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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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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악마들이 이 대륙의 절반을 검게 물들이고 활개를 치던 시기를 경험한 어느 마법사는 악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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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쳐 죽여야 할 존재지. 아, 불로 태워죽이는 게 좋아. 그게 깔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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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쳐 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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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실제로 기사의 계율, 제국 법, 성교회의 교리의 가장 최상단에 적혀있는 문장이기도 했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악마는 인간의 주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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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악마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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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으면 이름에 악(惡)하고 마(魔)가 들어가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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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검게 물들였던 수많은 악마들을 쓸어 넘기며 인간의 시대를 열었던 영웅, 아서. 그런 아서의 곁에서 숱한 악마들을 태워죽인 멀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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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워죽인 악마만 해도 다섯 자리가 넘어가는데, 그놈들 중에 말이 통하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놈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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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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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푼 자비를 배신으로 화답하는 놈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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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이었고 경험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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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악마가 사이한 것들이라는 사실에야 의심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악마의 상대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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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 베른하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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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추격하기에 앞서 나진은 준비를 단단히 마칠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 그런 상대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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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에서 찾은 정보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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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그리고 멀린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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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총합해 나진은 필요한 것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교단의 축복이 깃든 성수, 은으로 만들어진 비수, 해독약과 마기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줄 만한 물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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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목록은 다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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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물건들을 구하기만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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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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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의 귓가에 멀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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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여기 있겠어? 교단에 찾아가야 내줄 것들인데. 아무 데서나 못 구해. 그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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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 역시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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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리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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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심드렁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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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넌 이런 거 필요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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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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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성가신 게 뭐겠어? 그건 바로 마기(魔氣)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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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혹은 악마와 관련된 것들이 내뿜는 악한 기운. 그것은 주변의 공기와 마나를 오염시키고 더 나아가 환경마저 검게 물들인다. 마기는 평범한 생명체에게 있어선 극독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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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물론이고 무인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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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마기에 완전히 저항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소드마스터 급이나 돼야 가능한 이야기다. 마기는 계속해서 체내에 쌓여 몸과 영혼을 검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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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티도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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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속 쌓이다가 임계점을 넣으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리고 말지. 교회에서 주기적으로 세례라도 받지 않는 한 마기에 저항할 방법은 없어. 그마저도 완벽하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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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인간과 악마가 공존할 수 없는 이유였으며, 제국이 악마에 학을 떠는 이유기도 했다. 다만 멀린의 이야기를 듣던 나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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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지면 여기 적힌 물건들이 더 필요한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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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좀 봐라. 너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뭔지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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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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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축복이니, 성수니, 은제 무기니 하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너는 가지고 있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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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는 소유자에게 정화와 회복의 축복을 내려. 취기에조차 반응할 만큼 민감한 축복이··· 마기에 반응 안 할 리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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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하고 나진이 중얼거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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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그 설마가 설마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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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마기에 완전히 면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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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가 엑스칼리버를 지니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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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악마에게 있어선 천적과도 같은 존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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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진은 당장 멀린이 한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진 못했다. 확실히, 동화 속 아서왕이 악마를 여럿 쳐 죽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아서왕이 뛰어나서 그런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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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의 독백에 멀린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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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 소년은 ‘엑스칼리버’란 무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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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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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직전의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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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추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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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서에 예상 경로가 어느 정도 그려져 있긴 했지만, 정말 대략적인 경로뿐이어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방향만을 어렴풋이 정해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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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진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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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쫓던 나진은 갑작스레 속이 술렁임을 느꼈다. 심장이 크게 뛰고, 날카로운 직감이 몸을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사이한 기운에 반응하듯이.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본능적으로 걸음을 향한 곳에는 악마 기사의 흔적이 찍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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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된다는 건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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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그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멀린이 나진의 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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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곧 엑스칼리버의 검집이 된다는 것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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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와 동화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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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질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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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그렇게 말하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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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것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도 그 영향이지. 아직은 미약하긴 하지만··· 이렇게 기운을 대놓고 뿌리고 다니는 놈 하나 추격하는 건 쉬운 일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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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언제나처럼 네 감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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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그렇게 말했고, 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숨을 내뱉은 나진이 흔적이 이어진 곳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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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 전의 숲을 나진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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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바람은 싸늘했고, 코끝을 간질이는 공기에는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악취. 