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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중앙 길드가 문을 닫은 시간이었기에, 의뢰에 관한 보고를 내일로 미룬 붉은 눈 용병단은 곧장 주점으로 향했다. 한탕 뛰었으면 술 한잔 걸치는 게 용병들의 전통이었으므로.
그들 사이엔 나진 역시 껴 있었다.
물론 나진은 여관으로 돌아가 푹 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제 목에 팔을 걸고 있는 붉은 눈 용병단의 단장, 로젤린 아스칼로는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 주점이 술맛이 또 끝내주거든. 내가 여기 단골이야. 단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로젤린이 주점의 문을 열어젖혔다. 주점은 텅텅 비어 있었다. 로젤린이 미리 대관해 놓은 까닭이었다. 빈자리에 붉은 눈 용병단의 단원들이 차례로 착석했다.
수많은 테이블의 중심.
그 중심에 로젤린은 털썩, 걸터앉았고 제 옆에 나진을 앉혔다. 수십에 이르는 단원들의 시야를 한목에 받고 있자니 어째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큭큭. 단장,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
“핏빛 트롤하고 일기토를 떠? 햐, 낭만 하난 끝내주는 새끼네. 너 이름이 뭐냐?”
“듣기로는 검기도 뽑았다던데?”
“깜댕이에 있을 인재가 아니구만.”
수군거리는 소리. 테이블에 놓인 맥주잔을 흔들며 다가오는 용병들.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 나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나진은 곁눈질로 그들의 명패를 확인했다.
‘제일 낮은 등급이 녹색.’
그들의 태반이 적(赤)색 등급의 명패를 달고 있었으며, 느껴지는 기세 역시 소드 엑스퍼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나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붉은 눈 용병단은 어지간한 기사단 못지않은 전력을 갖췄다던데··· 사실인가 보네요.’
-수준이 높긴 하네. 저 단장이라는 여자가 특히.
로젤린 아스칼로.
그녀를 중심으로 구성된 용병단의 수준은, 확실히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도시의 최상위권에 위치한 강자들로 이루어진 용병단이었으니.
“다 비켜 이 덩어리들아!”
그렇게 나진이 용병단의 수준을 가늠하고 있을 무렵, 로젤린은 모여든 단원들을 손을 휘저어 떨쳐냈다. 큭큭 대며 용병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로젤린은 턱을 괸 채 나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반이라 했던가?”
“예, 맞습니다.”
“나이는 스물여덟이고.”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로젤린은 웃었다.
“그 얼굴로 스물여덟은 지랄, 끽해봐야 스무살이나 돼 보이는구먼.”
“···스물여덟입니다.”
“뭐 그렇겠지. 그래야 네 경지가 설명이 되니까.”
로젤린이 툭 뱉었다.
“너 소드 엑스퍼트잖아.”
“······.”
“너 완전한 검기 뽑을 수 있잖아? 일부러 안뽑는거지. 검기의 편린이 그렇게 완성도가 높은데 검기를 못 뽑는 건 말이 안 되거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지간한 모험가들의 눈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긴 하나, 그녀는 엄연한 소드 시커다.
인간과 초인 사이에 서있는 강자.
검(劍)에 대해선 도가 튼 인물.
“끽해봐야 스물이 돼 보이는 놈이 소드 엑스퍼트라··· 게다가 검의 교단의 검술과, 아탕가의 검술을 동시에 다루고?”
밑바닥이 드러나는 느낌.
나진은 숨을 가다듬고 로젤린의 시선을 받아냈다. 가늘게 뜬 로젤린의 눈은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큭.”
자신을 경계하는 나진의 모습에 로젤린이 웃음을 머금은 채 술을 들이켰다. 햐, 하고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나진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찰싹 후렸다.
“뭘 그렇게 긴장을 해? 누가 잡아먹는대?”
제법 매콤한 손맛에 나진이 제 등을 문질렀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이 도시에 사연 없는 놈이 어딨어? 너도 나름 사연이 있겠지. 거기까지 캐물을 생각도, 파고들 생각도 없어. 내가 귀찮게 왜?”
그리 따지면 나부터가 심각한데.
그리 중얼거리며 로젤린 아스칼로는 제 눈동자를 가리켰다. ‘붉은 눈’ 로젤린. 그녀가 용병단의 이름을 붉은 눈으로 짓기 전까지만 해도, 붉은 눈이란 이명은 그녀에게 있어 멸칭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캄란의 마녀(魔女)가 태어난 땅.
붉은 눈동자는 그 땅의 주민이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협박할 생각은 없고, 그냥 술이나 한잔 걸치며 이야기하려고 데려왔다. 긴장 풀어. 술 마실래?”
