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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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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내부서도 강자로 손꼽히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기로 이름난 기사.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르고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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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만큼 황당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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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 베른하이겐이 권능을 사용한 순간 아르고는 적잖게 당황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마기(魔氣)였고, 처음 마주하는 종류의 권능이었으니까.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결계를 만들어내는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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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기까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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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문 아르고는 곧장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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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교전 중이던 청년이 위험하다. 방금까지 호각을 이루고 있었으나, 결계의 안쪽에서마저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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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를 부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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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권능을 파훼하고 공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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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는 기사의 관리와, 악마의 토벌을 주로 행하는 집단이었기에 악마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았다. 그럼에도 결계의 해석과 파훼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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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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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순간 결계가 약화됐고, 그 틈을 깨부수고 그들은 결계의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로 진입하면서도 아르고는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면 그 청년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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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르고는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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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보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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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보호하고 악마기사를 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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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이미 명을 달리했다면, 그 시체라도 훼손되지 않게끔 보호하라고. 그런 생각으로 아르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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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을 갖춰 베른하이겐을···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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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에 진입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악마 기사가 아니었고, 청년의 시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을 반기는 것은 반으로 양단된 악마 기사 베른하이겐의 시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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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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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크게 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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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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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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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완전히 박살 난 결계와 함께 햇살이 내리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양단된 채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베른하이겐의 시체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히 서 있는 나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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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상이 빗나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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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마저 평정을 유지한 채 냉정한 판단을 내리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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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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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제아무리 아르고라 한들 무리한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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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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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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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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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결계를 부수고 들어온 이들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자루를 향해 손을 얹었으나, 나진은 이내 경계심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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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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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과 그 위에 그려진 방패의 문양. 그 문양을 나진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였고, 바깥에 나왔을 때 서적을 통해 찾아본 문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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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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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옛 계율을 수호하는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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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반이 속해있던 기사단. 눈을 크게 뜬 채 나진은 기사들을 바라봤다. 그들 역시 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시선에 담긴 뜻은 다르겠지만 어찌 됐든 기사들과 나진은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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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움직인 것은 나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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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를 뽑으려던 손을 내리고, 그들을 향해 나진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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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아탕가의 기사단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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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아르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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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선두에 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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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임무의 책임자인 아르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나진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양단된 베른하이겐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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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처단하기 위해 파견된 추격대의 지휘권자이지. 더는 추격할 필요가 없어 보이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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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함을 느끼며 아르고가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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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앞에 서 있는 나진을 흘겨봤다. 잘 쳐줘 봐야 약관의 나이인 청년이다. 고작 저 나이에 저만한 경지를 이루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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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보였던 검기의 출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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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잇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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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청년에겐 정말 실례되는 일이지만, 비정상적인 성취를 이룬 이는 악마와 연관되었을 확률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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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는 소드 시커에 오른 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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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동자는 상대의 체내에 흐르는 마나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다. 마기에 오염돼 응어리진 덩어리가 아닌, 마나 자체에 탁기(濁氣)가 섞여 있다면 악마와의 관계를 의심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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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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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하기 짝이 없는 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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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탁기도 섞여 있지 않으며, 산골 깊은 곳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맑기까지 했다. 결코 악마와 연관된 이는 아니란 뜻이었다. 하물며 마기에 오염된 흔적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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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군.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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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내심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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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정순한 마나는 처음이었다. 응어리진 마기 역시 없는 걸 보아하니, 마기 자체에 저항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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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많았지만, 우선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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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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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들고 있던 검을 칼집에 밀어 넣은 그가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캉, 하고 후려쳤다. 갑옷에 새겨진 아탕가의 문양을 주먹으로 두들기며 아르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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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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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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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름 아닌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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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를 대신하여, 기사의 이름을 더럽힌 이를 벌한 그대에게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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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캉,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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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에 서 있는 아탕가의 기사들이 나진을 향해 경례를 올린 것이다. 갑옷과 건틀릿이 마찰하며 울려 퍼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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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경례를 받으며 나진은 왠지 모르게 심장이 크게 뜀을 느꼈다. 동화 속에서, 스승의 이야기를 통해 엿들었던 이 시대의 기사들이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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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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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프지만, 나진 역시 경례를 올렸다. 나진이 경례를 마치자 아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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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상황의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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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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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길게 숨을 내뱉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미리 정해놨으니까. 