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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검귀는 엑스칼리버가 있어야만 벨 수 있다.
멀린의 말을 곱씹던 나진이 되물었다.
“혹시 뭐 악마 같은 존재라도 됩니까? 악마는 엑스칼리버로만 완전히 끝낼 수 있다면서요.”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게 아니야. 나락의 검귀에겐 불사성도, 악마와 같은 특징도 없어. 내가 엑스칼리버가 필요하다고 말한 건······.
멀린이 덧붙였다.
-그 녀석도 성검을 들고 있어서야.
“성검이라면······.”
-사용자에 따라 성검이 되기도, 마검이 되기도 하는 검 그람(Gramr). 녀석이 들고 있는 검에 맞부딪치고도 견딜 수 있는 건 엑스칼리버뿐이니까.
요컨대 견딜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단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진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평범한 검이 통하지 않으면 마법이든 화살이든··· 방법은 다양하지 않나? 굳이 검으로 상대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건 네가 그 남자를 몰라서 할 수 있는 소리야.
나진의 속마음을 읽은 멀린이 쓰게 웃었다.
나락의 검귀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다. 아서와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원탁의 기사가 아니었음에도 여정의 끝까지 아서와 함께한 인물이다.
여정의 끝에서 초대 검성이 도달한 종착지.
그 종착지를 떠올린 멀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었으니까.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돌아온 그녀가 화두를 돌렸다.
-나락의 검귀에 대해선 당장은 알 필요 없어. 잊고 있어도 될 문제야.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만나게 될 적이니까.
그건 그거고.
그리 중얼거리며 멀린이 웃었다.
-제대로 된 검술 스승이 생겼네? 이걸로 더 스승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겠어. 검술은 검성에게, 마법은 나한테 배우면 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진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리는 단어가 있었으니까.
“···마법이요?”
-응. 마법.
“저 마법도 쓸 수 있습니까?”
-못 쓸 건 또 뭐야?
“아니 검사는 마법을 못 쓰는 게 상식······.”
-그거야 범부들의 이야기지.
멀린이 히죽였다.
-뭣보다 최소한의 마법은 교양이야. 배워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어? 알아두면 마법사를 상대할 때 편하니까.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이라.
확실히, 아직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턱을 매만지던 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갈 길이 머네요.”
-얘 좀 봐라. 너, 엑스칼리버 뽑은 지 아직 두세 달밖에 안 지난 거 알지?
어이없다는 멀린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나진은 피식 웃었다. 검성과 볼크만은 자리를 뜬 지 오래다. 홀로 남은 나진은 들판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하도시에서 나온 지 기껏 해 봐야 두세 달.
그 두세 달간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나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멎고, 먹구름이 개어 드러나는 푸르른 하늘. 저 하늘이란 걸 한번 봐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저 푸른 하늘이 익숙하다.
하늘 높게 떠오른 태양도.
밤하늘의 별빛도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도시의 거상과 친분을 텄으며, 도시의 정점인 모험가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악마 기사를 쓰러트리며 아탕가의 기사와도 연결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젠 검성에게 검술을 배우게 됐다.
“시간 참 빠르게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지하도시에서 살 땐 상상도 못 했던 일.
그런 일들이 쉬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 새로운 것들 투성이어서 적응하려면 오래 걸리겠구나, 싶다가도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있다.
-어디 시간만 빠르게 지나갈까?
-네 성장 속도도 말도 안 되게 빠른데.
어이없다는 듯한 멀린의 웃음소리.
이젠 익숙해진 그녀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성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곤 하나, 아직 하루를 끝마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슬슬 돌아가선 새로운 의뢰를 찾아봐야겠지.
나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성과의 대련 다음날, 정오.
나진은 광장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광장의 시계탑 아래에 서있자니 나진에게로 시선이 제법 쏠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도첸베르크 삼림 토벌전에서 세운 공부터 시작해서, 이단 승급, 악마 기사 토벌전의 주역 자리까지 꿰찬 나진이다. 이쯤 되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게 이상할 노릇이다.
캄브리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모험가.
온갖 상인과 중소규모 길드에서 영입 1순위로 점찍어 둔, 주가가 급상승하다 못해 지표를 뚫어버리고 있는 슈퍼 루키.
그것이 기회의 도시 캄브리아에서 나진의 현주소였다. 그런 나진이 광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니 시선이 끌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허나, 곁눈질할 뿐 그 누구도 나진에게 쉽게 다가서진 못한다.
···그야, 누가 나진을 점찍어뒀는지 아니까.
때마침 나진이 고개를 돌려 광장의 한구석을 바라봤다. 나진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도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쫓았다. 그곳에는 호위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광장에 발을 디딘 소녀가 있다.
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아르베니아.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연갈색의 머리칼에는 윤기가 흐르고,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비춘 샛노란 눈동자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인력이 있다.
숱한 귀족 영애들이 모인 무도회에서도 단연코 돋보였던 디에타의 외모는, 아르베니아 공작가에서 버려졌다 한들 빛바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걷고 있자니 그 외모가 더 빛나는 느낌이다.
