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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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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일부러 갈아입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우편부의 복장을 그대로 입은 채 나는 거리를 걸었다. 가게의 문을 열시간이 되었는지 하나둘 상인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탁.

나는 그들 사이를 말없이 걸었다.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움찔, 어깨를 떨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나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야 내가 이반의 사냥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이반의 보호를 받는 이 거리에서, 이반은 울타리인 동시에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그가 정한 규칙을 지키는 이들을 이반은 보호하고 자비를 베푼다. 하지만 선을 넘는다면 조금의 자비도 배풀지 않고 철저하게 응징했다. 그 사실을 이반은 자신의 자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종종 경고하곤 했다.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선을 넘지 말라고.

오늘 트릭시의 주점을 개판으로 만든 것도, 내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피범벅이 된 채로 거리를 걷는 것도 그 경고의 연장선상이었다. 이반은 내게 그렇게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요즘 느슨해졌단 말이지.」

「하나둘 선을 넘으려는 기미가 보여.」

「트릭시 정리하는 김에 적당히 겁주고 와라, 나진.」

나는 그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히익···.”

거리를 걷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상인 하나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평소 트릭시와 어울려 지내며 이반이 그어둔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던 상인이었다.

“······.”

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남자의 시선은 피가 진득하게 눌어붙은 내 옷자락을, 뒤이어 내 허리춤에 걸려있는 칼자루로 향했다.

탁.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그의 곁을 나는 말없이 지나쳤다. 아직은 저 남자를 처리하라는 이반의 명령은 없었으니까. 부디 이게 제대로 된 경고가 됐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발 좀.

선 좀 넘지 말아라.

이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지 말아라. 당신들이 그럴수록 내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칼질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다.

질척하고, 끈적하고, 불쾌하다.

도덕적인 죄책감과는 다르다. 그냥, 기분이 좆같았다. 특히나 죽은 사람의 유족과 마주칠 때마다 껄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내가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한 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이 지하도시에서 가장 좋은 것들만을 끌어모아 만든 번화가가 있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광석등.

광석을 제련해 만들어 낸 사치품.

윗동네의 물건과 음식, 그리고 옷감들.

저 윗동네에 이곳에서 캔 광석을 올려보내고, 물건을 지급받는 일종의 창구이자··· 윗동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가 존재 하는 지하도시 아트만의 중심.

탁.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구획의 지배자, 외눈의 이반. 나의 고용주가 거하는 건물이었다.

외눈의 이반.

그는 지하도시 아트만에 떨어지기 전에 기사였고 소드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던 검사였다. 결국 영락한 나머지 이 도시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검기를 좍좍 뽑아내는 강자였다.

기사쯤 되는 강자면 어디에 떨어지던 두각을 드러내는 법이다. 이반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지하도시를 주름잡았다.

이반은 본래 번화가의 주인이었던 땅거미 호르세를 도시의 외곽으로 밀어내고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짓밟으며 그는 세력을 키워나갔다. 길고 긴 내전의 시작이었다.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지만···.

오래전 내전은 끝이 났으며, 그 결과는 이반의 승리라는 사실만큼은 알았다.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반은 이 도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내 스승이자 고용주이기도 했고.

부모가 버린 날 거두어 주고, 내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준 게 바로 이반이었으니까. 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반, 안에 있어요?”

똑똑, 내가 이반의 방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안에서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이반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오른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쩍 벌어진 어깨. 팔뚝에 가득한 흉터.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문드문 보여오는 새하얀 머리칼.

이 집무실의 주인, 이반이었다. 이반은 팔짱을 낀채 하나 남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사람 하나는 찢어 죽이고도 남을 것 같은 살벌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내 얼굴로 향한 순간이다.

“뭐야, 나진 너였냐!”

이반의 표정이 확 풀렸다.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반이 쾅, 하고 테이블을 거칠게 두들겼다.

“난 또 땅거미 새끼가 살수라도 보낸 줄 알았네. 무슨 피를 그렇게 뒤집어쓰고 있어? 밑층에 있던 놈들 모가지 다 따고 올라온 줄 알고 긴장했잖냐.”

“전혀 긴장한 눈치가 아니던데요?”

“야 임마, 여기 안 보여? 땀 흘리는 거?”

이반이 제 목덜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 소리쳐 봐야 자잘한 흉터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편부의 코트와 모자를 벗어 내려놨다.

“이반이 겁 좀 주고 오라 했잖아요.”

“내가 그랬었냐?”

“치매가 오기엔 이르지 않아요?”

“농담이다, 농담.”

이반이 연초에 불을 붙이며 턱짓했다. 일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보고해 보란 뜻이었다. 나는 집무실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반의 예상대로, 트릭시는 호르세에게 줄을 댔어요. 호르세쪽 조직원들이 좀 보이더라고요.”

“내 그럴 줄 알았지.”

후우, 회색 연기를 뱉어내며 이반이 중얼거렸다.