이야기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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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이겐을 추격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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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 과정에서, 일찍이 베른하이겐과 조우했던 기사와 마주쳤고··· 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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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가(家)의 기사,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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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추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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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기사들과 교전에서 베른하이겐은 지쳐 있었고,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점을 공략해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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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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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모든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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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자신의 정체를 완전히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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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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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 들은 아르고가 이야기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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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상을 입은 베른하이겐을 추격해, 이 자리에서 그대가 꺾어냈다. 그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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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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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의 내부에서도 그 약점을 공략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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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깨에 난 상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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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양단된 베른하이겐의 시체를 가리켰다. 확실히 그 어깨에는 흉터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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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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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는 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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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긴 하지만,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아르고는 보았었다. 결계가 씌워지기 전까지 나진이 보여줬던 압도적인 출력의 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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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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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캐물을 명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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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힘을 숨기고 있다 하여 자신이 그것을 파헤칠 자격도, 나무랄 자격도 없었으니까. 눈앞의 청년이 악마와 관계가 있거나 사악한 수를 숨기고 있다면 캐묻는 것이 맞을 테지만··· 딱히 그래 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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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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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청년에게 아르고가 물어야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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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질문해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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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말했고, 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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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는 나진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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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베른하이겐을 베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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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대답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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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답해도, 포상금을 받기 위해서라고 답해도, 그 무엇이라 답해도 좋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아르고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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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그대가 내 물음에 어떤 답을 들려주던, 그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을 맹세하지. 이는 단지 순수한 의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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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가 입에 담는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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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무게감을 나진은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해선 숨김없이 답해도 좋으리라. 나진이 천천히 입을 열어 발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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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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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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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이겐과의 교전 중에,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에게 있어 기사란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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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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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이겐은 답했습니다. 기사란, 출세를 위한 자리일 뿐이라고. 명예와 긍지란, 버림으로써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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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입을 통해 발음된 베른하이겐이 가진 기사의 가치관. 그 가치관에 아르고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아탕가의 기사들이 혀를 차고 표정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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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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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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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기사는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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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생각하는 기사는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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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질문만을 던지겠다고 이야기했으나, 아르고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악마 기사를 베어낸 청년이 생각하는 기사란 무엇인지, 그 대답을 듣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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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님들께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사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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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기사가 아닌 자가 기사를 논함은 우스운 일이지만, 그대는 예외다. 그 이유야 무엇이던 악마 기사를 베어냄으로써 그대는 자격을 증명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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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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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사의 계율을 수호하고, 다만 기사다울 것을 맹세한 아탕가의 기사들. 그들 모두가 나진을 바라봤다. 그 입에서 나올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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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진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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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를 잃지 않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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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와의 결투 중 얻어낸 ‘기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나진은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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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지 않은 것을 지키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발버둥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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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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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중의 기사인 아탕가의 기사들 앞에서 나진은 그 답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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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을 향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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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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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와 명예를 품은 채, 드높은 하늘의 별을 쫓는 이. 그게 제가 생각하는 기사입니다. 아니, 제가 되고자 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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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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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아르고의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탕가의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 웃지 않았을 뿐이지 아르고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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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진을 향한 비웃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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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비웃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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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신호에 기사들은 웃음을 멈췄다. 그들은 가만히 나진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으며, 나진을 향한 시선 역시 호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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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대표하여 아르고는 나진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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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하나 없는 진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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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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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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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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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이의 눈동자가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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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떨어졌다 한들, 명예를 잃었다 한들, 그리하여 추락하였다 한들, 그것들을 되찾고자 발버둥친다라··· 누군가는 추하다고 비웃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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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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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기사이고자 한다는 뜻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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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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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느 기사의 모습을 그리며 그 말을 입에 담은 듯하군. 그대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과연 본받을만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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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가 말하는 본받을만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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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속이 술렁임을 느꼈다. 나진은 이 이야기를 이반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이 자리에 이반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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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를 품은 채 별을 쫓는다. 좋은 울림이야. 이거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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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투구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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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를 벗어 나진을 마주한 채, 그가 제 뒷목을 긁적였다. 투구 속에서 드러난 것은 젊은 청년의 얼굴이다. 소드 시커에게 신체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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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질문한다면서, 자꾸만 질문하게 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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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을 마주한 채 아르고가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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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름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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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의뢰서에 적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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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앞의 청년의 입을 통해 그 이름을 직접 듣고 싶었다. 