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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 베른하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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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그를 벤 날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그 며칠간 나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데, 이는 나진 역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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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완수하면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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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중앙 길드에서 보수를 받은 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수련이나 하면 되겠지. 베른하이겐과의 전투에서 얻은 깨달음도 있으니 수련에도 진전이 있을 것이다······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중앙길드로 향한 나진은 마주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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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반기는 것은 무수한 시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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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길드에서 기다리고 있던 귀족의 기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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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간과하고 있던 것은, 이번 의뢰가 귀족들과 엮여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진이 수주한 의뢰는 아탕가의 기사에서 발주한 의뢰뿐이었지만··· 어찌 됐던 악마 기사를 베어낸 것은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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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자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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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즈벨리 가(家)의 기사다. 트리암 자작께서 자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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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이 악마 기사에게 내걸었던 현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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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받게 되는 건 나진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진은 당연하게도 숱한 귀족들과 모험가들의 이목을 끌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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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에 불려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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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의 차후 만남을 약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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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의 초대장을 받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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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귀찮고, 번거롭고, 또 격식을 차려야 하는 일들에 불려다닌 나진은 기가 쫙 빨린 느낌이었다. 그 소동이 일단락된 오늘에서야 여유로운 아침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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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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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바깥에 놓인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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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벤치에 제 등을 기댄 채 나진은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슬슬 쌀쌀해지는 날씨에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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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여유로운 아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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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귀찮을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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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낫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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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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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아르고. 그 기사가 네 의도를 읽어준 덕분에 더 귀찮아지진 않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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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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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공적을 숨기고, 제 힘을 아직 감추고 싶음을 나진은 아르고에게 은근히 피력했었다. 경지가 제법 높아 보였던 그 남자라면 분명 자신의 실력을 얼추 파악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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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는 나진이 힘을 숨기고 있단 사실을 눈감아주었다. 그건 자신이 상관 할 영역이 아니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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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일찍이 나진이 말한 대로 ‘베른하이겐은 그를 추격하던 기사들에게 부상을 입어 약화된 상태였고, 이를 모험가 이반이 마무리 지었다···.’ 같은 식으로 사건을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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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 정도에서 끝나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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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다른 귀족들의 이름이야 별 감흥이 없었지만, 이 편지만큼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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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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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에게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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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 베른하이겐을 추격하던 과정에서 마주했던, 죽어가던 기사인 길버트가 속해있던 가문이었다. 며칠 전 그 가문에서 찾아온 기사에게 나진은 길버트의 유언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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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경께선 마지막까지 기사이고자 했으며, 그분의 도움 덕분에 베른하이겐을 사냥할 수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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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트레바체 가의 기사는 나진에게 감사를 표했고, 주인께 길버트의 유언과 함께 나진의 말을 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렇게 편지 한 장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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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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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고급스러운 편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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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가문의 문양이 각인된 편지를 펼치자, 그곳엔 에델마르 후작의 친서가 적혀있었다. 내용은 길었지만 그 골자는 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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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신세를 졌다. 내 기사의 유언을 전해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언제든 트레바체 가를 방문하거든, 내 그대를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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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마르 후작은 권위를 앞세워 나진을 강제로 초청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가 됐든 한번 찾아와 달라는 초대장을 보냈을 뿐. 나진은 엷은 미소와 함께 편지지를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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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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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기사에 그 주인이란 생각이 들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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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꼭 가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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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나진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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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아침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슬슬 몸이 근질근질했으니까. 요 며칠간 바삐 불려다니느라 제대로 된 단련을 못 해본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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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뚜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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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거칠게 제 몸을 풀며 심호흡을 했다. 가볍게 마나부터 연공 하며 단련을 시작할 심산이었다. 처음 멀린이 이 연공법을 알려줬을 때만 하더라도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젠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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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서 날뛰는 거친 마나가 간지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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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기혈이 죄다 뒤틀리는 고통까지 맛보고 왔는데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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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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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와의 전투에서 나진이 펼쳤던 마나 운용법. 한계를 넘어선 마나를 받아들이는 그 운용법은 기혈이 뒤틀리고, 몸 내부가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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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통을 맨정신으로 견뎌내며, 전투마저 속행한 나진이다. 그 가공할만한 정신력에는 멀린 역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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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뭔가 감을 잡은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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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연공 하는 나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그 사실을 눈치챈 멀린이 던진 질문에, 나진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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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검기에 심상을 담는다는 게, 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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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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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좀 알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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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뽑아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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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는 것은 기사의 검. 