“트릭시는 선 위에서 놀긴 하지만, 선을 넘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 놈은 아냐. 그런 놈이 갑자기 보란 듯이 선을 넘었다?”

그가 툭툭 테이블을 두들겼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 그래서 몇 명이나 있었냐?”

“열세명이요. 호르세 패밀리로 보이는 놈들이 절반 정도 됐어요.”

“그래서?”

이반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흥미로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이반을 향해 나는 짧게 답했다.

“열셋 중 열둘은 팔이든 다리든 하나씩 잘랐고, 사지 멀쩡히 남겨둔 카빈한테 뒤처리는 맡겼어요. 트릭시는 죽였고요.”

“상처 하나 없이? 열셋을?”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반은 소리 내 웃었다.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거친 웃음소리. 한참을 웃어 재낀 이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크흐, 트릭시 그놈 얼굴 참 볼만했겠는데. 하기야, 열셋쯤 불러 모았으면 애송이 하나는 담그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겠지.”

“트릭시가 똑같은 말을 하긴 했죠.”

“하여간 또라이 같은 새끼야.”

“트릭시요?”

“트릭시 말고 너 말이다, 너.”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건지.

그리 중얼거리며 이반이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껐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맡길 일이 또 생기면 부르마. 그때까진 쉬고 있어. 아, 그리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반이 제 턱을 매만졌다.

“당분간 광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광장이요?”

“그래. 윗동네에서 사람을 보내왔거든. 광장에 곧 나타날 성좌의 시련때문에 말이다.”

성좌의 시련. 성좌, 그러니까 별.

귓가에 울린 성좌라는 단어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성좌의 시련이 뭔데요?”

“아, 너는 본 적 없나? 13년마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일종의 행사 같은 건데.”

13년 전이면 내가 5살이었을 때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반의 말에 귀 기울였다.

“성좌, 선별의 검이 누군지 아냐?”

“아서요?”

“그래, 아서왕. 그 성좌와 관련된 전승 중에 가장 유명한 거 있잖냐? 바위에서 검을 뽑았다는 그거.”

알고 있었다.

엑스칼리버, 바위에 꽂힌 전설의 검. 아서 일대기의 시작을 알렸던 검이자, 훗날 아서가 하늘에 새긴 별자리의 형태가 된 성검(星劍).

“성좌, 선별의 검은 13년마다 온 대륙에 시련을 내리지. 바위에 꽂힌 검을 뽑으라는 단순명료한 시련. 사실 말이 시련이지, 그냥 행사야 행사. 그 검을 뽑은 사람은 수백 년 동안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전승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각인시키는··· 뭐 그런 일인 거지. 사람이 좀 모인 도시란 도시에는 모두 검이 나타나다 보니 이 지하 도시에도 나오더라고.”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이반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온갖 도시에 나타난다고 해도, 일단은 아서왕의 별빛으로 만들어진 검이다. 신성한 성유물이란 거지. 그런 성유물이 이런 쓰레기 동네에서 나타났는데 윗동네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윗동네에서 이곳을 어떻게 보는가. 이 도시에 대한 인식을 고려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검에 손도 못 대게 하겠네요.”

“바로 그거지. 이 시기만 되면 별을 모시는 교단이 아주 발작을 하거든.”

“검에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싹 다 신성모독으로 처형이라도 하는 건가요?”

“비슷해. 보통 처형까진 안 가고 흠씬 두들겨 패는 데 그치긴 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겠지.”

이반이 질리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벌하네요.”

“그치?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광장 근처로 다니지 마라. 윗동네에서 보낸 경비병들이 검을 하루 종일 지키고 있을 테니까.”

“···검은 언제 나타난대요?”

“나진.”

이반이 날 가만히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조금 전과 같은 장난기는 없었다. 나보다 오랜 삶을 살아온 선배로서 이반은 조언했다.

“저 윗동네 사는 높은 분들 심기 거스를 만한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새겨들어라.”

그가 자신의 안대를 가리켰다.

윗동네에서 이 도시로 추방당했을 때 빼앗긴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이반이 쓰게 웃었다.

“그어진 선 안에서 살아라. 선을 넘었다간 인생이 고달파지는 법이거든.”

아마도, 이반 자신의 경험담.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그래. 가봐라.”

내가 그렇게 집무실을 나서려는 순간이다.

“나진.”

이반이 나를 불러세웠다.

턱을 괸 채 이반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성좌의 시련이 시작되는 건 오늘 자정이다. 전망 좋은 곳에 있으면 검이 ‘꽂히는’ 장면 정도는 볼 수 있겠지.”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반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덧붙였다.

“31구획, 타리아 주점의 창가 쪽 자리가 명당이지. 내 이름을 대라. 자리 하나쯤은 내주겠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내가 웃었다.

이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선, 나는 달리듯이 건물 밖을 빠져나왔다.

광장 인근에 위치한 타리아 주점.

주점은 13년 만에 찾아오는 행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 이건 이 도시에 떨어져 태양도, 별빛도 잊은 채 살아가던 이들에게 주어진 생에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까.