그 물음에 나진은 잠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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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다만 모두 진실된 것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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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끝에 나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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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름은 말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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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말한다면 거짓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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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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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돌려서 말했고, 그 말을 아르고는 알아들었다. 더는 아르고는 나진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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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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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제 갑주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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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기사가 된 이후에 듣도록 하지. 명예와 긍지를 갖춘 기사가 되었을 때, 그때는 내게 이름을 들려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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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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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는 씨익, 입꼬리를 틀어올린 채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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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지않아 그날이 찾아오기를 기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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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보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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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우리가 정리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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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은 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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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숙인 뒤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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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나진이 무엇을 덧붙였는지 아르고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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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는, 당신과 같은 기사로서 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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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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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진이 떠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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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탕가의 기사들은 악마 기사의 시체를 처리하고, 그가 강탈했을 유물을 회수한 뒤··· 그에게 죽임당한 기사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각 가문에 전해질 비보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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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르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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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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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고의 종자가, 아르고에게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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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더 질문하지 않으셨습니까? 숨기고 있는 게 많은듯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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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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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은 있으나, 나이가 어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은 아이였다. 소녀의 질문에 아르고는 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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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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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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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너는 내 종자이고, 내게는 제자인 네 물음에 답할 의무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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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고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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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청년의 의도가 순수했기 때문이다. 순수했으므로, 그 말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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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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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 그 청년은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기보단 오히려 축소하고자 했다. 일찍이 기사들이 입힌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사가 준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운이 좋았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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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을 바랐다면. 혹은 명성을 바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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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공을 부풀리고, 기사들을 언급하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그 청년은 구태여 앞서 죽임당한 기사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공적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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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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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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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이 진실이란 뜻은 아니었다. 저 정도 되는 권능을 부리는 악마와 계약한 존재다. 그 부상이 도움됐을지언정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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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인즉슨, 그 청년은 온전한 상태의 베른하이겐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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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제 공적을 깎아내고, 제 무력을 숨기고 싶어했기에 더이상 캐묻지 않았을 뿐이다. 캐물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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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답지 않은 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그 청년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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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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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베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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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대답이었고, 진심이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한 대답이었다. 아르고는 미소 지었다. 경지도, 악마를 벤 수단도, 그 모든 게 수수께끼인 청년이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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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입에 담은 기사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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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되고자 하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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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탕가의 기사인 아르고에겐,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들이었으니까. 그 대답을 들었으니 아르고는 그걸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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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가 논하던 기사다움을 잊지 말거라. 플랑슈. 새겨두고 곱씹을만한 이야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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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르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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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의 종자, 플랑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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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리로 돌아가 시체의 수습을 돕는 소녀를 흘겨보던 아르고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조금 전 마주했던 청년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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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단에 입단시키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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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때가 아님을 아르고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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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아르고는 직감했다. 언젠가 반드시, 그자는 제 발로 아탕가의 기사단을 찾아올 것임을. 설령 기사단에 속하진 않더라도 뜻을 함께할 동료가 되리라 아르고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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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를 품은 채 별을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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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드높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내 별을 걸어놓는다. 이 얼마나 멋있는 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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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내라면, 기사를 자처한다면 꿈은 크게 꿔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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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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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말을 듣다 보니 자신의 동기이자 아탕가의 유망주였던 어느 기사가 떠오른 까닭이다. 아직도 지상(地上)에 있었다면 분명 소드 시커가 되었을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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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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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가 오랜 친우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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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제자를 기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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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의 손에 들린 것은 의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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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뢰를 수주했던 청년의 이름은 이반. 흔한 이름이지만, 그것이 다만 우연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르고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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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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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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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발버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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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입에 담았던 기사다움. 분명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에 담았을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존재가 누구인지 아르고는 알아차렸다. 동시에, 자신의 오랜 친우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기사임을 포기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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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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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며 아르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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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이 이야기는 속으로만 품어야 할 것이다. 전(前) 아탕가의 기사인 이반은 엄연한 죄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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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연으로 저 청년이 이반과 마주할 수 있었는지, 이반과 무슨 관계였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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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저자의 이름과 함께 들어봐야겠지. 그날이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며 아르고는 제 칼자루를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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