그러자 백금색의 입자가 완전히 배제된, 순백의 검기가 나진의 검을 휘감았다. 검기의 편린이 아닌 완성된 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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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온전한 검기를 뽑아내면 백금색의 검기가 드러나기에, 검기를 제한해 다루던 나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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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아니다. 백금색의 검기와 순백의 검기. 두 개의 검기를 구분해 다룰 수 있었으니까. 이젠 마음 놓고 검기를 좍좍 뽑아대도 된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에 나진은 만족스레 검기를 이리저리 흔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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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색의 검기는 별을 떠올리며 뽑아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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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순백의 검기는 기사를 떠올리며 뽑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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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에 심상을 담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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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검기의 형태도 변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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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참 새삼스러워서 놀랍지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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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를 구분해 사용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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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에 따라 검기의 색을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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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당연하게도, 그건 소드 엑스퍼트급의 무인이 부릴만한 묘기는 아니었다. 소드 시커급의 무인은 되어야 시도해볼 만한 일이며 그들에게조차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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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를 구분해 다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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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심상을 투영하는 것도 어려우며, 그 심상을 맺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 심상을 두 개씩이나, 그것도 구분해서 다루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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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일을 쉽게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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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멀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나진이 이리저리 휘두르는 순백의 검기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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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 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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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진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두르며 단련을 하고 있을 무렵이다. 누군가 휙, 하고 담을 넘어 나진이 검을 휘두르는 숙소 앞 훈련장에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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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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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에 발을 디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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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그 인물을 확인한 순간 나진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혀 의외의 손님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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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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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애송아.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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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용병단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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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정점, 로젤린 아스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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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떨리는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도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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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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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잰걸음으로 나진에게 다가와 콱, 하고 나진의 양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상황에는 나진마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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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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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널 찾아온 손님이 있어. 빨리 가봐야 해. 지금 내 용병단에 앉아계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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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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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나진의 어깨를 꽉 움켜쥔 채 말을 쏟아냈다. 제발 나 좀 살려주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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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분께서 널 찾으셔··· 빨리, 빨리 나랑 같이 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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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애원하는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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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로젤린이 한숨 돌렸다는 듯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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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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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나진의 손을 붙잡은 채 숙소의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그녀에게 끌려가며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 이 도시의 정점이라 불리는 붉은 눈 로젤린 아스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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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에 오른 실력자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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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귀족 작위를 가지고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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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용병단이란 무력단체의 수장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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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조차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로젤린을 이토록 겁에 질리게 만드는 존재가 누구란 말인가. 하물며 그 존재가 누구길래 자신을 찾고 있단 말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진이 결국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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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님분이 대체 누구시길래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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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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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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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하고 고개를 돌려 나진과 시선을 마주한 채 그녀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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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론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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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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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 카론 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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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검성, 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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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별을 지닌 소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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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劍)이란 무구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 너를 찾고 있노라고 로젤린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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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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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부터 몇 시간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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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체아 상단이 주로 사용하는 상로(商路)가 마물들에 점거당했단 소식을 듣고, 로젤린은 곧장 용병단을 움직여 그 장소로 향했다. 가르체아 상단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이 정도 일은 해줘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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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그녀가 마주한 것은, 산사태라도 난 듯 무너진 잔해에 깔린 길과··· 그 길목 주변을 점거하고 있는 마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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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길목 치우는 건 좀 걸리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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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을 처리하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무너진 길을 복구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얼추 견적을 잡은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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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막힌 길목의 앞에 마차를 세워둔 채 한숨을 내쉬고 있는 가르체아 상단의 상인들이 있다. 