별을 볼 수 있는 기회.

잊어버렸던 바깥세상의 풍경을 추억할 기회.

그 기회를 붙잡고자 지하 도시의 주민들은 평소의 곱절에 달하는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자리를 사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창가의 자리는 부르는 게 값이었고.

“······.”

그런 타리아 주점의 창가자리.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 중의 명당. 그곳에 자리를 잡은 나진은 목을 축일 음료와 함께, 낡아 해진 동화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아서 일대기.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둔 채 나진은 조용히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몇분 뿐. 나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창 밖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별, 별빛, 성좌.

바깥세상의 무엇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은 매립지의 소년이, 유일하게 놓지 못한 동경. 아직 별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다.

1분.

나진은 속으로 수를 셌다.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1분이 흘렀다. 그렇게 십초 남짓의 시간이 남았을 때 나진은 길게 숨을 뱉어내고선, 두 눈을 부릅떴다.

댕, 대엥, 댕······.

주점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진은 곧장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지하도시의 천장을 바라봤다. 어스름한 광석만이 위태롭게 박혀있던 지하도시의 천장이 지금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천장에 난 아주 작은 흠집들.

오랜 세월 돌이 마모되어 만들어진 빈틈.

햇빛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틈에서 백금색의 입자가 새어 나왔다. 처음 보는 색의 빛. 그것이 별빛이라는 사실을 나진은 뒤늦게 깨달았다.

번쩍.

흐드러지지는 별빛이 천장에 박혀있는 광석들을 환히 비추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지하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환히 빛났다.

아름답다. 나진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18년의 인생을 통틀어 나진은 별빛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몇번이고 읽었던 동화 속의 문장이 나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별빛.

아, 나진은 무심코 탄식했다.

이윽고 천장에서 새어 나온 별빛이 한데 뭉쳐지기 시작했다. 찬란한 별빛이 모여 만들어지는 건 한 자루의 검이다. 교단이 숭배하는 성검(聖劍)이자, 별빛으로 단조 된 성검(星劍) 엑스칼리버.

찬란한 별빛과 함께 엑스칼리버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백금색의 빛무리를 끌며 엑스칼리버는 지하도시의 상공에서 광장을 향해 추락했다.

본적은 없지만, 별똥별이란 게 아마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나진은 생각했다.

“와···.”

주점의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몇분조차 되지 않는, 이 짧디짧은 풍경을 위해 거금을 태운 이들이 이 자리에는 가득했다. 자신들이 잊어버렸던, 잊고 살아가던 별빛을 목격한 이들은 신음했고 또한 과거를 그리워했다.

짧은 낙하를 거쳐 성검은 광장의 중심에 박혔다.

엑스칼리버는 땅에 틀어박힐 적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장엄한 종소리와 같은 묵직한 소리가 지하도시를 휩쓸고 지나갈 뿐이었다.

‘···아.

나진은 광장의 중심에 박혀있는 검을 보았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저 성검의 검면에는 분명 별자리가 새겨져 있으리라. 과거 한 자루의 검을 쥔 채 대륙을 질주했던 아서의 별자리가.

보고 싶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소년의 눈동자가 빛났다. 성검이 흩뿌리는 별빛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의 눈동자 스스로가 내는 빛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창문에 얼굴을 밀착하다시피 가져다 댔던 나진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알 수 없는 위화감.

아니, 위화감이라기엔 뭔가 다르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술렁였다. 술렁임은 이윽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서 나진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한 줄의 문장.

검을 뽑아라.

어째서 그런 문장이 떠올랐는지 나진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헛된 망상을 나진은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미쳤나, 저 검에 손을 대면 손모가지는 물론이고 목까지 잘려 효수될 텐데.

철컥, 철컥!

그때였다.

쿵.

어디선가 걸어 나온 병사들이 땅에 꽂힌 검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의 갑옷에 가려져 별빛을 머금은 검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됐다. 주점의 여기저기서 아쉬움 가득한 탄식이 쏟아졌다.

‘조금만 더 보게 해주지.

나진 역시 병사들을 흘겨보며 혀를 찼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윗동네 사람들은 뭐 저리 유난을 떨어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빛으로 빛나던 나진의 눈동자는 어느새 본래의 색과 본래의 온도를 되찾았다. 차게 가라앉은 체념한 이의 눈동자. 나진은 말 없이 주점을 떠났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했던 별빛은 그렇게 순식간에 나진의 곁을 떠났다. 보다 정확하겐 이 지하도시와 ‘윗동네’를 가르는 구분 선에 의해 가로막혔다. 검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이 이 도시의 천장과 다를 바 없다고 나진은 문득 생각했다.

“에휴.”

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헛된 꿈을 꿔봐야 인생이 피곤할 뿐이다. 오펜과 이반, 자신의 두 스승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진은 생각을 정리했다.

정리하려 했지만.

숱한 단어들이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하나의 문장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검을 뽑아라.

떨쳐지지도, 정리되지도 않는 한 줄의 문장.

하염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그 문장을 나진은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