“마셔본 적이 없는데요.”
“이런 애송이가, 씁··· 술맛을 몰라?”
로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여덟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닐 거면 술은 마실 줄 알아야지. 얼른 한잔해.”
“그러니까, 마셔본 적이 없···.”
“어른이 주는 건 그냥 받는 거야, 인마.”
어거지로 술잔을 들려주는 로젤린의 모습에 나진은 침음을 흘렸다. 물론 제국법상 술을 마셔도 될 나이긴 했지만, 딱히 끌리진 않았으니까.
챙.
반쯤 강제로 로젤린과 술잔을 맞부딪친 나진이 술잔을 기울였다. 목 넘김이 시원하긴 했지만, 딱히 맛이 있진 않았다. 그냥 시원하다는 느낌만이 있을 뿐.
“옳지. 잘 마신다.”
실실대며 로젤린이 나진의 잔에 술을 채워줬다. 목 넘김이 나쁘지 않았기에 나진은 물 마시듯 술을 마셨다. 그렇게 몇잔이나 마셨을까. 같이 마시던 단원들과 로젤린의 얼굴에는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왔지만 정작 나진은 멀쩡했다.
“와 이 새끼 뭐 취하질 않네···.”
딸꾹, 소리를 내며 로젤린이 어이없다는 듯 나진을 바라봤다. 좀 취하게 해놓고 대화나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나진은 취하긴커녕 얼굴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으니까.
나진 스스로도 의아하긴 했다.
술을 마시면 취기라는 게 느껴진다는데, 그런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 맞다.
그때 멀린이 나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술 절대 안 취할걸?
‘예? 왜요?’
-엑스칼리버가 가진 기본적인 축복이 정화, 그리고 치유거든. 그게 취기에도 반응하는 건지, 아서도 절대 취하는 법이 없더라구.
랜슬롯이 아서 좀 취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밤낮으로 술판을 벌였는데 결국 실패했지. 그리 중얼거리는 멀린의 말에 나진은 피식 웃었다. 왜인지 동화에서 비슷한 부분을 본 것 같았으니까.
“쓰읍. 딸꾹.”
로젤린이 턱을 괸 채 나진을 흘겨봤다.
“너 아탕가의 검술은 어디서 배웠냐?”
“아는 분 중에 아탕가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이 검이라도 가르쳐줬냐?”
“검을 제대로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나진이 피식 웃었다.
“다른 걸 많이 가르쳐줬죠.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걸 받기도 했고요.”
“괜찮은 스승이었나 보네.”
“훌륭한 스승이셨죠.”
이반과 오펜. 두 사람이 있기에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나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 스승이란 아탕가의 기사도,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본데?”
“예?”
“네가 쓰려던 검술, 그거 아탕가에선 계율에 묶인 검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래서 네가 트롤에게 쓰려던 걸 내가 막았던 거고. 그런데 쓰일 기술이 아니니까.”
로젤린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명예와 긍지를 버린 채 기사의 이름을 더럽히는 악인을 벌할 때나··· 전력을 다해 맞부딪칠 만한 긍지 높은 상대에게나 쓰는 기술이니까.”
그건 달리 말하자면.
“자신이 인정한 호적수에게만 보이는 기술이란 거지. 여기까지 설명은 못 들었나 봐?”
“···그래요?”
“그렇다니까. 어지간하면 잘 보여주지도 않아. 나도 한 서너 번밖에 못 봤거든.”
나진은 잠시 침묵했다.
트롤을 상대로 펼치려 했던 검술. 그건 지하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던 이반이, 엑스칼리버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도리어 밀어냈던 기술이었다.
전력을 다한 자신의 기술을, 정면으로 박살 냈던 아탕가의 검술.
그것은 아직도 나진에게 있어 ‘가장 강한 일격’ 하면 떠오르는 기술이었다. 그만큼이나 이반의 검은 무겁고 강렬했으므로.
‘상대를 호적수라 인정해야 쓰는 기술.’
아마도 후자의 의미로 쓰였을 그 기술에 나진은 무심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이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로젤린이 기지개를 켰다.
“이반.”
길게 숨을 내뱉은 로젤린이 나진의 이름을 불렀다.
“붉은 눈 용병단에 들어올 생각 없냐?”
그녀가 제안을 던진 순간 주점은 조용해졌다. 술잔을 들이키던 용병들은 말없이 나진을 바라봤다. 한순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제 앞에서 번뜩이는 로젤린의 눈동자를 나진은 마주 바라봤다.
붉은 눈 용병단.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진이 들려줄 대답은 같았다. 모여든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진은 짧게 답했다.