장삿길에 올랐다가 복귀하는듯한 모양새. 그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전해주고자 로젤린이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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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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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문득 특이한 복장의 인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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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사제복 차림의 사내 둘. 복식을 보아하니 검의 교단의 사제들 인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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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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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 측에 생필품을 팔고 오는 길인데, 사제 두 분이 캄브리아에 들를 일이 있다 하여 동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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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은 그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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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하고 로젤린이 그들을 지나치려던 무렵이다. 소름 끼치는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듯한 시선. 로젤린이 휙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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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검의 사제 둘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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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사내 하나와, 로브로 얼굴을 깊게 눌러쓰고 있는 연령 불명의 사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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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느껴진 것은 로브를 눌러쓰고 있는 사제에게서였다. 그의 시선은 로젤린이 등허리에 차고 있는 걸작, 메아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썩 달갑지는 않았기에 로젤린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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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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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를 눌러쓰고 있던 사내가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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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게 됐군. 신기한 형태의 검이기에 흥미가 좀 동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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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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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상단이 고용한 용병인가? 듣기론 길이 막혀 마차가 가질 못하고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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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그렇죠. 좀 걸릴 테니 사제분들께선 느긋하게 쉬고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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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걸린다라.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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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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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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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제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일단 로젤린은 답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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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반나절쯤 걸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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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곤란하군. 음, 안 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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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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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바빠서. 실례 좀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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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로젤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로젤린이 되물으려는 순간이다. 사제가 허리춤에서 검을 캉, 하고 뽑아들었다. 발검(拔劍)하는 자세는 너무나도 매끄러웠으며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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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검의 교단의 사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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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제법 잘 잡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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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로젤린이 생각했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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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의 눈이 부릅 뜨였다. 조금 전까진 느껴지지 않던 기척이, 저 사제가 검을 뽑은 순간 일대를 찍어눌렀기 때문이다. 용병들이 모두 걸음을 멈췄다. 떠들던 상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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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공간이 통째로 붙들린듯한 기이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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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각 속에서 사제는 홀로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멈춰선 용병들을 가로질러 선두에 섰다. 잔해가 쌓인 길목과, 그 잔해 위에 서 있는 마물들. 충분히 접근했음에도 마물들은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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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빡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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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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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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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선 것들 사이에서 사제는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과 납검(納劍)하는 동작은 구분되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했을 때, 사제의 검은 어느새 검집에 돌아와 있었다. 직후 일대를 찍어누르던 기세와 압박감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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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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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온 것은 고요한 절삭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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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절삭음뿐이었다. 마물들이 쪼개지는 소리도,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도, 흙더미가 박살 나는 소리도···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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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의 절삭음 이후엔 결과만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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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을 가로막던 흙더미와 잔해도, 그 위를 점거하고 있던 마물들도, 그 모든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마법을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뜬 상인들이 경악하고 용병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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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그 누구도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사제가 검을 한번 휘둘렀고, 길목을 가로막던 잔해와 마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결과만을 인지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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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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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로젤린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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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시커의 경지에 오른 로젤린만이, 방금 일어난 일을 편린이나마 이해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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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검을 휘두른 순간 로젤린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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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섬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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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검기라기보단 차라리 거대한 빛 무리에 가까웠다. 인간의 몸으론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출력의 검기. 검이 휘둘러진 순간, 검기는 단두대처럼 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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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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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기에 닿은 것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흩날리는 아주 가는 입자만이 마물과 흙더미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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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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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좋은 로젤린조차도, 잠깐의 섬광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을 인지했을 뿐이다. 그 사실에 로젤린은 섬뜩함을 느꼈다. 뒤늦게 로젤린은 로브를 눌러쓴 사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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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로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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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 사이로 보이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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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을 로젤린 아스칼로는 알고 있었다. 로젤린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제 앞에 서 있는 인물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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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의 교단의 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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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란 무구의 정점에 오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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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마스터, 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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