맡기는 것은 목숨.

“일의 성패 여부를 따지지 않고, 네가 공작가에 몰릴 경우 모든 죄는 내가······.”

“그래서.”

나진이 파시온의 말을 끊었다.

거는 것은 명예와 모든 것.

거기까지 들었으면, 남은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든 파시온과 시선을 마주한 채 나진이 말을 이었다.

“어딘데요? 그 별장이라는 데가.”

“···뭐?”

“어디냐고요. 별장 위치가.”

나진이 파시온에게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서라는 듯이 내민 손. 그 손을 바라보던 파시온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나진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뢰를 받겠다는 건가?”

“의뢰는 아니고, 부탁을 받는 걸로 합시다.”

진창에 놓인 기사의 검.

파시온의 검을 주워 들며 나진이 말했다.

“기사의 맹세와 부탁을 받았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남은 일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죠.”

“부탁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공작가와 척질 수도 있는 의뢰······.”

“안 들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잠입은 전문 분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 중얼거리던 나진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맹세 하나 지키겠다고 세상 전체와 척질 각오를 했던 제 스승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리고 말입니다.”

파시온의 검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그 검을 다시 파시온에게 건네며 나진은 말했다.

“저도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든요.”

갚아야 할 빚.

그 빚을 갚겠다고 디에타와 약속을 했던 나진이다. 그 약속을 나진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겠다고?

“그럴 생각입니다.”

잠입 경로와 별장의 구조.

그리고 별장의 위치까지 모조리 전달받은 나진은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출발하기에 앞서 계획 정도는 세워둬야 할 테니까.

-공작가에 잠입한다라, 미친 짓인 건 알지?

“공작가 저택이 아니라 별장이라고 하잖습니까.”

-별장이든, 별채든, 공작가의 마구간이든··· 공작가와 척질만한 일이야. 그거 모르는 건 아니지?

“압니다.”

공작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진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명분을 앞세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작정한다면 굴러다니는 모험가 하나를 목 잘라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모험가와 공작가 사이의 간극.

그건 지하도시의 주민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 사이에 놓인 간극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할 생각이야?

“예.”

-이유는?

“말했잖아요. 약속했으니까.”

이해가 잘 안 간다는 멀린의 반응.

그 반응에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멀린도 알죠? 제가 딱히 정의에 목 매는 것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고 목숨을 거는 성격도 아니라는 거.”

지하도시에서 살아온 나진이다.

살아남기 위해 숱한 사람을 죽였고, 필요에 따라선 악행도 서슴치 않았다. 엑스칼리버를 뽑고 지하도시를 빠져나왔다 해서,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진은 자신을 포장할 생각이 없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모순되게 행동할 생각도, 남에게 제 가치관을 설파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악행을 저지르든 말든 그게 내 알바는 아니다. 그걸 바로잡을 생각도 없다. 내게 위해를 가한 게 아니라면,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처벌하고, 그들에게 정의를 강요하겠는가?

나부터가 그리 깨끗한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딱 하나 용납이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나진이 제 검을 매만졌다.

“기사.”

명예와 긍지를 지키는 이.

그리고, 지하도시에서 보았던 별.

“기사란 작위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기사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기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싫습니다.”

제 꿈이 더럽혀지는 것 같았으니까.

지하도시에서 꿈꾸던 별과 기사들의 모습은 저렇지 않았으니까. 이는 어쩌면 모든 것을 놓아도, 제 꿈만은 놓치지 못한 소년의 고집일지도 모른다.

“입에 담은 말은 지킨다. 맹세와 약속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다.”

기사의 계율.

나진이 되고 싶은 기사.

“그냥, 그런 걸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약속한 걸 지켜볼 생각입니다. 뭣보다, 그 아르베니아 공작가가 썩 마음에 들지도 않고요.”

설명이 좀 됐습니까?

그렇게 나진은 말했다. 멀린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미련해 보이겠지.

기사 작위도 없는 놈이, 기사의 계율을 지켜보겠다고 이렇게 행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하물며 같은 기사들 사이에서도 계율을 지키는 이를 ‘미련하다’라고 부르지 않던가.

-가치가 없는 것에 집착한다.

나진의 독백을 엿듣던 멀린이 입을 열었다.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을 지키려 든다. 지켜서 얻는 것이 없음에도, 그것을 목숨 걸고 지키려 든다. 그래, 네 말마따나 그건 미련한 일이지.

멀린은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그녀가 웃었다.

-내가 모셨던 왕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었단 거 말야. 지금 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건 인물은 우인(愚人)이라 불리던, 미련한 기사였어.

멀린이 말을 이었다.

-내가 확인하고자 한 건 네 행동의 옳고 그름이 아냐.

“그럼요?”

-네가 알고서도 그렇게 선택했는가. 위험을 알고서도, 네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는가. 그 부분이었지. 그걸 확인했으니까 됐어.

짧게 내뱉은 숨결.

직후,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멀린은 속삭였다.

-네 원하는 대로 해.

-길을 걷는 것은 네 몫이고, 최악을 대비하는 것은 길잡이의 역할이니까.

나진은 피식 웃었다. 파시온에게 건네받은 로브를 두르고, 얼굴을 가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망가트리는 법은 단순하다.

그 사실을 디에타는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제 발목을 바라봤다. 별장으로 들이자마자 기사들이 자신에게 한 짓을 떠올린 디에타는, 이젠 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별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들은 돌변했으니까.

끼이익, 소리를 내며 별장의 문이 닫힌 순간 기사들은 디에타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무릎 꿇리고, 입에 수건을 물리고선 검기를 뽑아낸 검으로 그녀의 발목을 그었다. 힘줄을 끊어낸 것이다.

포션과 사제만 있다면 얼마든 회복할 수 있는 부상. 하지만, 디에타 혼자의 힘으론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이다. 이 감옥 같은 별장에서 나오기 전까지 디에타는 남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조차 없게 됐다.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아, 하······.”

디에타의 입가가 경련했다.

가면을 덮어쓰고,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무장했다고 생각했거늘 발목이 그어지는 순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었으니까.

그 시점부터 디에타는 깨달아야만 했다.

이곳이 철저하게 자신을 짓밟고, 꺾어버리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새의 날개를 부러트리기 위한 새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곳에서 디에타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욱신거리는 발목 탓에 방해받는 숙면. 뭘 탄지 모를 음식. 시종들의 괴롭힘과 햇빛조차 쐬지 못하게 못 박힌 창문. 아무것도 없는 방은 디에타의 정신을 천천히 좀먹었다.

······사람을 망가트리는 건, 쉬운 일이다.

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 한들 디에타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소녀에 불과하다. 숱한 고문에 대비한 훈련을 거친 기사가 아닐뿐더러, 고통에 대한 내성이 높은 것도 아니다.

작정한다면 망가트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오스만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싶었다. 그녀의 가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쓸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들었다. 새로운 수단을 갈구해야 함을 알고는 있지만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까득.

디에타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독실에서, 그녀는 다만 벗겨지려는 가면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알지 못했다.

별장의 바로 뒷편에 위치한 작은 숲속에서 불길이 피어오름을. 난데없이 발생한 불길을 꺼트리고자 시종들이 뛰쳐나가고 있단 사실을. 그리고, 소란 속에서 움직이는 모험가 하나가 있단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