“아직 어디에 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야, 거절이 빠른데. 보통은 거절하더라도 생각이라도 해보겠다고 말하던데.”
로젤린이 큭큭댔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단원들도 ‘단장이 차였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붉은 눈 용병단은 도시의 모험가들에겐 매력적인 집단이지만··· 정점을 노리는 자에겐 그리 매력적인 집단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눈앞의 청년이 정점을 노리는, 야망가라는 사실을 단원들은 얼추 눈치채고 있었다. 핏빛 트롤과 대치하며 압도적인 1등을 쟁취한 청년에게선 평범한 모험가들과 다른 고집이 느껴졌으니까.
“뭐, 나중에라도 생각 있음 찾아오라고.”
제안은 그때까지 유효하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로젤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1등 보상이 붉은 눈 용병단에 입단할 기회였는데··· 이럼 바꿔야겠네. 뭐, 간단하게 그걸로 할까. 바르거? 이리로 좀 와봐.”
“또 뭡니까.”
“그거 있잖아 그거. 내 이름 써진 그거.”
부단장 바르거가 한숨을 내쉬며 로젤린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로젤린의 이름이 적힌 증서. 그것을 로젤린은 다시 나진에게 건넸다.
“내 이름을 한 번 빌릴 기회지. 좀 다르게 말하자면 나한테 한 번 부탁할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아.”
디에타가 주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로젤린의 이름을 한 번은 빌릴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이 도시의 정점 중 하나인 내 이름을 빌린다, 이거 굉장한 기회거든? 진짜 필요할 때 써먹어라.”
여기까지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
말을 끝마친 로젤린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질문하고 있던 것 같네. 넌 뭐 궁금한 거 없냐? 아무거나 물어봐. 한두 개는 시원하게 답해줄 테니까.”
“하나 있긴 합니다.”
나진이 시선을 내렸다.
그 시선은 로젤린의 허리춤을 향했다. 등허리에 삐죽 빠져나온 두 개의 손잡이.
“그 무기, 도대체 뭐 하는 무기입니까?”
“오, 이놈 말이지.”
튀어나온 칼자루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던 그녀가 챙, 하고 칼자루를 뽑아냈다.
그리곤 콱.
테이블 위에 두 개의 칼을 얕게 박아 넣었다. 매끄럽게 테이블을 파고든 칼날. 점주의 까칠한 눈초리에 로젤린이 ‘미안 미안’ 하고 손사래를 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무기가 궁금하다고?”
“···단장님.”
“괜찮아, 바르거. 어차피 내 걸작은 잘 알려진 데다가, 쓰기 나름이니까.”
부단장의 만류를 떨쳐낸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애송아, 걸작이 뭔 줄 알아?”
“신비(神秘)를 가진 무기라는 건 압니다.”
“잘 아네. 본래 걸작이 가진 신비는 숨길수록 유용하지만, 내건 좀 달라. 전대 사용자가 너무 유명해서 신비가 죄다 밝혀졌거든.”
본래 걸작 메아리는 수백 년 전 활동한 연합국의 용사가 다루던 걸작이었으므로.
“그러니까, 뭐. 알려줄게.”
그리 중얼거리며 로젤린이 웃었다.
“21번 걸작, 메아리.”
그녀가 손가락으로 쌍검의 칼등을 튕겼다. 챙, 하는 경쾌한 소리가 주점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몇겹으로 겹쳐서 울리는 소리. 숲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메아리는 무엇이든 메아리치게 만들어. 소리든, 충격이든, 하물며 마나까지.”
“그럼 숲속에서의 기술도···.”
“그래. 맞부딪친 메아리에 검기를 공명시킨 거지. 소리를 매개 삼아 검기를 퍼뜨리는 그런 기술인데··· 자세한 건 내 비기라 알려주기 좀 그래. 무슨 말인지 알지?”
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도 그 시선은 테이블에 박혀있는 새까만 칼날에 고정돼 있었다. 신기했으니까.
“걸작에 관심이 많나 봐?”
“신기하잖아요. 처음 보는 물건이기도 하고.”
“하긴,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관심이 있어 보이니 조금 더 걸작에 대해 들려주자면···.”
로젤린이 걸작의 칼날을 가리켰다.
“최소 수천 수만 년이 지난 무기인데도 칼날에 작은 마모 하나 없지? 이게 걸작의 특성 중 하나야.”
“특성?”
“어지간해선 안 부러지거든. 소드 마스터의 검기를 받아내도 멀쩡할걸? 거의 불괴(不壞)야.”
거의 불괴.
완전한 불괴라는 아니란 뜻이었다.
“부러지기도 해요?”