다만, 평소와는 그 복장이 다르다.
디에타 상단의 제복도, 귀족 영애의 화려한 복식도 아닌 편해 보이는 원피스 차림. 어깨에 두른 숄과 햇빛을 가릴 양산 하나만을 쥔 채 외출한 그녀의 모습은 캄브리아의 모험가들에겐 한없이 낯설다.
꼭 편한 친구를 만나는 듯한 복장.
그런 디에타가 걸음을 멈춰 선 곳은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나진의 앞이었다.
“제가 좀 늦었나요?”
“저도 기다린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인들은 혀를 찼다.
아주 자기 꺼라고 침을 발라두는구만. 내가 이런 사복을 입고, 사적으로 만날 만큼 이반이라는 모험가와 친분이 깊다. 디에타의 행동은 상인들의 눈에는 그런 의도쯤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허나, 호위 기사 파시온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가까이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디에타를 보좌해 온 파시온의 눈에, 지금 디에타의 웃음은 다만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친분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 갈까요?”
지금 제 주인은 편하게 웃고 있었다.
몸에는 힘이 살짝 빠져있었으며, 단순한 연기가 아닌 즐거워 보이는 듯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이른 아침부터 거래처와 연락을 하며 인상을 팍 구기고 있다가, 이반과 만날 시간이 되자마자 환히 미소 짓던 제 주인의 모습을 파시온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무척이나 낯선 주인의 모습.
‘도대체 저번 동행에서 무슨 일을 벌였길래···.’
귀족 하나를 개박살 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것 이상의 교류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파시온은 괜스레 나진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에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진과 함께 광장을 거닐었다. 제 주인이 즐거워 보였으므로 파시온도 이내 시선을 거뒀다.
디에타가 저렇게 편하게 미소 짓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후, 차를 홀짝이던 디에타는 문득 제 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나진이 있었다.
이 쓰디쓴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 모습에 디에타는 엷은 웃음을 흘렸다.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디에타가 턱을 괸 채 질문했다.
“달콤한 걸로 다시 시켜드릴까요?”
“됐습니다. 먹다 보니 먹을만하네요.”
“굳이 저 따라 시킬 필요 없었는데.”
“그냥 궁금해서요.”
나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걸 왜 마시나 싶어서. 제가 아는 사람이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그래요?”
“예 뭐··· 이런 사치품을 구하기도 힘든 곳이었는데, 뭐가 좋다고 이 쓰디쓴 걸 갈아마셨는지. 그냥 궁금해서 마셔보고 있습니다.”
함께 시킨 다과를 깨작이며 나진은 그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디에타는 괜스레 찻잔을 매만졌다. 본래도 눈앞의 남자에게 관심이 좀 있었던 디에타이지만, 그건 ‘금화를 삼키는 뱀’으로서의 관심이었다.
돈이 될 것 같은 인간. 친분을 쌓아두면 차후 상단에 이득이 되리라 여겨지는 모험가.
만물을 금화로 치환해서 들여다보는 디에타의 눈동자에, 나진은 아직 캐지 않은 금광이었다. 곡괭이를 들고 몇 번 두들기다 보면 금이 쏟아져나올 노다지. 그렇기에 상인으로서 관심을 가졌으나······.
“이번에 악마 기사를 토벌하셨던데, 그거 이야기 좀 들려주실 수 있어요? 궁금한데.”
지난번 동행 이후.
나진의 앞에서 가면을 벗은 채 마주했던 그날 이후, 디에타는 나진이라는 인간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성격. 습관. 버릇. 행동거지 등등.
그냥, 눈앞의 남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고 디에타는 생각했다. 그게 상인으로서의 욕구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디에타라는 인간이 가진 욕구인지 그녀는 분간하지 못한다.
“아탕가의 기사단을 기다리지 않은 이유 말입니까? 별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냥,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마음에 안 들었다니?”
“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악마 기사, 베른하이겐이 말하는······.”
나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디에타는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미소 지었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얼추 알 것 같았으니까.
‘저번에도 그랬지만······.’
상당히 즉흥적인 사람이다.
계획이 없는 것 같기도 하며, 때로는 일단 지르고 보기도 한다. 뒷일은 나중에 수습해도 되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라는 양.
이번 악마 기사 토벌전도 그렇다.
아탕가의 기사들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과 협공하는 것이 훨씬 승산이 높았을 테지만 홀로 덤빈 이유가 뭐냐. 혹시 공을 독차지하려 그랬나? 그런 질문에 답한 이유가 그냥이랜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이유로 확 질러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시원하다는 생각도, 미련하다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디에타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아하.”
나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에타는 웃었다. 그렇게 웃음 짓다가도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눈앞의 남자의 목표가 무엇인가, 하고. 잠시 찻잔을 매만지던 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예.”
“당신은 목표가 뭐예요?”
“별을 새기는 겁니다.”
던진 목표에 나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하늘에 별을 새기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돌아온 즉답에 디에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별이라면···.”
“성좌들이 가진 별 말입니다. 저 하늘에 별을 새기는 게 제 목표입니다.”