이 악취는 그가 잘 아는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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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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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달리던 나진의 걸음이 느려졌다. 여전히 해가 뜨지 않아 숲 안은 어둑어둑 했지만, 밤 시야에 익숙한 나진의 눈동자는 숲의 정경이 훤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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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째 뽑힌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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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고 부러진 가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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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튀어있는 핏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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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을 따라 걷다 보면, 보이고 마는 것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가. 느려지던 나진의 걸음이 이내 멈췄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사이로 나진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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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터져 죽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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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다리가 뽑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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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구멍이 뚫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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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기사, 그리고 기사. 강자라 불릴만한 존재들의 시체가 숲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시체를 파먹던 마물들을 나진은 검을 휘둘러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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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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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한 채 나진은 시체 사이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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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검과 핏물들. 주인을 잃은 투구와 우그러진 갑주. 비참하기 짝이 없는 꼴로 죽음을 맞이한 시체들을 지나쳐 걷다 보면··· 숨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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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내쉬는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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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꺼질듯한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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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칠갑을 한 소나무들을 지나친 나진은 이내 숨소리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그곳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복부를 움켜쥐고 있는 기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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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후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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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봐도 치명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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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그의 주변에는 검붉은 핏물이 고여있었으며 그 안색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나진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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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다. 허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지 큭, 하고 그가 피거품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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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없이 무릎을 굽혀 기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아도 되게끔. 그렇게 눈높이를 맞춘 채 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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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히십시오. 가까운 교회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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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은 고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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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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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하지.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치료를 받는다고 살 수 있을만한 상태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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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복부를 누르고 있던 손을 그가 살짝 때 보였다. 크게 뚫린 구멍과, 마기로 하여금 썩어 문드러진 살갗. 이미 회복하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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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이겐 그 빌어먹을 놈. 옛 동료였는데 정도 없더군. 고통스럽게 죽으라며 배에 구멍 하나 뻥 뚫어놓고 가던데, 어찌나 얄밉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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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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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듯한 태도를 가장하나 창백한 안색과, 이마에 맺힌 식은땀 탓에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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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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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숨을 고르며 나진의 행색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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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용병이나 모험가처럼 보였는데, 그 장비가 좋은 거로 보아하니 캄브리아에서도 제법 유명한 모험가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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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의뢰를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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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서 아탕가 기사단의 의뢰서를 꺼내 기사의 눈앞에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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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아탕가의 의뢰를 받았나. 명예를 아는 놈이로군. 그 용기와 기개는 높게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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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기사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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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상대할 만한 놈은 아니다. 놈의 수준이 잘못 측정됐음을 알려라. 최소 중위 이상의 악마와 계약한 게 분명하며··· 악마화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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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보가 잘못되었음을 경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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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거리를 두고 추격하며 아탕가 기사단에 주기적으로 서신을 보내라. 그게 최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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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뒤따르는 추격자에게 전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려 동이 트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 손끝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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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저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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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가져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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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린 기사는 나진에게 무언갈 건넸다. 아마도, 아탕가와 연락을 취할 수단이리라. 나진은 말없이 기사가 건네는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제야 기사는 어깨에 힘을 풀고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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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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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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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실 말은, 더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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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해지는 기사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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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눈치챈 나진은 질문했다. 그 질문에 기사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눈치는 좋은 애송이로군. 그리 중얼거리며 기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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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체 가문의 기사,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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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 복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언제 올지 모를 자신과 같은 추격자에게 정보를 넘기기 위해, 고통 속에서 견디고 있던 길버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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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에 살갗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은 범인(凡人)이 견딜만한 것은 못 된다. 기사로서 정신 수양을 했다곤 하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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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품에 가진 단검으로 진작 제 목덜미를 그어버리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버트는 마지막까지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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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를 추격자에게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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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죽은 제 동료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견뎌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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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께 낭보를 전해드리지 못할지언정, 비보를 전하게 될 불충에 죄송스러울 따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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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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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군께 안부를 전해주게. 가능하다면, 마지막까지 긍지 높은 기사였음을 첨언해 주면 좋고. 그리하면 내 이름값도 좀 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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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없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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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대며 길버트가 웃었다. 마지막으로 커흑, 하는 소리와 함께 길버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짧은 경련을 끝으로 길버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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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긍지 높은 기사로서 살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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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만큼은 기사로서 죽기를 선택한 이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나진은 말없이 손을 뻗어, 뜨고 있는 길버트의 눈을 감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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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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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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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길버트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여명의 끝을 알리듯 동이 트고 있었다. 