“아주 드문 경우긴 한데, 부러지긴 한다더라고.”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작끼리 계속해서 맞부딪치면 한쪽이 부러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긴 한데, 역사상 남은 기록은 ‘상위 개념’의 무기와 맞부딪쳐 깨진 기록이 태반이지.”
···상위 개념의 무기?
나진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귓가에선 멀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웃음소리였다.
“상위 개념 무기가 뭡니까?”
“들으면 ‘아’ 싶을걸? 대표적인 건 두 개긴 한데.”
로젤린이 웃었다.
“하나는 초대 검성이 지녔다던 마검이자 성검인 그람이고, 남은 하나는··· 뭐, 가장 유명한 거지.”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검(劍).
“별의 검 엑스칼리버.”
모든 무기의 정점이자, 죽지 않는 악마들에게 영원한 죽음을 안겨준 이치에서 벗어난 검. 엑스칼리버란 단어가 나온 순간 나진이 숨을 헛삼켰다.
“걸작이든, 성좌들의 성유물이던 엑스칼리버 앞에선 그냥 금속 덩어리거든. 역사상 엑스칼리버가 깨 먹은 걸작만 해도 다섯 개는 될걸?”
나진이 속으로 멀린에게 질문했다.
그게 사실이냐고.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지만, 사실이긴 해. 악마들이 걸작을 쥔 경우나 타락한 별자리들이 걸작을 쥔 경우가 좀 있었거든.
‘제가 썼을 땐 그냥 롱소드도 못 베던데요?’
-그야 네가 아직 별이 없으니까.
멀린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답했다.
-별이 있어야 엑스칼리버의 기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어. 지금 네가 휘두르는 건 ‘악마 살해’ 효과랑 치유, 정화 효과가 붙어있는 성검에 불과할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 같긴 했다.
“ 그러고 보니까.”
뭔가 기억났다는 듯 로젤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르거, 요번에 엑스칼리버 누가 뽑았다 하지 않았냐? 누가 뽑았는지 밝혀졌어?”
“아직 안 밝혀졌습니다. 밝혀졌으면 전 대륙이 발칵 엎어졌겠죠.”
“하기야. 근데 뭐··· 소드마스터들 중 한 명이 뽑지 않았을까? 숨기고 있는 거 같던데.”
“제가 봐도 그렇긴 합니다. 아마도 제국의 소드마스터 게르드 경이 아닐까요?”
바르거와 로젤린이 나누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나진은 제 손목을 매만졌다. 손목에 새겨진 별자리는 오직 나진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만, 나진은 괜스레 손바닥으로 제 손목을 덮었다.
이른 아침.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진은 퀭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용병단들은 밤새 술을 마셨고, 그들 중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 나진뿐이었으니까.
“으으으···.”
숙취에 비명을 지르는 로젤린은 나진의 등에 업혀있었다. 나진을 한번 취하게 해보겠다고 쉬지 않고 밤새 술을 들이킨 대가였다.
“일어나세요. 좀.”
“길드··· 길드까지만 데려다줘 봐. 의뢰 완수 날인은 내가 찍어야 한단 말야.”
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젤린을 등에 업은 채 중앙 길드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우욱 소리가 들렸다.
“우윽··· 야, 내려줘 봐. 으으윽.”
로젤린이 손바닥으로 빠르게 나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진이 로젤린을 내려주자, 그녀는 골목길의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등 좀 두들겨 줘 봐. 우윽···.”
나진이 한숨을 내쉬며 로젤린의 등을 두들겼다.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잡아 올린 채,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은 꽤나 초라해 보였다.
‘이딴 게··· 모험가 도시의 정점?’
목표로 했던 백각 등급은 조금 더 멋진, 그런 존재였던 거 같은데. 나진이 왠지 모를 허무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다.
“어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로젤린의 등을 두들기다 말고 나진이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서 있었다.
금화를 삼키는 뱀, 디에타.
평상시와는 다른 복장. 디에타 상단의 대표로서의 의복을 차려입은 채 중앙길드로 향하던 그녀는, 나진을 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또 뵙··· 네요······?”
그러나 그녀의 반가운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졌다. 나진이 등을 두들겨 주고 있던 여인, 겉보기에는 20대 중반이지만 실제나이는 그 두 배는 되는 능구렁이 같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까닭이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머리.
격식 없는, 가볍고 털털한 복장.
자기보다 나이는 두 배는 많은 주제에 희고 매끈한 피부.
거기에 더해 기분 나쁜 붉은 눈동자까지.
나진과 같이 있는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여자’임을 확신한 디에타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로젤린 아스칼로?”
디에타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다.
“뭐야, 누가 날 불렀··· 으웨에에엑!”