남들 앞에서 입에 담을만한 목표는 아니다.
너무나 거창하고, 허무맹랑한 목표니까.
별을 가진다는 게 무슨 뜻인가. 위업을 이루어 성좌가 되는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이 입에 담을만한 몽상에 가까운 목표였다.
“···진심이세요?”
“예.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진심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남들이 자신을 뭐라 생각하던 알 바 아니라는 양.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그 한마디를 내뱉을 무렵 나진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연이 많아 보이는 웃음. 그 웃음을 디에타가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다.
“그럼 당신은 목표가 뭡니까?”
똑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그 질문에 디에타는 커피를 홀짝이며 답했다. 자신의 목표라 해봐야 단순하지 않은가.
“금화를 모으는 게 목표죠. 상단을 키우고, 더 많은 금화를 끌어모은다. 그게 제 목표예요.”
“금화는 수단이지 않습니까.”
“날카로우시네.”
디에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늘게 뜬 눈동자로 그녀는 찻잔의 바닥에 눌어붙은 커피의 찌꺼기를 바라봤다. 그래, 눈앞의 남자의 말이 맞다. 금화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디에타는 자신의 성을 곱씹었다. 디에타 아르베니아. 아르베니아 공작가. 제 유년기를 보냈던 그 싸늘한 저택을 떠올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제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니까요.”
검사들은 검을 휘두르고 경지에 올라 제 가치를 키운다. 소드 엑스퍼트, 소드 시커··· 경지에 따라 받는 취급도 대우도 달라지는 법이다.
검사뿐만이 아니다.
마법사도, 레인저도,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시켜 가치를 얻는다. 개인이 지닌 무력이라는, 무척이나 직관적인 방법으로 제 가치를 증명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무재(武才)를 타고나진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는가?
누군가에겐 정치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지식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겐 쌓아 올린 권력일 것이다.
그리고 디에타는 안다. 그런 애매한 것들보다 더욱 정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무력 다음으로 직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금화. 돈. 재물. 재화. 이 얼마나 직관적인 가치예요? 그걸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사람의 가치는 올라가는 법이거든요.”
모든 가치의 시작점에 있는 것.
정치를 하려 해도, 지식을 쌓아 올리려 해도, 권력을 손에 쥐려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돈이다. 손에 한가득 움켜쥔 금화를 뿌리면 남은 것들은 알아서 따라오는 법이다.
그렇기에 디에타는 금화를 삼킨다.
삼키고 삼켜서, 제 가치를 불린다. 불리고 또 불려서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존재가 된다. 그게 금화를 삼키는 뱀이 살아가는 목적이다.
“제게 금화는 가치예요. 당신이 별을 새겨 당신의 가치를 올리듯이··· 제게는 별이 금화일 뿐이죠.”
가치를 올린다.
그럴싸한 삶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디에타에겐 그다음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금화를 모으는 것도.
가치를 올리는 것도.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나진은 질문하지 않았다. 더이상의 질문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그녀의 역린과 연관된 이야기인 듯싶었다.
“뭐, 그냥 그런 거예요.”
어깨를 으쓱인 디에타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가 숨을 내뱉기 전 나진은 보았다. 제 목표를 이야기하던 디에타의 눈빛과 숨결에 깃들었던 독기를.
밑바닥을 기어 온 인간들이 으레 가지는 독기.
디에타 역시 그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 독기의 정체까지야 나진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노을이 질 무렵.
디에타는 나진에게 살갑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거리를 벌리고 있던 파시온이 디에타의 곁에 따라붙었다.
“그 청년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럼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재밌는데요? 꼭 소설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아요.”
디에타가 웃음을 흘렸다.
“수틀리면 질러버린다. 과감하게 1등을 노린다. 마음에 안 들면 앞뒤 따지지 않고 덤비고 본다. 시원시원하고, 낭만 있는 사람이에요.”
걸음을 옮기며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닮은 건 아마 유년기뿐인 것 같네요. 완전 반대인 사람이네.”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다른 사람.
유년기는 닮았을지언정, 살아가는 방식은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 나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에타는 왜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느끼는 게 동경일지, 부러움일지, 혹은 단순한 흥미일지 디에타는 구분하지 못했다. 다만 오랜만에 술렁이는 감정이 불쾌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 남자와 만날 때만큼은··· 디에타 아르베니아가 아닌, 그냥 디에타일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민낯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과의 대화가 디에타는 즐거웠다.
그렇게 조금은 들뜬 걸음으로 집무실에 복귀한 디에타는, 식은땀을 흘리는 비서를 마주하게 됐다. 비서는 흔들리는 시선과 함께 디에타에게 편지를 건넸다. 화려한 문양이 각인된 편지지는 척 봐도 고급스럽다.
“······.”
편지지를 받아 든 순간 디에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진과 대화를 나누며 헐거워진 가면이 달칵, 소리를 내며 얼굴에 달라붙었다. 디에타의 눈동자가 한없이 싸늘해졌다.
아르베니아 공작가.
디에타가 도망친 가문에서 날아온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