숲속에 드리우는 빛을 바라보며 나진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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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로서 죽음을 맞이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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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로서 살아가는 이들은 많지만, 마지막의 순간까지 기사이고자 하는 이는 보기 드문 편이다. 궁지에 몰렸을 때마저 사람이 명예롭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 하물며 기사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진 시대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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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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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을 배신하고 금전을 쫓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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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힘에 취한 칼잡이에 불과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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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도, 긍지도 없는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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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사들이 숱한 시대다. 명예나 긍지와 같은 애매모호한 것들보단, 권력과 금전 같은 확실한 것을 목표로 삼는 기사들이 태반인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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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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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생각했고 멀린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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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기사들이 빛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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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는 것이 없음에도 기사이고자 하는 이들. 삶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기사이고자 하는 이들. 그런 이를 나진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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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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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서서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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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시작점에 별을 쫓는 기사 이반이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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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기사의 모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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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제 은인의 모습을 엿보았다. 여전히 명예니 긍지니 하는 것들을 나진은 잘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존중받아 마땅하단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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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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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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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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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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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콱, 하고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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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계획은 거리를 두고 악마 기사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아탕가의 기사단이 올 때쯤 하여 악마 기사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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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겐 과분한 강자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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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 이유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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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전투 경험을 쌓을 상대로 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볍게 다가서선 안 될 일임을 깨달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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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제가 잡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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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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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뱉는 선언은 오만함에 젖은 천재가 내뱉는 포부가 아니다. 반드시 그리하겠다는 각오가 서린, 일종의 집념마저 느껴지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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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명예와 긍지가 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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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 그것을 품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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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기사를 동경한다. 처음으로 보았던 기사가 소년에게 꿈을 심어놓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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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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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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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느 외눈의 기사가 보인 긍지를 잊지 않는다. 외눈의 기사가 마지막까지 바랐던 명예를 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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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소년이 처음으로 본 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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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를 외치던 이반의 눈동자는, 그 무엇보다도 빛나던 별이었다. 그 별빛을 나진은 이해하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허울뿐인 가치에 이반이 목숨을 걸었는지 나진은 알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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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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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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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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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악마 기사란 놈과, 전력을 다해 부딪치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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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고자 하는 기사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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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긍지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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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그 모두를 버린 자와 마주한다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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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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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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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리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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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그렇게 질문했다. 그 질문에 멀린은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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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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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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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당장 안 달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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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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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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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이 이어진 곳을 따라 나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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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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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 베른하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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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들려온 인기척에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인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기척을 숨기고 기습하는 것도 아니라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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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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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베른하이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 기사는 없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빛나는 갑주가 아닌, 마물의 가죽을 엮어 만든 듯한 복장을 입은 청년이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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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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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 인근을 지나치니, 아마 도시에 의뢰라도 내건 모양이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베른하이겐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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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용병 나부랭이가 끼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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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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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베른하이겐의 말을 끊었다. 캉, 소리를 내며 검을 뽑아 든 그가 베른하이겐을 겨누었다. 칼끝을 겨눈 채 그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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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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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결투에 앞서 상대의 이름을 묻는듯한 행위에, 베른하이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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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이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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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사는 제 이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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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에게 검을 겨눈 청년 역시 자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리라. 곧이어 청년의 입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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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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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을 통해 발음 되는 것은, 거짓된 신분이 아닌 진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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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탕가의 기사, 이반의 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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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검에서 검기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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